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8화. 내 어장 속에는 쓸모없는 물고기가 없다고
허칠안은 장 어멈이 떠난 뒤, 암말을 마당으로 끌고 들어가 용수(榕樹)의 줄기에 묶었다.
그제야 그는 짧은 며칠 사이에 본래는 적막했던 마당에 제각각 고운 자태를 뽐내는 생화가 활짝 피었고, 꿀벌과 나비가 꽃밭 사이에서 춤을 추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공기 중에는 신선한 꽃향기가 뒤섞여 있었다.
허칠안이 대충 몇 번 훑어보니 유명한 진귀한 품종이 아주 많이 보였다. 그중에는 백은 십여 냥 가치를 하는 것들도 더러 있었다.
그가 유명하고 진귀한 품종의 가격을 아는 이유는 집안의 숙모가 매일 엉덩이를 치켜든 채 화분을 만지작거리기 때문이었다. 숙모는 봄이 되면 이 방면에 이백여 냥의 백은을 투자했다.
허칠안은 물론 숙모에게 명품 꽃씨를 사는 데 얼마를 들였는지 묻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쨌든 그의 돈을 쓴 건 아니었으니깐. 핵심은 숙모가 애지중지하는 화분을 허영음이 언제나 시시때때로 뒤집어엎는다는 점이었다.
매번 숙모는 노발대발하며 그녀를 훈계한 뒤 따다다 말하곤 했다.
“너는 이 꽃들이 얼마인지나 아니? 못된 계집애.”
“이 꽃들은 어찌 된 일이에요?”
허칠안은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마당에 너무 단조로워서 꽃을 좀 사서 마당에 심었지.”
왕비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너한테 준 은자로는 이런 꽃을 살 수 없는데…….’
허칠안은 속으로 중얼거렸으나 겉으로는 차분하게 ‘오’하고 소리 내어 그냥 물어보았을 뿐이었다. 그는 꽃에는 흥미가 없다는 태도를 드러냈다.
하지만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산 씨앗이라면,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5일이라는 시간 사이에 씨앗을 촉진해 생화가 만개한 뜰의 정경으로 만들 수 있다니, 이건 화신(花神)의 능력인가? 이 여인을 사막에 버리고 간다면 전 세계에 행복을 가져오겠군.
그는 이 생각을 따라가다 보니 작은 연뿌리가 떠올랐다. 만약 왕비에게 연뿌리를 재배하게 하면 기사회생시킬 수 있지 않을까?
금련 도사가 천재지보는 단독으로 재배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만약 재배하는 사람이 화신이라면?
허칠안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좀 흥분했지만, 평정을 아주 잘 유지했다.
왕비는 흥미가 떨어져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보더니 슬며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장 어멈은 어찌 된 일이에요?”
허칠안은 집 안으로 걸어가면서 물었다.
그는 향기를 따라 집으로 들어가 부뚜막 언저리로 가서 솥뚜껑을 들추어 열었는데 솥 안에서는 소금물로 땅콩을 삶고 있었다. 향신료도 좀 넣었다.
“근처에 사는 아주머니인데, 며칠 전에 그녀가 우리 집…… 내 집 밖에서 자빠졌더라고. 불쌍해 보여서 도와줬지. 그때 이후로 자주 와서 나를 도와줘. 땅콩 역시 그녀가 보내온 것이네.”
왕비는 나무로 엮은 의자 위에 앉고, 허벅지 위에 그릇을 올려놓은 뒤 말했다.
“그녀의 아들이 약재 장사를 한다더군. 듣자 하니 내성과 외성에 점포가 여러 개 있대. 아들 며느리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녀 아들이 근처에 소원(小院)을 한 동 사서 노모를 모셨네. 그녀는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 아들이 아주 효심이 깊어 그녀에게 저택을 사줬다고 말하지.”
허칠안은 부뚜막에 기댄 채 소금물 땅콩을 먹었다. 그는 땅콩 껍데기를 그녀의 발 위에 내리치곤 콧방귀를 뀌었다.
“방금은 또 어찌 된 일입니까?”
왕비는 발을 움츠리더니 화가 난 눈으로 냉소를 지었다.
“우리 남편이 죽자 옆집에 있는 건달이 내 미색을 노려 여러 차례 행패를 부리고 나를 탐하려고 했다고 내가 말했거든. 그래서 나는 저택을 팔고 여기로 이사 왔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가 찾아왔고, 심지어는 이틀에 한 번 꼴로 찾아온다고 말했네.”
허칠안은 그 말을 하찮게 여겼다.
“마마 미색을 노린다고요? 왕비마마, 거울 좀 보고 얘기하시지요.”
왕비는 화를 냈다.
“내 땅콩 먹지 마.”
“먹을 건데요.”
“먹지 마.”
“먹을래요.”
허칠안은 오전 내내 왕비의 소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마당에 앉아 그녀 대신 대바구니를 엮고, 나무통을 보수하고, 호미질하고 장작을 팼다……. 게다가 그는 뜰에 물을 끓이는 부뚜막도 쌓아 주었다.
그가 일을 할 때 왕비는 대나무 의자에 앉아 약간 넋이 나간 채로 쳐다보았다.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자 그녀는 말없이 일어나 부엌에 들어가더니 요리 몇 접시를 대충 만들었다.
“맛있나?”
그녀는 식탁 위에 손으로 뺨을 괴고 눈을 깜박이며 허칠안을 쳐다보았다.
‘졸라 맛없어…….’
허칠안은 거짓말했다.
“음식 솜씨가 늘었네요.”
왕비는 갑자기 웃더니 초승달 같은 눈을 하고 흥얼거렸다.
“그럼 자네가 전부 다 먹게.”
“그럼 마마는요?”
“땅콩을 배불리 먹었더니 나는 배가 고프지 않군.”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이곤 머리를 파묻고 밥을 먹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만든 음식을 접시만 빼고 깨끗이 먹어 치웠다. 왕비는 좀 의외라는 듯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음식 솜씨를 잘 알았다. 어쨌거나 혀는 사람을 속이지 못했으니까.
“삶이 바로 이런 거지요. 변변치 않은 음식이야말로 진실됩니다.”
허칠안은 말을 할 때 오만한 왕비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약간 감동한 듯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지만 또 그 변화를 아주 잘 숨겼다.
그는 이 모습을 보더니, 품속으로 손을 뻗어 거울을 살짝 두드려 작은 연뿌리 마디를 쏟아냈다.
“제가 이번에는 검주에 다녀왔습니다. 일부러 약속을 저버리고 마마와 함께 있지 않은 게 아니에요.”
허칠안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누가 자네더러 함께 있으라고 했나.”
왕비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고개를 돌렸다.
“헛걸음은 아니었습니다. 재미있는 물건을 찾았거든요.”
허칠안은 연뿌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한 원로께서 제게 선물한 겁니다. 듣자 하니 보물이라던데 이미 메말랐네요.”
연뿌리는 빛깔이 어두웠다. 표면에는 주름이 많아 전체적으로 오그라들어 보였다.
“무슨 물건이지?”
연뿌리는 왕비의 이목을 끌었다.
“저도 잘 모르지만 어쨌든, 보물이라더군요.”
허칠안은 개탄했다.
“이 물건은 저한테도 아주 중요합니다. 하지만 살리지 못할 것 같아요. 허나 설령 메말랐다고 해도 약의 일종이니 헛걸음한 건 아닌 셈이지요.”
모남치는 자신의 신분에 관해 아주 민감했다. 허칠안은 자신이 이미 그녀의 정체를 간파했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괜히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했다.
왕비는 생각하더니 연뿌리를 들고 소매에 문지르고는 하얀 이를 드러내고선 한 입 베었다.
허칠안은 너무 갑작스러워 미처 막아내지 못했다.
왕비는 몇 입 씹고 삼키더니 아주 기뻐하며 평가했다.
“아주 달고 맛있는걸? 음, 아직 살아 있네. 당분간 키우면 되겠어.”
“!!!”
허칠안은 가슴이 떨리며 크나큰 기쁨에 푹 빠졌다. 그는 아무렇게나 시도해봤는데 이런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만약 이 작은 연뿌리를 성공적으로 재배할 수 있다면, 세상에 두 번째 구색연화가 생길 것이다. 스스로 자라 연뿌리를 맺을 수 있는…….
허칠안은 연밥의 신비함에 관해 견문을 넓혔다. 그는 이제부터 60년마다 연밥 스물네 알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이건…….
또 연뿌리가 성장할 수 있다면, 무림맹 선조는 관문 깨는 조건을 만족할 터였다. 그가 만약 연뿌리를 빌려 2품으로 승직할 수 있다면, 허칠안에게 어마어마한 인정을 빚지는 셈이었다.
나중에 신비로운 술사에게 패를 내보일 때 무림맹 선조는 가장 큰 비장의 카드 중 하나가 될 터였다.
허칠안은 마음이 소리 없이 달아올랐다. 그는 흥분한 감정을 애써 누르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럼 마마께서 시도해보십시오. 음, 만약 살려내지 못하면, 저한테 돌려주시는 거 잊지 마십시오. 저에게 다른 작용을 하니까요.”
‘만약에 살려내지 못하면 국사에게 가져가 결과를 보고해야지.’
왕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국사가 왜 나한테 이 연뿌리를 달라고 했을까? 그녀는 인종 도사라 구색 연뿌리 재배가 어렵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 목적은 단약 정제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단약 정제라면, 왜 굳이 나한테 구걸하러 가라고 분부했을까? 그냥 나오는 대로 한 말인가, 아니면 다른 목적 있는 건가?’
그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참지 못하고 왕비를 한번 쳐다보았다.
‘그럴 리가. 내가 몰래 그녀를 먹여 살리고 있다는 걸 낙옥형이 알 리가 없다고. 악, 나는 국사와 친하지도 않고, 그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니 섣불리 단정하면 안 되지. 본래 왕비는 마스코트니까 아름답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나에게 이렇게 큰 놀라움과 기쁨을 줄 줄은 몰랐네. 내 어장 속의 모든 물고기는 다 쓸모가 있단 말이지…….’
허칠안은 진심으로 감개무량했다.
이때 왕비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약간 우물쭈물 댔다.
“나, 나 은자를 다 썼네만…….”
그녀는 여기까지 말했는데도 남자에게 돈을 달라고 손을 내미는 게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그녀는 이렇게 하면 자신이 남자가 밖에서 키우는 첩인 것처럼 보인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리더니 모기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좀, 좀 더 줄 수 있나?”
‘내가 떠나기 전에 십오 냥 주지 않았니? 닷새 만에 곧 다 쓰게 생겼다고?’
허칠안은 그녀를 쳐다보더니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침묵하는 걸 눈치챈 왕비는 홱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리고선 쌀쌀맞게 말했다.
“주지 않으려면 말고.”
그녀는 좀 억울했다.
허칠안은 지서 파편 속에서 은괴 하나에 열 냥인 말굽은 다섯 개를 쏟아내었다. 그는 말굽은을 차례대로 탁자 위에 올려놓은 뒤 호떡처럼 빠개어 한 알 한 알 손으로 빚었다.
“마마께서는 부녀자이시니 관은과 은괴를 사용하지 않는 편이 가장 좋겠습니다. 부스러기 은전이면 충분합니다. 이렇게 하면 외부인이 염두에 두기 쉽지 않을 겁니다. 제가 방금 생각난 겁니다. 지난번에 마마께 은괴를 드렸을 때는 이 점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크게 자책하고 있습니다. 항상 마마와 함께 있을 수 없으니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다 신경 쓰셔야 합니다. 이건 제 실수입니다. 앞으로는 그럴 일 없을 겁니다.”
그는 진실한 표정을 하고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왕비는 여전히 문밖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그녀는 다소 부드러운 목소리로 ‘응’하고 대답하며 자신이 더는 화가 나지 않음을 드러냈다.
* * *
허칠안은 그후 반나절 동안 왕비를 데리고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연지와 물분을 사고, 생필품과 예쁜 옷을 더했다. 황혼 전, 반나절 동안 푸대접한 암말을 끌고 나섰다.
그가 막 출발하자마자 장 어멈이 바로 왔다.
장 어멈은 집안의 크고 작은 물건들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모 낭자, 낭자네 사내는 갔는가? 쯧쯧, 이렇게 많은 물건을 사려면 수십 냥은 돼야겠구먼.”
장 어멈은 몇 번 훑어보더니 전부 여인의 용품과 물건임을 알고선 깜짝 놀라 외쳤다.
“아이고, 낭자네 사내가 낭자에게 정말 잘하는군.”
왕비는 좀 만족스러워하며 눈썹을 구부렸다. 하지만 그녀는 외부인 앞에서 결코 본성을 드러내지 않은 채 단정하면서도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 집 사내는 대부호들의 집을 보고 마당을 지키는 일을 해요. 평소에 돌아오지 않고, 돌아온다고 해도 황혼 전에는 돌아가야 하지요. 아침에 그가 저를 냉대한 데에 화가 나서 아주머니에게 거짓말했어요. 장 어멈, 타박하지 마세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양고기 한 봉지와 연지 한 상자를 건넸다.
장 어멈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나 같은 여편네가 이런 게 어디 필요하겠는가. 양고기는 받겠네.”
여편네 얼굴의 미소가 훨씬 절실해졌다.
그녀는 모남치의 말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만약 간드러진 미인이었다면, 장 어멈은 아마 어느 나리가 이곳에서 첩을 먹여 살린다고 의심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모 낭자는 비록 몸매가 풍만하고 매력적이지만, 얼굴은 정말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시정의 호색가라고 해도 이렇게 평범한 자태의 여인에게는 분수에 맞지 않는 생각이 들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