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4화. 임안을 만나다
왕 부인이 옆에서 듣더니 미소를 지었다.
“아까 사모의 말이 맞다. 너희 아버지께서 어떤 풍랑이든 전에 겪지 않으셨겠니. 걱정하지 말아라.”
왕 이공자는 왕사모가 들어오는 걸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동생아, 아버지께서 막 저택을 나가셨다. 네게 좋은 소식 하나 알려줄게. 전 숙부께서 국면을 타개할 방법을 찾았다고 말씀하시더구나.”
그가 잠시 멈칫하더니 바로 말했다.
“그 자식은? 둘째 오라버니가 이 기회를 빌려 그가 고생을 함께할 수 있는지 없는지 시험해 보려고 한다. 네가 나를 데리고 그를 찾아가자꾸나. 왕부가 큰 재난을 당해 앞이 캄캄하다고 말하면서 그가 너한테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봐야겠다.”
그가 마침 흥을 내려는데 왕사모가 쌀쌀맞게 말을 끊었다.
“여기서 호언장담하는 둘째 오라버니보다 그 사람이 훨씬 낫거든.”
왕 이공자는 상처받아 눈을 부릅떴다.
“사모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왕 대공자는 기분이 좋았기에 즐거워하며 둘째 아우를 치켜세우더니 미소를 지었다.
“운록서원 지식인의 품성은 인정할 만하지. 허나 네 둘째 오라버니도 호의잖니. 그가 해보겠다고 하니 그더러 해보라고 하렴.”
왕사모는 입을 오므리더니 앉아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천천히 말했다.
“아버지와 숙부들이 국면을 타개할 방법이 있어. 조정 몇몇 대인이 율법을 어기고 뇌물을 받은 증거야.”
“네가 어떻게 아니?”
왕 대공자는 어리둥절했다.
“이걸 허신년이 가져왔으니까. 그가 이걸 위해 큰 대가를 치렀어.”
왕사모는 즐거우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허신년이 가져온 거구나…….”
왕 이공자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 이건 두둑한 승부수인데 그걸 이렇게 줬다고?”
왕 대공자 역시 중얼거렸다.
왕 부인은 두 아들의 낯빛을 보면서 딸이 마음에 들어하는 그 허씨 자식이 이 일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걸 깨달았다.
* * *
그 후 3일 동안, 경성 관리 사회에 암류가 거세게 일었다. 처음에 중립파는 왕당과 황권이 대립하는 모습을 수수방관하였다. 왕당의 위아래 인심이 흉흉하고, 원웅과 진원도가 대표하는 ‘황권당’은 칼을 갈았다.
하지만 사태가 진전됨에 따라 대리사는 우선 왕당에 빌붙기로 했고, 형부와 연합해 투옥된 왕당 관원은 도찰원과 공방전을 펼쳤다.
뒤이어 육과 급사중의 적잖은 사람들이 배신하여 당동벌이(*黨同伐異: 일의 옳고 그름은 따지지 않고 뜻이 같은 무리끼리는 서로 돕고 그렇지 않은 무리는 배척함)하고 직권을 남용하는 진원도와 원웅을 탄핵하였다. 순식간에 전쟁의 불길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번졌다.
훈귀 집단 중에도 몇몇 실세가 잇따라 상소를 올려 원웅과 진원도를 탄핵하였다.
짧은 시간 내에 각 군대가 튀어나와 왕당을 유지하려 애썼고, 형부와 대리사는 ‘왕당의 부정 관리’에 관한 조사를 보류하였다. 심문 결과를 알아낼 수 없자 원웅 일당의 후속 계획도 중단되었다.
결과를 알아내든 말든 조당에는 탄핵 상소문이 빗발쳤다. 관리 사회에는 원경제가 추수 이후에 끝장을 낼 것이며, 애당초 그에게 죄기소를 쓰라고 핍박했던 자들도 전부 숙청될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삽시간에 사람들은 마음이 동요하였고, 소문이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는 아직 끝이 아니었다. 육과 급사중과 장항영을 필두로 한 어사들은 피비린내를 맡은 상어처럼 흥분하였다. 그들은 원경제의 편협한 보복이 황실의 체면과 황제의 위엄을 해친다고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급사중이 가장 즐겨하는 일이 바로 황제의 잘못을 들춘 뒤에 그를 찌르는 상소문을 쓰는 것이었다. 이는 그들이 충신임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또한 빠르게 유명해져 관리 사회와 지식인 사회에서 명성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닷새째 되던 날, 원경제는 침전에서 노발대발한 뒤 이 일을 중단하고 수감된 왕당 구성원을 석방하라고 하였다.
원웅은 우도어사로 강등되었고, 본래 우도어사인 유홍이 좌도어사 자리를 이어받았다.
병부시랑 진원도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앓아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 * *
태자는 이날 휴가를 보내면서 조정의 정세 변화를 내내 방관하던 중 꽃 구경을 한다는 명분으로 이부 서 상서를 급히 불러들였다.
태자는 동궁 화원 안 정자에 앉아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물었다.
“요 며칠 조정의 변화가 아주 말문이 막히더군요. 지금까지도 본 태자는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서 상서께서 본 태자의 의혹을 풀어주시지요.”
이부 서 상서는 왕당이면서도 태자의 옹호자였기 때문에 그를 부르는 건 더할 나위 없이 적합했다.
서 상서는 평상복을 입고 화원 안에서 약간 찬 바람을 맞으며 은은한 꽃향기를 느끼고 흐뭇해했다.
“이 일에는 딱히 큰 현묘한 이치가 없습니다. 얼마 전, 한림원 서길사 허신년이 밀서 몇 통을 보내왔습니다. 조국공이 남긴 것이더군요.”
그는 즉시 사실을 있는 그대로 태자에게 말했다.
태자가 호흡이 다소 가빠져서 캐물었다.
“밀서는 어디에 있지요? 더 있습니까? 분명히 더 있을 겁니다. 조국공은 여러 해 동안 대권을 손에 장악하였는데 고작 몇 통만 있을 리가 없어요.”
만일 그가 그 밀서들을 얻을 수 있다면, 세력이 커지면서 태자의 위치가 점점 공고해질 터였다.
“소신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애석하게도 허칠안은 위연의 사람이라…….”
서 상서는 웃더니 말을 잇지 않았다.
순간 태자는 머리를 굴렸다. 왕당이 얻지 못한다고 해서 그가 얻지 못한다는 의미가 되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애당초 이 일에는 임안의 편지가 영향을 끼쳤다. 그렇지 않다면 허칠안이 왜 사촌 동생의 손을 빌려 밀서를 왕 재상에게 전했겠는가?
허칠안이 답신하지 않았다면 의심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어쨌거나 그의 신분은 민감하니까.
‘소음궁에 다녀와야겠다. 임안에게 허칠안과 연락할 방법을 생각하게 해서 의도를 알아봐야겠어. 어쩌면 그한테서 더 많은 밀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태자는 술자리가 지루했다. 그는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인내심을 갖고 서 상서와 잠시 대화를 나누더니 궁 밖으로 내보냈다.
그는 바로 길을 돌려 소음궁으로 향했다.
* * *
임안은 소음궁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뒤 낮잠을 잤다. 홑옷을 입은 그녀는 일어나 앉아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그녀가 기지개를 켤 때 눈처럼 매끈하고 가는 허리가 드러났다.
그녀의 개미허리는 곡선이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두 요와(腰窩)는 매혹적이고 귀여웠다.
임안은 궁녀의 시중을 받으며 복잡하면서도 화려한 궁군을 입은 다음 찻물로 입을 헹구고 세안한 후, 미인선(美人扇)을 흔들며 정자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수행 궁녀는 화본을 읽었다. 그녀는 숨을 돌리는 틈을 타 공주마마를 몰래 관찰하였다.
마마는 요 며칠 몹시 우울했던 것에 비하면 근래에 많이 회복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좀 기운이 없어 보였다.
“네가 보기에 책 속의 소저가 만약 대부호의 여인이 아니었다면, 그 가난한 서생이 그녀를 좋아했을까?”
임안이 부채를 가볍게 흔들다 멍한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면서 갑자기 물었다.
궁녀는 생각하더니 말했다.
“좋아했을 거예요. 어쨌거나 서생이 그녀를 데리고 몰래 도망쳤잖아요.”
임안은 고개를 젓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하지만 어떤 이가 나한테 알려줬는데 서생은 일부러 부잣집 딸을 데리고 몰래 도망쳤다더라. 이렇게 하면 그는 고가의 예물을 줄 필요 없이 빼어난 자태의 부인에게 장가들 수 있으니까. 진정으로 책임감 있는 남자라면 이렇게 하면 안 되지.”
궁녀가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임안이 고개를 들고 다소 구슬프게 말했다.
“본 공주도 모르겠어. 예전에 본 공주는 그가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때 시위가 밖에서 걸어와 멀지 않은 곳에 멈추고 읍했다.
“전하, 한림원 서길사 허신년이 만나 뵙길 청합니다.”
임안은 어리둥절하였고, 몇 초 만에 겨우 허신년이 그자의 사촌 동생임을 떠올렸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자신은 그 서길사와 전혀 교집합이 없는데 그가 만나자고 청할 일이 뭐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몇 초 침음하더니 말했다.
“그를 데리고 궁에 들어오거라.”
일각 후, 허칠안이 하늘색 비단옷을 입고 부운화(覆云靴)를 신고 금관으로 머리를 묶어 아우의 모습으로 역용한 상태로 소음궁 시위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왔다.
임안은 탁자 뒤에 단정하게 앉아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진지한 모습으로 궁녀에게 차를 내오라고 분부하였다.
그녀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허 대인께서 무슨 일로 본 공주를 만나려는 건가?”
갑자기 허칠안은 처음 임안을 만났을 때의 상황으로 돌아간 듯했다. 그때도 그녀는 이렇게 고귀한 카나리아처럼 예쁘고 도도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이와 같이 일관된 태도를 보이다가, 나중에는 재잘거리기 시작하며 단순하면서도 활발한 면을 내보였다. 그녀는 분명히 병아리인데도 아주 잘 싸우는 암탉 같았다.
마치 공주가 무거운 갑옷을 벗어 던지고 안에 있는 꼬마 여자아이를 보게 한 듯했다.
‘임안은 역시 임안이야.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그저 내가 편애당했을 뿐이지…….’
허칠안은 허신년의 음색을 모방하여 예를 갖추었다.
“소직, 형님 부탁을 받고 전하를 뵈러 왔습니다.”
임안은 도도하면서도 어색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그 순간 감정이 풍부한 도화안이 어두워지더니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유약해졌다.
“그, 그가 직접 오지 않고?”
허칠안은 고개를 저었다.
“마마, 무슨 말씀이셔요. 형님이 어찌 마마를 뵈러 올 엄두가 나겠습니까. 그가 궁이나 황성에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폐하께서 고개를 돌려 그를 벨 수 있는데요.”
‘나를 만나러 오지 않는다고 해도 왜 회신조차 원치 않는 거지…….’
임안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자네 큰형은 요즘 괜찮은가?”
그녀는 이 말을 할 때 눈빛도 표정도 진지했다. 결코 인사치레로 건네는 안부가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 허칠안의 근황을 마음에 두었다.
임안은 감정적인 소저였다. 당신이 그녀를 놀리면, 그녀는 깔깔깔 웃을 것이다. 당신이 그녀를 농락하면, 그녀는 이를 드러내고 발톱을 치켜세운 뒤 당신을 괴롭힐 것이다. 그녀는 회경처럼 IQ가 높고 도도하지 않았다.
당신이 그녀를 놀리면, 스스로 난처해질 뿐이었다.
그러나 허칠안은 그녀를 괴롭히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하고 놀렸다.
“형님은 요즘 아주 잘 지냅니다. 매일 수련하는 것 말고는 여기저기 놀러 다닙니다. 얼마 전에는 막 검주에 다녀왔습니다.”
“그럼 다행이네, 그럼 다행이야…….”
임안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오므리더니 기분이 꿀꿀한 여자아이처럼 상대를 떠보았다.
“그, 그가 요 며칠 최근 조당 다툼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던가? 음, 이 때문에 고민은 없고?”
사실 그녀는 위연에게 부탁한 적은 있는지도 묻고 싶었다.
하지만 평소에 한림원에서 지내는 허신년의 처지를 고려했을 때 이 일들을 꼭 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만약 허칠안이 정말 그녀의 부탁을 마음속에 새겼다면, 분명히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고 방법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조당에서 관직을 맡은 허신년도 문의하는 대상 중 하나일 터였다.
허칠안은 기대하는 듯한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형님은 이미 은라가 아니니 조당의 일은 신경 쓰기 귀찮다고 하더군요. 마마께서는 갑자기 왜 물으십니까?”
“본, 본 공주는 그저 그냥 물어봤을 뿐이다.”
임안은 마지못해 웃었다. 그녀는 그 남자의 무성의함, 그리고 그의 멀어짐과 무관심을 감지하자 가슴이 순간 미어져서 아주 낙담하였다.
그녀는 허칠안이 평생 그녀에게 헌신하겠다고 말했던 일을 기억했다. 물론 그 말은 농담조이기는 했지만, 임안은 그가 자신을 중시하던 태도를 봤을 때 그것이 마냥 헛된 약속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신이 호감 있는 남자가 당신을 가슴속 중요한 위치에 둔다는 건 기쁘고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방금 그 남자가 전에 했던 말, 했던 일이 건성으로 속인 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돌연 알아차렸다. 그는 지금 근본적으로 당신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