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2화. 전략이 먹히다
허신년은 풀이 죽은 얼굴로 밥을 먹으러 저택에 돌아왔다. 그가 막 앞마당을 지나는데 칼 위에 올라탄 어린 여동생이 보였다. 그녀는 소원 안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돼지 울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밑에 있는 어머니와 영월은 아이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다가 시도 때도 없이 동시다발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조심해, 조심해!”
숙모가 화가 나서 말했다.
“허칠안, 어서 네 거지 같은 칼 좀 내려오게 해라. 만일 영음이 떨어져서 다치면 내가 너를 어떻게 훈계하는지 봐라!”
숙모는 양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마당에 서서 바깥 대청을 향해 소리쳤다.
“어머니, 그러고 보니 칼이 어떻게 날까요?”
허영월은 문득 의아해하면서도 좀 겁이 났다.
“내가 아니? 딱 봐도 네 큰 오라버니가 펼친 요법이지.”
숙모가 말했다.
모녀 둘은 비검을 밟고 펄펄 나는 이묘진을 본 적이 있기에 결국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만 여겼지만, 허신년은 이 광경을 본 순간 완전히 멍해졌다.
“절, 절세 신병…….”
허신년이 중얼거렸다.
이때 허칠안이 바깥 대청에서 걸어 나와 손짓하여 불렀다.
“태평, 내려와.”
태평도가 고도를 낮추고 허공에 멈춰 꼼짝하지 않았다. 숙모는 즉시 딸을 빼앗아 오더니 호되게 꾸짖었다.
“무슨 놈의 칼이야!”
그녀는 말을 마친 뒤 성큼성큼 걸어가 태평도 앞에 멈추더니,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손을 뻗는 허신년을 보았다. 그는 칼을 잡고 싶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 듯했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흥분한 상태였다.
허신년은 유가 정통 체계 출신의 지식인이었으니 당연히 절세 신병을 알 터였다.
숙모가 아들의 이런 모습을 보더니 의심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신년아, 이 칼이 무슨 문제라도 있니?”
허신년이 중얼거렸다.
“이 칼은 세상에서 보기 드물고, 가치가 대단해요. 아니, 이건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진귀한 보물이라고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진귀한 보물?!’
숙모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의아해하며 태평도를 훑어보더니 슬쩍 떠보았다.
“그럼 도대체 은자 얼마의 가치니?”
숙모는 구체적인 숫자로 가치를 판단해야 했다.
“이렇게 말씀드릴게요. 형님이 만약 그걸 가져가 작위로 바꾼다면, 적어도 백작으로 바꾸거나 후작으로 바꿀 수도 있어요.”
후작은 공작에 버금갔다. 대봉 공작은 이성(異姓) 작위의 전봉과 비슷했다.
숙모가 작은 입을 벌리고 태평도를 다시 볼 때는 마치 친아들을 보는 듯했다. 아니, 눈빛이 친아들을 보는 것보다 더 이글이글했다.
“저 더 놀래요.”
허영음은 태평도를 붙잡고 기어올랐다.
“가, 이놈의 계집애야. 이렇게 진귀한 물건을 건드렸다가 망가지면 이 어머니가 너를 때려죽일 거야.”
숙모는 손바닥으로 콩알이를 팡 내리쳤다.
허칠안은 미소를 지으며 이 광경을 보더니 소리쳤다.
“신년아, 들어와라. 네게 할 말이 있다.”
* * *
허신년은 바깥 대청으로 들어가 탁자에 앉았다. 그런 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밀서를 바라보았다. 이는 임안이 보낸 게 아니라 조국공 사택에서 수집해온 밀서였다.
“이미 왕 재상의 처지를 알았다. 신년아, 만약 네게 그가 난관을 극복하게 도울 능력이 있다면, 돕거라. 혹시 수수방관할 테냐?”
허신년은 이 말을 듣자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거리낌 없이 말했다.
“저는 사모 소저가 걱정되지만, 왕 재상의 처지에는 큰 감회나 걱정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사모 소저가 없었다면, 저는 지금 아마 형님과 술잔을 들고 환담이나 했겠죠.”
‘대봉의 좋은 사윗감이구먼…….’
허칠안은 속으로 비아냥거리더니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만약 네가 도울 수 있다면, 왕 재상은 너를 받아들이길 원할 거라고 믿는다. 적어도 너와 부딪히진 않을 것이다.”
그는 말을 하면서 탁자 위의 밀서를 가리켰다.
허신년은 의구심을 갖고 밀서를 펼쳐 한 부씩 보았다. 그는 먼저 눈동자가 수축하더니 놀란 기색을 역력하게 드러낸 다음 흥분하여 두 손을 떨었다.
만약, 만일 이 밀서들이 능력 있는 사람의 손에 떨어지면 그 손에서 날카로운 무기가 될 터였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경관이 이로 인해 죄를 얻겠는가. 경성 관리 사회 전체에 대지진을 불러올지 몰랐다.
물론 또 이 밀서들이 전부 파괴될 거라는 또 다른 가능성도 있었다. 연루된 사람이 실로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네게 이 밀서들의 일부분밖에 줄 수 없단다. 우리는 왕 재상에게 쓸모 있는 자 몇몇을 골라낼 필요가 있어.”
허칠안이 밀서를 하나씩 늘어놓았다.
소위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왕당이어도, 원웅과 같은 부류여도 안 됐다. 후자는 뒷받침해 주는 황제가 있어서였다. 이 밀서들은 그들에게 치명적인 효과를 낼 수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 국면에서는 일격에 죽일 방법이 없었다.
곧 형제 둘은 여덟 명의 인물을 골랐다. 그들은 지위가 높고 권력이 세면서도 앞서 말한 양자에 속하지 않는 인물들이었다.
“퇴근한 후에 왕부에 다녀오거라. 이 밀서들을 왕 재상에게 직접 전해라. 기억해야 할 건 우선 왕 소저를 찾아가야 한다는 거다. 그녀가 너를 왕 재상에게 데려가야 해.”
‘나더러 왕 재상에게 나와 사모의 관계를 암시하라는 의미잖아…….’
허신년은 ‘음’하고 소리 내었다. 그가 밀서를 막 옷 안에 품었는데 소매를 걷어 올리는 큰형이 보였다.
“형님, 뭐 하시려고요?”
“너 때리게!”
퍽!
허신년은 준수한 얼굴에 주먹을 한 대 맞았다. 그가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허칠안은 기세를 몰아 올라타더니 좌우로 따귀를 때렸다.
“형님, 얼굴은 때리지 마세요……!”
허신년은 비명을 질렀다.
“얼굴을 때리지 않으면 네 희생을 어떻게 보여 주며, 왕씨 집안 소저를 어떻게 감동시키겠니? 장인어른을 구하기 위해서는 큰형과 사이가 틀어져 원수가 되는 것도 감수해야 한단다.”
“이, 이거 좀 비열하지 않아요?”
“이건 비열한 게 아니라 전략이야. 자, 자세를 바로 하렴. 큰형이 주먹 몇 대 더 날릴 테니!”
* * *
경수궁 임안부 쪽에 아주 빠르게 소식이 돌아왔다. 회신은 아니었고, 알았다는 한 마디뿐이었다.
태자는 임안을 쳐다보곤 코를 만지작거리더니 개탄했다.
“보아하니 기댈 수 없겠군. 그래도 진실하네. 관리를 때려치우고 자신이 아바마마를 노하게 했다는 점을 알았으니 우리 남매와의 관계를 이어가기가 귀찮은 게지.”
임안은 그의 말에 눈가가 붉어졌다.
진비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훈계했다.
“그만 얘기하렴. 그가 도와주지 않는 것도 정상이야. 위연이 아무리 그를 신임한다고 해도 그의 말을 듣겠니?”
태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알아요. 그저 그의 태도가 사람을 불쾌하게 하잖아요.”
임안은 입술을 샐쭉 오므리고 울적하게 말했다.
“저 소음궁으로 돌아갈게요.”
* * *
왕부 대청은 분위기가 다소 무거웠다.
왕사모는 왕 부인 곁에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담을 나누며 모친의 근심, 걱정을 풀어주려고 노력했다.
호부에 재직 중인 왕씨 집안 첫째 공자는 한마디 말없이 차를 마셨다. 장사치인 왕 이공자는 성격이 급해 대청 안을 뱅뱅 돌아다녔다.
“형님, 제가 잘 아는 벗에게 들었는데 폐하께서 이번에 우리 왕씨 집안을 완전히 몰아내려고 한다는데요?”
왕 이공자는 걸어 다니면서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왕 부인의 눈에 근심이 더욱 깊어졌고, 그녀는 사실 확인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장남을 쳐다보았다.
왕 대공자는 찻잔을 내려놓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좀 성가시겠더구나. 원웅과 진원도가 적잖은 죄증을 늘어놓았어. 그중에 가장 번거로운 건이 군향(*軍餉: 군인의 급료 및 지급품)을 횡령했다는 것이다. 전 호부 시랑 주현평 기억하지? 그는 아버지 사람인데 그 역시 군향을 횡령했다. 뜻밖에도 재산을 몰수할 때 보니, 주부 안팎으로 몇천 냥밖에 없더구나. 은자가 어디로 갔을까? 모두가 우리 왕씨 집안에 있다고 말하더군.”
“정말이지 헛소리네요.”
왕 이공자가 화를 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왕 대공자가 미간을 문지르더니 다소 지쳤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 아버지는 황제의 총애를 받아 당연히 지장이 없었는데 초주 백성 대량 학살 사건 때 아버지께서 폐하의 노여움을 샀잖니. 이거야말로 문제의 핵심이지.”
왕 부인은 노심초사했다.
“어떻게 해야 좋을꼬, 어떻게 해야 좋을꼬.”
왕사모는 서둘러 모친을 위로하더니 바로 눈살을 찌푸리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둘 다 그만해. 대응책을 생각해내지 못하겠으면 여기에서 하소연하지 말고. 어머니를 걱정하게 해서 뭐 할래?”
이어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모친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버지께서 십여 년 동안 재상을 맡으시면서 어떤 어려움을 겪지 않으셨겠습니까. 마음속에 다 계산이 있을 겁니다. 지금 서재에서 숙부들과 상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왕 대공자는 여동생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 비록 위기가 있었지만, 여태껏 이번처럼 위태로운 적은 없었다. 정적과 싸우는 일과 폐하와 싸우는 일이 같은 문제인가?
그들이 막 대화를 나누는데 집사가 분주하게 보고하러 와서는 대청 안의 사람들을 훑어보더니. 왕사모를 쳐다보았다.
“소저, 허 대인께서 밖에 계십니다. 소저를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왕 이공자는 냉소를 지었다.
“어떤 시기인데 한가한 마음으로 사랑을 속삭이려는 건가?”
왕 부인과 왕 대공자가 잇따라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은 허신년과 자기 집 딸이 가깝게 지내는 걸 알았다. 왕사모는 개성이 아주 강하고 매우 지혜로웠기에 집안에서 왕정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들의 대장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눈 감고 그녀가 가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왕씨 집안이 위기를 맞았는데 허신년이 빈번하게 찾아오는 건 알게 모르게 싫증 나는 일이었다.
왕사모는 왕 이공자를 흘겨보더니 사뿐사뿐 일어나서 말했다.
“그를 외청으로 안내하게.”
* * *
그녀는 모친의 손등을 툭툭 치고선 곧장 나섰다. 왕 소저는 안마당을 지나 구불구불한 복도를 걸어갔다가 응접실에서 허신년을 만났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피했다.
“신년, 이게 무슨 일이에요?”
왕사모는 머리를 내밀고 기웃대며 잠시 보았으나 그가 다 피했다.
“괜찮아요…….”
허신년은 말했다.
“그대에게 줄 게 있어서 온 것이오.”
그는 말을 하면서 다른 손으로 찻상을 가리켰다. 왕사모는 그제야 찻상 위에 놓인 서신 한 더미를 발견했다.
왕사모는 호기심을 가지고 서신을 펼쳐보았고, 이윽고 몸을 떨더니 예쁜 눈에 경악이 가득 퍼졌다.
“이, 이 밀서들을 어디서 얻었어요?”
그녀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입이 떡 벌어졌다.
“내 형님한테 얻었소.”
허신년이 대답했다.
‘허칠안한테서 가져왔다고? 그는 위연의 심복인데 어떻게 우리 아버지를 도울 수 있다는 말이지…….’
왕사모는 눈동자를 굴려 허신년이 그녀를 피하는 모습을 다시 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가슴이 철렁하여 그의 소매를 재빨리 잡아당겼다.
“앗……!”
왕사모는 깜짝 놀라 외쳤다.
그녀는 그제야 얼굴이 붓고, 콧등에 멍이 들고, 입술이 몇 군데 찢어진 허신년을 보았다. 누군가에게 호되게 맞은 후의 모습이었다.
“형님이 때렸어요? 이, 이 밀서 때문에?”
왕사모의 입술이 떨렸다.
“나 혼자 넘어졌어요.”
허신년은 한사코 부인하였다.
왕사모의 눈에 눈물이 ‘핑’하고 맺히더니 투둑투둑 실이 끊어진 진주처럼 떨어졌다.
“그, 그가 이렇게 때리다니…….”
왕 소저는 슬픔에 목이 메었다.
‘형님의 전략이 정말 먹히네…….’
허신년은 마음속으로 개탄하면서 입으로 설명했다.
“정말 나 혼자 넘어졌소.”
그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 바로 설명했다.
“이 밀서들은 형님이 준 것이오. 하지만 조건이 있소. 내가 직접 재상 대인 앞에서 말하고 싶소이다.”
왕사모는 소매 속에서 비단 손수건을 꺼내 눈물 자국을 꼼꼼하게 닦았다. 그녀가 허신년을 바라보는 눈빛에 애정이 가득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공자를 데리고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