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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타경-575화 (555/712)

575화. 공로

임안은 코가 시큰시큰해져서 곧 눈물을 흘릴 것 같이 마음이 쓰라렸다. 그녀는 억지로 버텼다.

“본 공주가 피곤하네. 허 대인 다른 일이 없으면…….”

그녀가 말을 마치기 전에 궁녀가 종종걸음으로 들어와서 낭랑한 목소리로 전했다.

“태자 전하 오셨습니다.”

임안은 약간 당황하여 고개를 숙이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슬픔을 감추고 빙그레 웃으며 황급히 말했다.

“태자 오라버니께 어서 들어오라고 하거라.”

‘태자는 왜 온 거지. 그때 가서 나를 쫓아내면 망한다. 임안이 나를 죽을 만큼 미워할 거라고…….’

허칠안은 좀 욕을 퍼붓고 싶었다.

화려한 옷차림의 태자 전하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상대는 임안이 아니라 허칠안이었다. 마치 잘생긴 남자가 가장 먼저 신경 쓰는 건 언제나 자신보다 더 잘생긴 동성인 것과 같았다.

태자 역시 지금 이런 감이 있었다.

그는 명색이 황태자로서 신분이 고귀하고, 혈통이 우수하며 겉모습이 아주 훌륭했지만, 이 서길사와 비교했을 때는 좀 평범했다.

더욱이 허칠안은 오늘 하늘색의 화려한 옷을 입어서 귀티나 오만함이 전혀 그에게 뒤지지 않았으며 정력 또한 그보다 훨씬 압도적이었다.

“허 대인도 있었군.”

태자는 얼굴에 미소를 짓고, 고개를 돌려 보잘것없는 불쾌함을 버렸다. 그는 그저 좀 의아했을 뿐, 여동생과 허신년 사이에 무슨 교집합이 있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잘 됐군. 그는 허칠안의 사촌 동생이니 내가 먼저 그를 진영에 끌어들이면 그때 가서 허칠안이 내 체면을 세워주지 않을 수 없겠지?’

태자는 즉시 자리에 앉아 허신년과 열렬하게 대화를 펼쳐나갔다.

태자는 한담을 나눈 뒤, 무심한 척 화제를 조당의 일로 끌고 와 웃으며 말했다.

“눈이 삐었네, 눈이 삐었어. 본래 왕당이 이번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사후에 반전이 있더군. 원웅이 우도어사로 강등되고, 병부시랑 진원도는 울화병으로 자리에 드러누웠네…….”

태자는 일단 말문을 튼 뒤 허칠안을 쳐다보며, 그가 화제를 따라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길 기대했다.

나라를 비난하고 조당의 일을 비판하길 좋아하는 점은 젊은 관원의 일반적인 습성이었다. 새로 임명된 풋내기 진사는 더욱 그러했다.

허칠안은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강 넘겼다.

“조당 다툼은 예측하기 어렵죠. 어떠한 반전도 다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임안은 따분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지금 그저 혼자서 조용히 있고 싶었지만, 여기는 소음궁이었다. 그녀는 명색이 주인으로서 함께 자리해야 했다. 주인이 혼자 자리를 떠나 ‘손님’을 버려두는 건 아주 실례되는 행동이었다.

‘보아하니 여전히 경계심을 갖고 있군…….’

태자는 눈을 빛내더니 더는 언쟁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본 태자가 듣자 하니 왕당이 군신을 집결하여 순조롭게 고비를 넘길 수 있었던 건 전부 허 대인의 공로라던데.”

임안은 고개를 홱 돌려 허칠안을 빤히 쳐다보았다.

‘태자 전하께서는 정말 보조용 비장의 카드군요…….’

허칠안은 임안을 쳐다보더니 아무런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결코 저의 공로가 아니라 제 형님의 공로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임안은 그의 말을 듣더니 갑자기 숨을 몰아쉬었다.

“허 대인, 자네 뭐라고 했는가? 뭐가 자네 큰형의 공로라는 말이지? 얼, 얼마 전의 조당 다툼에 허, 허칠안도 개입했다고?”

태자는 화제를 이어받아 말했다.

“임안, 너 아직 모르는구나. 듣건대 조국공이 생전에 밀서들을 남겼는데, 거기에는 요 몇 년간 율법을 어기고 뇌물을 받거나 진상품 횡령 등등의 범법 행위를 저지른 일들이 적혀 있었다. 누가 그와 공모하고 누가 거기에 가담했는지 아주 낱낱이 쓰여 있었지. 허칠안이 어디서 이 증거를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이 증거 덕분에 왕당이 이번 위기를 넘길 수 있었어. 내가 말한 건 전부 기밀이니 임안, 절대로 바깥에 퍼뜨리면 안 된다.”

임안은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였다.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허칠안을 주시하면서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개…… 허칠안이 왜 왕당을 도와주려 하지?”

그녀는 자신의 심장이 쿵쾅쿵쾅 미친 듯이 뛰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마치 어떤 일을 한결같이 바라면서도 결과를 보길 두려워하는 듯, 불안해하면서도 기대감을 감출 수 없었다.

‘하, 임안의 심장이 이렇게 빨리 뛴다니? 내가 만약 형님이 왕 재상과 동맹을 맺기 위해서라고 말한다면 이 자리에서 울음을 터트릴 건가?’

허칠안은 웃으며 말했다.

“형님이 말하길 임안 마마께서 사람을 보내 말을 전하셨기 때문이라더군요. 임안 마마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형님이 최선을 다해 이뤄드릴 거라고 했습니다. 설령 이미 은라가 아니어서 능력에 한계가 있다고 해도 말이지요.”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임안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마치 길을 잃은 행인이 황량한 들판에서 불빛을 보더니 마음이 갑자기 안정된 것처럼 눈매가 구부러지고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그녀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희열을 숨기려야 숨길 수 없었다.

태자는 갑자기 꽃처럼 아름다워진 여동생을 곁눈질하더니 아무런 내색하지 않고 돌아서서 상대를 초대했다.

“내일 본 태자가 궁 밖에서 연회를 베풀 건데 허 대인이 체면을 세워줄 수 있겠는가?”

허칠안은 기꺼이 응했다.

“사양하자니 실례가 되는 것 같습니다.”

태자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허신년’이 떠날 뜻이 없어 보이자 속으로 생각했다.

‘내일 다시 임안에게 얘기해도 늦지 않겠군.’

그가 즉시 일어서서 말했다.

“오늘 저택에 초청장을 보내겠네. 본 태자가 할 일 없이 무료하여 와서 앉아 있었는데 처리할 사무가 남아 있으니 먼저 가 보겠네.”

임안은 일어서서 허칠안과 함께 태자를 배웅하였다. 그녀는 태자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동글반반한 아래턱을 치켜올리더니 미소를 지었다.

“허 대인은 일이 더 남았는가?”

허칠안은 모기처럼 가느다랗게 자신의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 소직이 보고 싶었사옵니다.”

임안의 연약한 몸이 갑자기 경직되더니, 그녀의 다정한 도화안에 놀라움과 기쁨 그리고 흥분이 스쳤다. 그녀는 동글반반한 새하얀 얼굴에 취한 사람처럼 홍조를 띠었다.

그녀는 빽빽한 속눈썹을 몇 차례 깜박이더니 기쁨과 흥분을 억누르고 억지로 침착함을 유지했다.

“허 대인, 본 공주가 자네에게 묻고자 하는 일이 아주 많으니 들어가서 얘기하지.”

그녀는 응접실로 돌아온 뒤 차분한 목소리로 분부하였다.

“너희들 모두 물러가거라.”

응접실 안에 서 있던 궁녀들은 예를 갖추고 응접실에서 물러났다.

임안은 사람들이 물러가고 나자 즉시 태도가 바뀌었다. 그녀는 양 허리춤에 손을 얹고 눈을 부릅뜬 채 볼에 바람을 넣고 씩씩거렸다.

“개자식, 어째서 회신하지 않았지? 왜 본 공주를 보러 오지 않았어?”

“마마께서 저를 생각하면 늘 마음에 걸리지 않으셨어요? 생각하다 보니 입맛도 없어지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허칠안은 더는 위장하지 않고 해죽이 웃으며 말했다.

“너, 너 헛소리하지 마. 본 공주가 널 그리워하다니.”

임안은 서둘러 부인하였다. 그녀는 출가하지 않은 공주였다. 임안은 얼음처럼 맑고 결백한 여인이므로, 어떤 남자를 그리워한다는 이런 부끄러운 일을 절대 인정하면 안 됐다.

허칠안은 그녀를 주시하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저는 마마가 보고 싶어서 입맛도 없어지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날개를 꽂고 궁으로 날아 들어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고요. 설사 폐하께서 활시위를 당겨 저를 쏜다고 해도 마마를 만날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답니다.”

임안은 갸름한 얼굴이 확 달아오르더니 얼굴과 귀가 빨개져서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너, 너, 너…… 너 이렇게 본 공주한테 얘기하면 안 돼.”

그녀는 갑자기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이렇게 대담하고 노골적인 표현을 지금껏 경험해 본 적이 없었기에, 자신이 벽의 모퉁이에 몰린 쥐가 된 기분이었다.

“마마. 자, 제가 요 며칠 검주에서 일어난 재미있는 일에 대해 얘기해 드릴게요.”

허칠안은 그녀의 작은 손을 잡고 끌어서 탁자 옆에 앉혔다.

임안은 소소하게 반항하더니 그가 자신의 손을 잡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녀는 고개를 약간 숙였는데 몰래 기뻐하는 듯했다.

* * *

시간이 흘러 어느덧 점심 식사할 시간이 되었다.

마당에 서 있던 궁녀가 부른 뒤에야 임안은 여운을 남기고 말을 멈췄다. 그녀는 동반자가 너무나 필요했다.

“점심은 소음궁에서 먹지 못하겠어. 내일 나는 임안부로 옮겨갈 거니까, 개자식, 너, 너 다시 올 수 있어?”

그녀의 부드럽고 매력적인 눈빛 속에는 기대와 약간의 간청이 담겨 있었다.

“그럴게요.”

허칠안은 그녀의 부드러운 손을 문질렀다.

임안은 사람의 넋을 뒤흔들어 놓는 교태를 머금고 갑자기 웃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요염한 소저였다.

“잠깐, 네게 줄 게 있어.”

그녀는 치맛자락을 들고 일어나 응접실을 나섰다. 한참 뒤, 궁녀들이 금은옥기(金銀玉器) 접시를 하나씩 받치고 돌아왔다.

“너희는 먼저 물러가거라.”

그녀가 손짓하여 궁녀들을 물리친 후 재잘거렸다.

“이제 너는 벼슬아치가 아니잖아. 네게 다른 생계 수단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금은을 많이 비축해두면 좋잖니. 소음궁에는 값어치 있는 물건에 많은데 내가 다 쓰지도 못해. 회경이 말하길 앞으로 네가 경성을 떠날지도 모른다던데. 나, 나도 앞으로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니까…….”

그녀는 말을 이어가는 대신 그를 한번 쳐다보았다. 사실 그녀는 그의 모습을 좀 더 보고 싶었지만, 그는 지금 사촌 동생의 모습으로 역용한 상태였다.

이곳은 소음궁, 그러니까 황궁이었기에 그에게 제멋대로 위장을 풀라고 할 수도 없었다.

임안은 어쩔 수 없이 소망을 마음속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참, 이 화본 아주 재미있더라. 네, 네가 도로 가져가서 보렴.”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소매 속에 숨긴 화본을 꺼냈다.

허칠안은 물건을 거두고선 지서 파편에 담았다. 그는 걸음을 내디뎌 응접실 입구로 걸어가다가 약간 주저하더니 손을 뻗어 얼굴을 잠시 어루만졌다.

“마마!”

그가 활짝 미소를 머금고 돌아섰다.

하늘색의 비단옷에는 푸르스름한 회운(回云)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고 패옥이 달랑거렸다. 머리는 투조(透彫)한 금관으로 묶고, 발에는 부운화를 신고 있었다.

임안은 순간 좀 멍해졌다.

* * *

이튿날, 허칠안과 허신년은 왕씨 집안 소저의 마차를 타고 황성으로 들어왔다. 마부는 마차를 몰아 왕부로 향했다.

허칠안은 양털을 깐 푹신한 평상에 앉아서 손에 있는 화본을 뒤적였다.

“정천대성(情天大聖)? 무슨 쓸데없는 책이에요? 형님은 어떻게 이런 심심풀이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허신년이 궁금해했다.

큰형처럼 저속한 무사가 독서하는 일은 여태껏 없었다.

“책 내용은 요족의 한 미물이 천계의 공주를 사랑하게 된 이야기란다. 이건 허락되지 않는 사랑이라 요족 미물은 속세로 내몰려 일꾼이 되었지. 나중에 요족 미물이 천신을 죽이고 공주를 속세로 도로 데리고 와서 두 사람이 함께 소박한 삶을 살아간다는 이야기란다.”

허칠안의 미소는 약간 복잡했다.

이는 그가 애당초 호구 종리더러 대필하게 하여 임안에게 써준 내용이었다. 지금 임안이 화본을 그에게 준 건 뭘 암시하는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차는 왕부 문밖에 멈췄다.

왕부의 집사는 저택 문에서 진작에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가 멈추자 하인이 바로 두 사람을 데리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허신년은 응접실에 남았고, 왕사모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허칠안은 왕 소저가 그를 보는 눈빛에 약간의 원망이 서렸음을 예리하게 알아차렸다.

‘너 지금 네가 마음에 둔 사람을 심하게 때렸다고 나를 원망하는 거니? 퉤, 내가 내 아우를 때리는 일이 너랑 무슨 상관이야…….’

그는 속으로 비아냥거리곤 집사를 따라가 왕 재상의 서재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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