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0화. 연밥 나누기
조청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위엄 있는 얼굴을 하고 허칠안을 향해 공수했다.
“관대히 봐주어 고맙소이다, 허 은라.”
허칠안이 답례했다.
“조 맹주님, 과찬이십니다. 제가 맹주님께 감사드려야 맞지요.”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조 맹주님께서는 결코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닌 걸로 보이는데 왜 구색연화에 이렇게 집착하셨습니까?”
조청양은 이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태연하게 말했다. 그는 생명의 은인인 허칠안을 존중하여 말투와 태도를 바꿨다.
“오늘 밤 제가 태융산에서 연회를 베풀 테니 허 은라께서 체면을 살려 주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건 불편하다는 뜻이군……. 조청양은 나와 친분을 쌓을 의사가 있고, 관계를 더 발전시키고 싶어 해…….’
허칠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주절대지 않겠습니다. 참, 맹주께서 저를 위해 주변의 강호 산인을 쫓아내 주시길 바랍니다.”
무림맹 사람들은 그가 승낙하는 모습을 보자 바로 웃는 얼굴을 했다.
조청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지종 도사가 이 기회를 틈타 되돌아오는 걸 막기 위해 산장 밖에 일부 사람을 남겨둘 겁니다.”
천지회의 전력만으로는 만약 지종과 회왕 밀정이 다시 돌격해오면 아마 막아내기 어려울 터였다.
‘조 맹주는 역시 강호 떠돌이답군. 경험이 풍부하고,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겠어…….’
허칠안은 공수하더니 말했다.
“감사합니다.”
무림맹 사람들이 월씨 산장에서 물러나자 허칠안 등은 잠시 조용히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지회 제자들의 읊조리는 소리가 잦아들더니 이내 사라졌다.
“후…….”
마치 격렬한 전투를 겪은 듯, 사방에서 한숨 소리가 나왔다. 제자들은 쉴 새 없이 이마의 땀을 닦았다.
황갈색 고양이는 여전히 엎드린 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허칠안은 황갈색 고양이를 쳐다보면서 백련 도사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초원진, 남궁천유 등 몇몇 외부인 역시 궁금해하며 쳐다보았다.
“금련 사형과 흑련의 신념이 서로 융화되어 잠시 승부를 가리기 어려웠네. 방금 우리가 금련 사형에게 공덕을 도송하여 그가 흑련의 마념을 제압하게 도왔네.”
백련 도사가 설명했다.
“이건 본래 전에 정해놓은 계획이었네.”
허칠안은 의아해했다.
“금련 도사님이 지종 도사의 마념과 얽힐 수 있습니까?”
그는 속으로 이건 과학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지종 도사의 분신은 3품이었다. 금련 도사는 기껏해야 4품이지 3품일 리는 없는데 그가 어떻게 이를 행했단 말인가?
“사형이 사용한 건 지종 비법이네.”
백련 도사는 변함없는 웃음을 지으며 설명했다.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여 이 설명을 받아들였다.
‘지종 도사의 분신에 대해 금련 도사는 일찌감치 대책을 가지고 있었구나. 지서 파편 소지자의 임무는 무림맹과 다른 사람을 상대하는 거였어. 아니, 금련 도사의 입장에서 이묘진과 초원진은 덤이었고, 진정으로 마음에 든 건 나였다…….’
백련 도사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방금, 그들이 조청양의 육신을 빼앗고 싶어 했으나 웬일인지 갑자기 생각을 바꾸어 고양이 한 마리를 택했네.”
천지회 제자들 역시 의혹을 품었다.
‘왜지? 뭐, 아마 고양이를 향한 사랑이 깊은 거겠지…….’
허칠안은 어깨를 으쓱하여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척했다.
이때 황갈색 고양이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고양이는 의식이 회복된 듯 천천히 일어나 웅크리고 앉았다. 까만 눈과 금빛 눈으로 사람들을 천천히 훑었다.
“나 일세!”
황갈색 고양이가 입에서 사람의 언어를 내뱉었다. 금련 도사의 목소리가 다소 거칠게 들렸다.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잠시 마념을 억눌렀네. 음, 구색연화는 어디에 있는가?”
금련 도사는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저한테 있습니다.”
이묘진이 말했다.
황갈색 고양이는 머리를 살짝 끄덕이더니 온화하게 말했다.
“연밥과 연뿌리를 백련에게 주게. 백련 사매, 우리 다음 은신처로 갈 준비를 하자고.”
바로 이때, 황갈색 고양이의 칠흑 같은 오른쪽 눈에서 갑자기 어두운 빛이 번쩍였다.
스윽…….
황갈색 고양이는 입을 일그러뜨리더니 갑자기 백련 도사에게 달려들었다. 고양이의 몸속에서는 음침하고 요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련 사매, 나를 따라 지종으로 돌아와 쌍수하게나!”
탁!
허칠안은 칼집을 휘둘러 황갈색 고양이를 바닥에 때려눕혔다.
스윽스윽…….
황갈색 고양이는 잠시 몸부림치더니 왼쪽 금빛 눈동자가 반짝이자 바로 이성을 되찾았고, 우아하게 웅크리고 앉아 기침했다.
“내가 비록 그를 억누르고 있지만 이따금 그에게 주도권을 뺏길 것이네. 백련 사매, 개의치 말게.”
백련 도사는 반들반들한 이마에 주름을 잔뜩 잡았다. 그녀는 얼굴에 경련을 일으키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선의, 산장 안의 모든 어미 고양이를 내쫓거라.”
금련 도사는 앞발을 치켜들고 힘껏 바닥을 내리치더니 다소 당황한 어조로 말했다.
“그, 그렇게 할 필요는 없네만…….”
백련 도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금련 사형은 당연히 부도덕한 일을 저지르지 않으실 테지요. 우리가 대비하려는 건 요도 흑련입니다. 그는 이미 마도에 들어섰으니 무슨 일이든 저지를 거라고요.”
‘설마 그녀는 금련 도사의 존엄을 되찾아주고 있는 건가…….’
허칠안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
그가 솔선수범하자 갑자기…….
“풉!”
“풉!”
“풉…….”
초원진, 이묘진, 리나 등 몇몇 사람이 참지 못하고 따라 웃었다.
천지회 제자들은 슬프면서도 웃고 싶었기에 표정이 괴상망측했다.
“참, 금련 도사님. 도사님과 상의하고자 하는 일이 있습니다.”
허칠안은 이묘진을 쳐다보며 그녀에게 구색연화를 꺼내라는 의사를 표했다.
천종 성녀가 지서 파편을 꺼내 거울 면을 아래로 향한 뒤 거울등을 살짝 두드리자 크고 작은, 어두운 금빛 연뿌리 두 마디 그리고 연밥이 떨어져 나왔다.
“도사님, 연뿌리가 한 토막 깎였습니다.”
허칠안이 말했다.
“괜찮네.”
황갈색 고양이는 한번 보더니 말했다.
“십여 년을 온양하면 회복할 수 있네.”
허칠안은 내친김에 말했다.
“이 작은 연뿌리를…… 제게 주실 수 있습니까?”
“약을 조제하려고 하는가?”
황갈색 고양이가 반문했다.
‘악, 이모가 나보고 연뿌리를 요구하라고 했는데…….’
허칠안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미친 듯이 암시했다.
황갈색 고양이는 문득 모든 걸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연뿌리가 제 뿌리에서 벗어나면 열두 시진 후에 메마를 것이고, 이십사 시진 후에는 생기가 끊길 걸세. 이때 비로소 약으로 쓰일 수 있지.”
‘도사님, 역시나 아주 시원시원하시군요. 저는 이 임무가 아주 어려울 줄 알았습니다…….’
허칠안은 임무를 마치고 경성에 돌아간 후에 국사에게 보고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는 내키는 대로 물었다.
“키워서 살릴 수는 없습니까?”
황갈색 고양이가 허허허 웃었다.
“지종이 비법을 수천 년을 전수하고 계승하였으나 연뿌리는 고작 한 줄기뿐이네. 자네 왜 그러는지 아는가?”
‘하긴, 만약 키워서 살릴 수 있다면 일찌감치 대량으로 양식했겠지. 천재지보가 천재지보라고 불리는 가장 큰 이유는 보기 드물기 때문이잖아.’
허칠안은 ‘음’하고 소리 내더니 허리를 굽혀 연뿌리를 주웠다.
스윽…….
그가 몸을 숙이는 순간, 귓가에 황갈색 고양이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고양이를 눌렀다.
황갈색 고양이는 머리가 바닥에 눌린 채 두 발톱으로 그의 팔을 힘껏 긁었다. 입에서는 흑련이 악담을 퍼붓는 소리가 나왔다.
“연뿌리는 우리 지종의 지보이니 가져가서는 안 된다, 가져가서는 안 돼……!”
‘지종 도사, 아주 귀여운걸!’
허칠안은 손바닥으로 내리쳐 고양이를 날려 보냈다.
황갈색 고양이는 힘을 빼고 유연하게 구르더니 목표를 바꾸어 꼬리를 치켜들고 추선의에게로 달려들었다.
“소저, 아주 아름답네. 어서 본좌를 따라 산으로 돌아가 쌍수하자고.”
추선의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른 뒤 황갈색 고양이를 발로 차 날려 보냈다.
황갈색 고양이는 금련과 흑련의 힘이 팽팽한 상태에 놓인 듯, 신통한 도법을 시전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평범한 고양이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나 갑자기 왜 온갖 죄악 중에 탐욕이 가장 사악하다고 하는지 이해된다…….’
허칠안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추선의를 공격하여 그녀를 붙잡고 후손을 보려는 황갈색 고양이를 지켜보면서 속으로 이러한 깨달음을 얻었다.
지종 도사뿐만 아니라 나머지 마도에 빠진 요도들은 언제나 18금 주제를 가장 먼저 입에 올렸다. 이 점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인류의 가장 큰 악은 바로 ‘음(淫)’ 자였다.
적진으로 돌격하던 황갈색 고양이가 갑자기 멈추더니 다소 망연하게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런 뒤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던 척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연밥을 나누게.”
‘도사님, 화제 돌리는 게 너무 서투시네요…….’
허칠안은 말없이 얼굴을 감쌌다.
* * *
허칠안은 전에 한 약속대로 두 알을 얻었다. 초원진, 이묘진, 리나, 항원, 남궁천유는 각각 한 알씩 얻었다.
백련 도사는 길고 가느다랗고 하얀 손가락으로 금빛 연방(蓮房)을 벗겨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일깨웠다.
“만약 물건에 불을 붙이려면, 연밥을 까서 물건과 함께 옥합에 두게. 세 시진이면 되네. 만약 생각이 트이고 깨달음을 얻으려면, 바로 삼키게.”
“감사합니다!”
지서 파편 소지자들은 읍하여 감사를 표했다.
백련 도사는 돌아서서 허칠안을 쳐다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허 공자, 자네는 나를 따라오게. 빈도가 자네에게 따로 할 말이 있어.”
* * *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와 사람이 없는 으슥한 곳에 이르렀다. 백련 도사의 소매에서 옥석경이 미끄러져 나왔다.
“이건 금련 사형이 나에게 보관해달라고 부탁한 걸세. 그는 자신이 전투 후에 할 일이 많아 번거로울 것이라 예상하고 내게 맡겼지. 사후에 자네에게 돌려주라고 내게 신신당부했네.”
허칠안은 황급히 지서 파편을 받아 거울 면을 쓱 훑어보며 무늬 위치가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이는 안에 있는 돈을 건드린 사람이 없다는 의미였기에, 그는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두 사람이 돌아간 후, 백련 도사는 천지회 제자들을 소집하였고, 금련 도사의 육신을 가지고 길을 떠날 채비를 했다. 검주를 떠나 다음 거점으로 향할 계획이었다.
검주에는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 다행히 천지회는 몸을 숨길 곳을 마련해 두었기에 외지에 다른 거점이 있었다.
“초 형, 이 장군, 항원 대사……. 호송하시지요.”
허칠안은 이묘진 등을 쳐다보았다.
천인 양종의 걸출한 제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 공자님.”
처마 밑 풍령 같은 소녀의 목소리였다. 아름답고 생기 넘치는 추선의가 그의 앞에 서서 얼굴을 붉힌 채 향낭 하나를 허칠안의 손에 쥐여 주었다.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천지회 제자들은 미소를 머금은 채 이 광경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지종은 절대 혼사를 금하지 않는다며 놀려댔다.
이묘진은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초원진은 말없이 웃었다.
항원과 리나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남궁천유는 쌀쌀맞은 얼굴이었다. 그는 하찮게 여기는 일들은 냉소로 대하는 버릇이 있었다. 예를 들면, 방탕하고 여색을 좋아하는 어떤 자식이 또 청순한 소녀를 꼬셨을 때 그랬다.
‘소녀의 감성은 항상 젖어 있어…….’
허칠안은 흐뭇해하며 향낭을 챙기고, 자신의 어장에 물고기가 한 마리 더 늘어 기뻐했다.
“아주 기분이 좋은 듯하네?”
갑자기 그는 이묘진의 전음을 받았다.
“새로 친구를 사귀었으니 당연히 기쁘지. 앞으로 강호에서 되는대로 살아가려면 이 모든 게 다 인맥이오.”
허칠안은 전음으로 대답했다.
“허, 내가 아는 사형도 예전에 그렇게 생각했지.”
이묘진은 피식 웃었다.
이묘진은 달리 설명하지 않았다. 그녀는 리나를 싣고 비검을 밟았다. 그들은 천지회 사람들을 따라 하늘 높이 올라 휙휙 소리를 내며 떠나갔다.
‘그럼 네 사형은 지금 분명히 물 만난 고기처럼 살고 있겠군.’
허칠안은 속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