576화. 사라진 기거랑
머리가 희끗희끗한 왕 재상이 화려하고 널찍한 서재 안에 짙은 색 평상복을 입고 손에 책 한 권을 쥔 채 책상에 앉아 있었다.
“재상 대인.”
허칠안이 읍하였다.
“허 대인, 앉으시게.”
왕 재상은 책을 내려놓고, 세상의 온갖 풍파가 서린 두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허 대인은 무예를 연마하는 자이니 이 늙은이가 뜸을 들이지 않겠네.”
‘아니, 이 말에 무사에 대한 경멸이 배어있는 게 티 나잖아…….’
허칠안은 속으로 말했다. 그가 오늘 왕부에 온 이유는 왕 재상에게 ‘보상’을 얻어내기 위함이었다.
“이 늙은이가 도울 수 있는 게 뭐가 있는지 얼마든지 얘기하게.”
허칠안은 잠시 어휘를 고르더니 말했다.
“두 가지입니다. 첫째, 저는 이부의 안독고에 가서 권종을 열람하고자 합니다. 두 번째 일은 왕 재상께 여쭙고 싶은, 오래된 사건입니다.”
“자네 이부 안독고에 가서 뭘 하려는가?”
왕 재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한 사람을 조사할 겁니다.”
허칠안은 거품을 불더니 차를 마시면서 느긋하게 말했다.
“안심하십시오. 무슨 괴상한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겁니다. 재상 대인께서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왕 재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안독고 안에서 무슨 괴상한 짓을 벌일 수 있겠는가. 가장 재수 없는 상황은 권종을 불태우는 정도였지만, 이렇게 해봤자 좋을 게 없었다.
그는 그저 허칠안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궁금할 뿐이었다.
“저는 사건을 조사하는 중입니다.”
허칠안이 말했다.
‘사건 조사? 그는 이미 벼슬아치가 아닌데 무슨 사건을 조사한단 말인가…….’
왕 재상의 눈에 호기심과 의아함이 스쳤다. 그는 잠시 침음하더니 태연하게 말했다.
“늙은이가 좀 들어볼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말하자면 이 일은 재상 대인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허칠안이 미소를 지었다.
왕 재상은 어리둥절했다. 그는 느슨하게 앉은 자세를 은근슬쩍 꼿꼿하게 바꾸고, 표정이 좀 진지해졌다. 그는 마치 공무를 논의하는 상태에 접어든 듯했다.
그런 뒤 그는 허칠안의 소매에서 미끄러져 나온 밀서 한 통을 보았다. 손바닥으로 가볍게 받치니 밀서가 그의 앞에 가볍게 날려 떨어졌다.
왕 재상은 당혹스러운 감정으로 서신을 펼쳐 읽었다. 그는 먼저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뭔가 돌이켜 생각하는 듯하더니 결국에는 아득한 표정을 지었다.
왕 재상은 서신을 탁자 위에 두고 허칠안을 바라보았다.
“기억나지 않네…….”
역시! 허칠안은 침음하더니 말했다.
“그 서신의 소항은 재상 대인께 인상이 있는지요?”
“늙은이는 이 자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인상이 없네.”
왕 재상은 고개를 젓더니 말을 마치고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는 몇 초 뒤 허칠안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어조에는 정중함이 배어 있었다.
“허 공자, 자네가 조사하는 게 무슨 사건인가? 이 밀서의 내용은 사실인가?”
그는 그해 조국공과 이런 공조를 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에 서신의 내용을 의심했다.
허칠안은 생각하더니 마음속에서 가늠한 후 비밀을 약간 털어놓기로 마음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신의 내용은 틀림없습니다. 재상 대인께서 왜 잊으셨는지는 이 일에 술사가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천기가 차단된 것입니다. 그래서 관련 인물이 기억을 잃은 게지요.”
‘술사가 관련되어 있어 천기를 지워버렸다라…….’
왕 재상은 낯빛이 약간 변했다. 그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선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허 공자, 좀 더 명확하게 얘기할 수 있는가?”
허칠안은 즉시 오래된 소항 사건을 한 차례 얘기하였다. 자신이 친구 대신 그해 친구 부친의 참수 진상을 철저히 캐내겠다는 약속을 했다고만 말했다. 그러다 얼떨결에 조국공의 밀서를 발견했고, 지워진 그 흔적과 지난날의 경험으로부터 판단했을 때 이 사건의 배후에 많은 이가 연루된 듯하다고 했다. 또, 여기에 나서서 천기를 지워버릴 고품 술사가 필요하다고도 했다.
왕 재상은 다 듣더니 의자에 기대어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사천감 중에 천기를 차단할 능력이 있는 이는 감정뿐이네.”
왕 재상은 미간을 문지르더니 질문인 듯, 또는 자문하는 듯 말했다.
“감정이 이렇게 한 목적이 무엇일까?”
‘내가 어찌 알아. 그래서 지금 조사하잖아…….’
허칠안은 고개를 저었다.
“늙은이가 자네에게 친서 한 통을 주겠네. 이걸로 이부에 출입할 수 있을 것이야. 앞으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해도 무방하네.”
왕 재상은 허칠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허나 내게 조건이 있네. 만약 허 공자가 진상을 조사해낸다면 내게 알려줄 수 있길 바라네. 음, 나도 암암리에 이 일을 조사해보겠네.”
그해 조당에서는 큰 사건이 발생했고, 그 일은 천기에 의해 차단당했다. 관련 인물인 자신은 아무런 기억 없이 이 일을 잊었다.
천기를 차단하도록 감정을 나서게 할 수 있었던 일은 틀림없이 큰 문제였다.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예의상 감사 인사를 표했다.
* * *
왕 재상은 허칠안을 배웅한 뒤, 집사를 불러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허씨 집안의 신년이 아직 저택에 있는가?”
어제 그가 왕사모에게 집에서 허신년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말했었더랬다.
“계십니다. 노비가 바로 그를 부르겠습니다.”
집사는 바로 나리의 뜻을 이해했고, 허리를 굽히고 물러났다.
이윽고 흰 장삼을 입고 붉은 입술에 이가 하얀 허신년이 문턱을 넘어 의젓하게 읍했다.
“재상 대인.”
마침 왕 재상은 붓을 들고 펼쳐진 선지 위에 글을 쓰던 참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
“신년, 자네의 포부는 무엇인가?”
신년이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조금도 어색하게 들리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응?”
왕 재상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가, 자신을 뚫어지게 주시하는 허신년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왕 재상은 입꼬리를 실룩였다.
“좋은 포부군.”
그는 붓을 놓고, 종이 위에 쓴 글자를 보면서 웃었다.
“만약 자네 큰형이 정의를 좇아 나서지 않았다면, 이 늙은이는 아마 사직했어야 할 걸세. 관리 사회에서는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게 가장 중요하지. 자네의 권모술수가 얼마나 뛰어나고 패거리가 얼마나 많은지에는 관계없이 용의에 앉아 계신 그분은 한 마디로 자네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네. 전 재상이 노후를 편히 보낼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선인의 교훈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지.”
‘전 재상? 은냥을 독직하고, 폐하에게 아첨할 줄만 아는 그 변절자……?’
허신년은 속으로 말했다.
왕 재상이 말을 이어갔다.
“200년 전 국본 쟁탈이 있던 때, 운록서원이 이로 인해 조당에서 퇴출되었네. 정성(程聖)이 서원에 비를 세워 정의를 받들고 죽음을 각오하고 절개를 지키며 군주의 은혜에 보답한다고 썼네. 이것들 모두 후세 자손들에게 선언한 것이지. 군주는 군주고 신하는 신하로서 이 분수를 헤아려야만 조당에서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는 법.”
허신년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물었다.
“만약 제가 원치 않으면요?”
왕 재상은 우렁차게 박장대소하였다.
“원치 않으면 무슨 벼슬아치 노릇을 하겠다는 건가.”
허신년이 읍했다.
“소생 이해했습니다.”
그는 사서를 많이 읽었기 때문에 왕 재상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역대 왕조에 권신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만약 황제가 그를 건드리려고 한다면, 손에 쥔 권력이 아무리 크더라도 가장 좋은 말로는 사직이었다.
왕 재상이 갑자기 개탄했다.
“자네 큰형의 사람 됨됨이와 품성은 감복할 만하네. 하지만 그는 조당에 어울리지 않으니 그를 따라 하면 안 되네.”
‘최근에 형님이 자주 나에게 가르침을 청하는데 내가 굳이 그를 따라 하겠어?’
허신년은 다소 거만하게 아래턱을 치켜들었다.
“소생, 알겠습니다.”
왕 재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에 남아서 식사하게.”
* * *
허신년으로 역용한 허칠안은 이부 안독고에서 하급 관리의 도움을 받아 원경 10년에 새로 임명된 진사 명단을 반출하였다.
뜻밖인 점은 원경 10년의 장원이 재상 왕정문이었다는 부분이었다.
2등으로 진사에 급제한 자는 려안(吕安)이라고 했다.
3등으로 진사에 급제한 자는 백지로 기명되어 있지 않았다.
‘그를 찾았군…….’
허칠안은 한동안 말없이 빈 곳을 주시하였다.
‘이름이 지워진 그 기거랑은 원경 10년의 탐화(*探花: 3등으로 진사에 급제한 자)로 1갑 진사다. 그는 도대체 누구며, 왜 천기가 차단된 거지? 이 자는 지금 죽었을까, 살았을까? 조정에 들어와 관리가 된 이상, 초대 감정일 리는 없다. 이 일은 어쩔 수 없이 당대 감정만 할 수 있는데 감정은 왜 이렇게 해야 했을까? 이름이 없는 기거랑과 소항은 또 무슨 관계일까? 소항의 이름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가 그 기거랑은 아니어도 분명히 관련은 있다.’
그는 이미 손에 쥔 단서에 근거하여 간단한 가설을 세웠다.
그해 조당에 당파가 하나 있었고, 소항은 그 당파의 핵심 구성원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름이 지워진 그 기거랑은 당파의 우두머리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 당파는 아주 강대하여 각 당의 집중 공격을 받아 결국에는 처참한 말로를 맞이하였다. 소항의 말로가 바로 그 증명이었다.
하지만 허칠안이 납득할 수 없는 점은 따로 있었다. 만약 이 일이 그저 평범한 당쟁이었다면, 감정이 또 왜 그 기거랑의 이름을 지웠을까? 그들은 왜 천기를 차단해야 했고?
여기에는 분명히 한층 더 깊은 비밀이 있었다.
‘이 해묵은 지난 일이 아주 중요하다는 점을, 직감이 내게 알려준다. 앗, 쓸데없는 말. 당연히 중요하지. 그렇지 않았다면 감정이 왜 나서서 차단했겠는가. 에휴, 케케묵은 옛 사건을 조사하는 게 가장 싫은데. 아니, 술사가 가장 싫다. 종리와 채미 두 귀염둥이는 빼고.’
허칠안은 이부를 나서 애지중지하는 암말을 타고 다그닥다그닥 거리를 걸었다.
암말은 이해심이 아주 많았기에,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은 속도를 유지하면서 허칠안이 말을 모는 데에 집중할 필요 없이 이 틈에 사건을 생각할 수 있게 했다.
‘애당초 상백 사건을 조사할 때 초대 감정도 연루되었는데 역사 연구 자료에는 아무것도 기재되어 있지 않다. 결국, 똑똑한 회경이 500년 전의 절이 쇠약해졌다는 걸 통해, 단서를 청룡사로 단정 지었다. 이로써 신수와 불문이 관련 있고 500년 전 중원에서 흥했던 불문과 관련 있다는 걸 내가 깨닫게 했다. 회경의 방법을 마찬가지로 이 기거랑한테 써볼 수 있겠다. 그해 큰 사건을 조사하여 그 속에서 단서를 찾아볼 수 있겠어.’
그는 생각의 갈피를 정한 뒤 원경제 일을 따져보기 시작했다.
그가 전에 원경제를 조사하려고 했던 건 그저 경찰의 후각에 기인해서였다. 고작 혼단을 위해서라면 원경제가 진북왕과 연합하여 성안의 백성을 도살하는 이렇게 큰 모험을 무릅쓸 리가 없었다.
어쨌거나 혼단은 신보(腎寶)가 아니어서 세 입 먹는다고 늙지 않고 장생하는 게 아니었으니 백성을 도살할 정도까지는 전혀 아니었다.
검주의 일을 겪고 나서 그는 원경제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점점 더 확신했다. 기운을 얻은 자는 장생할 수 없는데 그 늙은 황제는 지금까지 뭐 때문에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걸까?
명색이 한 나라의 군주로서 그가 이 비밀을 모를 리가 없었다. 선조와 무종은 예외였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기거록부터 단서를 찾아야 한다. 선황의 기거록이다. 만약 원경제에게 정말 비밀이 있다면 그가 분명히 처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라도 완전히 흔적을 지울 수는 없겠지. 예컨대 선황 쪽은 중요한 단서를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눈에 띄지 않아 제삼자가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반드시 어느 정도 정보를 손에 쥔 사람이어야만 보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선황 쪽에도 단서가 없다면 나는 이모를 찾아갈 수밖에 없다. 이모는 원경제에게 도를 닦는 법을 이렇게 여러 해 동안 가르쳤으니 실마리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을 리는 없겠지?
그런 다음에는 초대 감정의 구질구질한 일이다. 나는 우선 허주라는 곳을 찾아내야겠다. 음, 위 공과 신년이 나를 도와줄 테지. 참, 내일 임안과 데이트할 때 회경에게 전갈을 보내 달라고 부탁해야겠다. 그녀한테도 허주 조사를 도와달라고 해야지. 공부벌레들을 합리적으로 이용해서 내 일을 대신하게 해야 해. 맞다, ‘의(意)’를 깨닫는 일 역시 빼놓을 수 없지. 비록 아직 나한테 어떠한 단서도 없지만. 내일은 우선 나 자신에게 휴가를 줘야겠다. 기루에서 노래 들어야지. 부향이 좀 그립네……. 일이 정말 많다…….’
허칠안은 암말 위에 올라타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