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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타경-573화 (603/712)

573화. 쓸모 있는 도구

단향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널찍한 서재 안. 왕 재상은 차를 받친 채 눈썹을 찌푸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영전 대학사 전청서, 건극전 대학사 진기(陳奇), 형부 손 상서 등의 심복이 엄숙한 표정을 하고 한자리에 모였다.

“폐하의 뜻을 보니 며칠 지나면 우리 차례겠는데요?”

전청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성미가 거칠고 급한 건극전 대학사 진기가 노하여 탁자를 치며 욕을 퍼부었다.

“초주성 백성 대량 학살 사건은 본래 회왕이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뛴 것인데 어찌 용인할 수 있단 말입니까? 까짓것 벼슬에서 물러나지요.”

이부상서가 콧방귀를 뀌었다.

“자네가 벼슬에서 물러난다면 어찌 진씨의 마음을 헤아리겠는가.”

왕 재상은 주인석에 앉아 고급 차를 음미하며 동료들의 논쟁을 묵묵히 들었다. 험난한 관료 사회에 반평생을 몸담은 노인은 지금껏 정신을 못 차린 때가 없었다.

논쟁 소리가 약간 잦아들자 왕 재상이 물었다.

“위연 쪽은 무슨 태도인가?”

“문전박대 당했습니다.”

전청서는 침울한 표정으로 답했다.

“뜻밖이지 않네.”

왕 재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아직 그를 쓰려고 하시니 위연의 영향이 우리보다 훨씬 크지.”

이부상서가 냉소를 지었다.

“폐하께서 그가 독점하도록 용인하실까요?”

왕 재상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몇 년 전부터 나는 그가 조당 싸움에 진저리가 났다고 생각했네. 그는 다시 군대를 지휘하고 싶어 하네.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면, 회왕의 죽음에는 그의 공도 있네. 손 상서, 자네는 형부를 맡고 있으니 잘 지켜야 하네. 대리사와 도찰원이 단죄하지 못하도록 해야 해.”

형부 손 상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 상서, 나는 자네가 태자를 추대하고 지지한다는 걸 알고 있네. 마침 이 기회를 빌려 다른 태자당에게 연락해보게.”

이부상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왕 재상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관직에서 물러나도 딱히 나쁠 건 없지. 한창일 때 과감하게 물러나는 셈 치자고. 암담한 결말도 언젠간 지나가기 마련이네. 게다가 사직한 후에 다시 임명될 수도 있잖나. 군자는 이익이 되는 건 좇고, 해가 되는 건 피하며 물러날 때는 물러날 줄 알아야 하는 법.”

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왕사모의 온유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울렸다.

“아버지, 소녀 용무가 있습니다.”

왕정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들어오거라!”

그의 적녀는 영리하여 대국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는 편이었으니, 중요한 일이 아니면 이 시기에 방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왕사모는 서재 문을 밀어젖히고 문 앞에 서서 사뿐사뿐 예를 갖추었다. 그 모습이 상황에 꼭 알맞았다.

“아버지, 허 대인이 급한 일로 만나 뵙기를 청합니다.”

손 상서 등은 왕사모의 입에서 나온 ‘허 대인’이 허칠안인 줄 알고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그들은 아주 큰 흥미를 느꼈다.

그들은 그 말썽꾸러기가 밉살스러웠다. 하지만 그의 일 처리하는 능력과 수법은 진작에 조당 제공들의 인정을 받았더랬다.

허칠안이 이때 왕부를 찾아온다는 게 무슨 의미이겠는가?

왕정문 역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에게 들어오라고 하거라.”

왕사모는 고개를 돌려 옆으로 쳐다보았고, 몇 초 뒤 흠씬 얻어맞은 허신년이 문 옆에서 걸어 나와 문턱을 넘어 읍했다.

“소직, 여러 대인을 뵙습니다.”

‘알고 보니 그였구나…….’

전청서 등은 고개를 저었다.

허신년은 아주 괜찮은 인재로, 학식과 담력 모두 뭇사람보다 뛰어났다. 하지만 그는 큰형에 비하면 사실 너무 많이 떨어졌다.

허신년은 그들의 눈에 아주 우수하고 잠재력을 갖춘 후배지만, 허칠안은 두피를 저리게 하는 상대였다.

그 무게를 함께 논할 수는 없었다.

왕정문은 실망을 금치 못했으나 이내 회복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허 대인, 본관을 무슨 일로 찾은 것인가?”

허신년은 소매 속에서 밀서 한 겹을 꺼내더니 탁자 옆으로 빠르고 힘 있게 걸어가 왕 재상에게 내밀었다.

“이것들은 틀림없이 재상 대인께 쓸모 있을 겁니다.”

왕 재상은 훑어보더니 전혀 개의치 않고 들어 펼쳐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빛이 굳었다.

그는 첫 번째 밀서를 재빠르게 훑어본 뒤,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두 번째, 세 번째 밀서를 펼쳤다…….

왕 재상은 밀서를 모조리 다 본 후에도, 앉은 자세를 유지한 채 꼼짝하지 않았다. 그는 멍하니 있는 듯하기도 했으며 생각에 잠긴 듯하기도 했다.

형부 손 상서와 대학사 전청서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후자는 몸을 약간 앞으로 숙여 떠보았다.

“재상 대인?”

이부상서 등 역시 눈빛을 교환하였다. 그들은 곧 이 서신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다.

왕 재상은 밀서 몇 통을 정리하더니 가장 가까이 있는 손 상서에게 건넸다. 그는 손 상서가 손을 뻗어 받는 걸 보자 재빨리 당부했다.

“주의하게.”

손 상서는 어리둥절하였다. 그는 좀 당황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의력을 서신에 집중하고선 서신을 펼쳐 읽어나갔다.

그는 서신을 보다가 갑자기 굳었고, 눈을 부릅떴다.

그는 몇 초간 침묵하다가 갑자기 다소 다급하게 다른 서신을 펼쳤는데 동작이 거칠면서도 조급했다. 왕 재상은 이 늙다리가 서신을 망가뜨릴까 봐 걱정되어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지만 몇몇 대학사와 상서들은 손 상서의 행동을 보니 점점 더 궁금하고 당혹스러워졌다.

그들은 서신 안에 무엇이 기재되었는지 절실하게 알고 싶었다.

“좋아, 좋아! 이것들만 있으면 우리가 이익을 양보할 필요 없이 세력을 끌어들일 수 있네. 폐하께서 조사하고 싶지 않으시겠는가? 허, 설령 내년까지 조사한다 해도 밝혀내지 못할 것이야.”

손 상서는 냉소를 연발했다.

“본관에게 보여주게.”

이부상서는 제일 먼저 서신을 빼앗더니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십여 초 후, 그는 흥분한 나머지 ‘훌륭하군’이라고 세 번 연달아 말했다.

“원웅 등의 죄증을 그러모아 반격할 생각을 했었는데 시간이 너무 적었네. 게다가 상대가 이미 처음과 끝을 처리했으니 실행할 수 없었지. 이, 이게 바로 소원대로 이루어지는 것이구먼.”

서재 안 우두머리들은 차례대로 서신을 다 읽은 뒤, 전의 심각함을 벗어던지고 고조된 미소를 지었다.

왕사모는 문 앞에 서서 이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아버지와 숙부들이 무거운 얼굴을 했다가 서신을 다 본 뒤 고조되어 크게 웃는 모습을 전부 다 눈에 새겨 두었다.

‘비록 서신은 허칠안의 것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께서 신년이 서신을 보내온 호의를 무시할 리는 없지…….’

그녀는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자신의 미래를 점점 더 확신하였다.

왕 재상은 서신을 도로 거두어 책상 위에 놓은 뒤, 허신년을 주시하며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허 대인, 이 서신들은 어디서 났는가?”

손 상서, 서 상서 및 대학사 몇몇이 잇따라 허신년을 쳐다보았다.

허신년이 공손히 읍했다.

“제 큰형한테서요.”

‘역시 그였군…….’

손 상서는 자신조차 어떠한 감정인지 모를 만큼 마음이 복잡했다.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허칠안을 증오했다.

그 개자식은 상백 사건으로 해묵은 감정을 가지고 여러 차례 그와 대립했다. 가장 기가 막혔던 일은 바로 시를 써서 그를 욕하여 치욕의 기둥에 못 박은 사건이었다.

그랬다. 허칠안은 그의 아들을 납치한 게 아니라 시를 써서 그를 욕했다.

관리 사회 규칙에 따르면, 이는 집착과도 같은 일이었다. 사실상 손 상서 역시 그를 철저하게 괴롭히지 못한 점이 한으로 남았기에 이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초주 백성 대량 학살 사건이 전환점이었다.

누군가는 이러했다. 그가 죽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어떠한 일들 때문에 진심으로 감복하게 되는 마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왕당이 존폐 위기에 놓였는데, 허칠안은 이렇게 중요한 물건을 보내왔다. 이것들이 그들 손에 넘어가면, 이번 위기는 사람을 놀라게 할 뿐 어떠한 위험도 없는 셈이 된다.

이 은혜가 너무 커서 손 상서는 이를 감히 거절할 수 없었다.

전청서 등은 놀라면서도 놀라지 않았다. 조국공이 이 밀서들을 남겼지만, 그가 누구의 손에 죽었는가?

놀랍고 의아한 점은 허칠안이 그들을 도우리라는,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다.

왕 재상이 한숨을 내뱉더니 변함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무얼 원하는가?”

허신년이 읍하며 말했다.

“조당 일이 해결되고 나면 큰형이 직접 찾아뵐 겁니다.”

왕 재상은 몇 초간 침음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이때 왕사모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아버지, 이 서신들을 얻기 위해서 하마터면 신년이 큰형과 얼굴을 붉힐 뻔했더라고요. 얼굴의 상처는 허칠안이 때린 거예요. 신년은 그저 공로를 자처하지 않는 것뿐이에요.”

왕 재상은 어리둥절하다가 허신년을 자세히 살피더니 눈빛이 점차 부드러워졌다.

전청서 등은 허신년을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왕사모를 보았다. 그들은 표정이 아주 괴이했다.

그들은 모두 관리 사회의 능구렁이로, 바로 많은 정보를 포착했다.

‘허칠안이 만약 원치 않았다면, 허신년이 목숨을 내바쳤어도 얻지 못했겠지. 그가 관리 사회에서 물러난 후에 계획적으로 허씨 집안에게 뒷배를 찾아주려는 셈이군…….’

전청서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가 보기에 허칠안이 기꺼이 손을 내미는 건 좋은 일이었다. 물론 그는 위연의 심복이었고, 위연이 왕당과 맞서지는 않았다. 하지만 만약 왕당이 허칠안을 쓰고자 하는 일이 있을 때 허신년과의 관계를 구실로 삼으면 거절할 리 없으니 양측은 어느 정도 협력할 수 있었다.

허칠안은 손 가는 대로 쓰기에 편한 도구였다.

경찰의 해가 지나고 대다수의 조당 제공들은 비슷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만약 왕당이 이 도구를 손에 쥘 수 있다면, 틀림없이 장차 큰 쓸모가 있을 터였다.

‘이 자는 변론이 격렬하고 말이 아주 날카롭지. 만약 지원할 수 있다면, 장차 말다툼에는 적수가 없겠어. 음, 그는 사모 조카딸과 그렇고 그런 관계인 듯한데……. 가장 중요한 건 허신년을 거두면, 허칠안이라는 도구도 우리가 쓸 수 있다…….’

이부 서 상서는 침음하였다.

다른 사람의 생각도 비슷했다. 다들 재빠르게 이해득실을 따져보고, 허신년과 왕사모의 관계를 추측했다.

왕 재상이 기침 소리를 냈다.

“시간이 늦었으니 밀서를 나눠서 우리 각자 뛰어다니세.”

그는 허신년을 더는 쳐다보지 않았다.

* * *

왕사모는 황혼 전에 허신년을 황성에서 내보내고, 타박상을 치료하는 약주와 가루약을 한 무더기 선물하였다. 그녀는 저택에 돌아온 후에는 대청에서 첫째 오라버니, 둘째 오라버니 그리고 모친이 하는 대화를 들으러 갔다.

왕 이공자가 아주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와 숙부들에게 대책이 생긴 듯해요. 제가 보니 그들이 나설 때 발걸음이 가뿐하고, 미간 사이가 더는 무겁지 않더라고요. 제가 따라가서 물으니 전 숙부가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왕 대공자가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고심해서 집사더러 부엌에 통지하라고 하셨어요. 저녁에 기름에 튀긴 완자를 먹자고요. 양생하시려나 봐요. 오랫동안 이 요리를 먹지 못하셨잖아요.”

왕 이공자가 하이파이브했다.

“아버지의 걱정거리가 다 사라져서 온몸이 홀가분해졌다는 의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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