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7화. 국사 (1)
명색이 천종 성녀인 자신이 강호에서 성가신 일을 맞닥뜨렸을 때 천종 도사를 도와달라고 불러본다 치자. 도사가 돕겠는가?
도사는 틀림없이 상대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천종 도사가 왔다면 사형이 감정의 빚 때문에 여인에게 만 리를 쫓겨 여태 행방불명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허칠안이 인종 도사를 부를 수 있다고 하는 건 지나친 망상이었다.
무림맹과 강호 산인들은 고개를 저으며 실소했다. 알고 보니 허 은라가 실속 없이 허세를 부리며 모두와 농담을 했던 모양이었다.
지종 도사들은 하하하 크게 웃으며 과장된 신체 동작을 곁들여 그를 한 차례 비웃고 조롱했다. 그들은 허칠안을 향해 실컷 야유했다.
밀정 천기는 냉소를 짓더니 그를 비꼬았다.
“국사의 신분이 얼마나 존귀한가. 어찌 너 같은 땅강아지가 부른다고 해서 오겠느냐. 허칠안, 이건 뭐 턱이 빠지도록 웃으라는 거냐?”
밀정 천추가 태연하게 말했다.
“유치한 자식.”
이때, 아무도 점점 거세지는 바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바람이 먼지를 일으키자 녹색 잎이 날리더니 차가운 못이 일렁였다.
조청양은 무언가를 눈치챈 듯 고개를 홱 돌려 동남쪽을 바라보았다.
아주 먼 하늘가에서 금색 별빛이 반짝였다.
별빛은 재빠르게 왔다. 별빛은 마치 하늘가를 가로지르는 별똥별처럼 화염 꼬리를 끌고 들이닥쳤다.
이어 빛나는 금빛이 월씨 산장에 들이닥쳐 허칠안의 앞에 떨어졌다.
그녀는 재빠르게 착지하였다. 그녀를 감싸고 있던 금빛이 연무처럼 지면을 덮치더니 잔잔한 물결이 되어 퍼져나갔다.
긴 소매가 펄럭이는 우의, 흑단 비녀로 동여맨 검은 머리칼, 미간의 진홍색 주사(朱砂). 그녀의 아름다움은 마치 세상의 극치를 뛰어넘는 듯, 획일적인 이미지를 넘어서는 듯했다.
청순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도도하고, 우아한……. 그녀는 남자들의 눈에 각기 다른 이미지로 비쳤다.
현장에 있던 남자들은 그녀에게서 자신들이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보았다.
‘정, 정말 왔다고?!’
허칠안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을 못 하고 이모의 아리따운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순간 전통 있는 명대사가 머릿속에 스쳤다.
‘아줌마, 저 그만 노력하고 싶어요!’
초원진이 멀지 않은 곳에서 다소 망연자실하게 경국지색의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 가장 먼저 솟구친 감정은 놀라움이 아니라 허망함이었다.
그는 ‘무슨 일이 발생한 건가’라는 당혹스러움에 빠져 한참을 헤어 나오지 못했고, 평소, 분석에 능한 예민한 사고가 이 순간에는 굳어지기까지 했다.
이묘진은 놀라 멍해졌다.
그녀는 허칠안을 주시하던 중 마음이 쓰라렸고, 부러운 마음이 강하게 일었다. 그녀는 자신 역시 부적을 내던지고 부르면 천종 도사가 구하러 오길 바랐다.
……그와 비교했을 때 천종 성녀인 본인은 아주 체면이 구겨져 보였다.
“국, 국사…….”
천기는 참지 못하고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마음속으로 아우성쳤다.
‘어째 오셨습니까? 무슨 까닭으로 땅강아지 한 놈의 부름에 응하셨습니까…….’
그는 질문하고 싶고 큰 소리로 책망하고 싶어서, 폐하를 들먹이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다. 그는 너무 놀라 정신이 아득했으며, 얼굴이 새파래졌다……. 하지만 그는 결국에 침묵을 택했다.
그가 2품 강자를 마주하면, 설령 폐하가 뒷배로 계실지언정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낙옥형이 그 자리에서 그를 베어 죽여도 그를 위해 나설 자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
아무런 가치 없는 죽음이었다.
천기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고개를 옆으로 돌려 천추를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 역시 주먹을 꽉 쥐고 가녀린 몸을 약간 떨면서 자신의 분노와 놀라움을 있는 힘껏 자제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정말 인종 도사인 국사인가?”
누군가 입을 떼고 중얼거렸다.
어찌 평범한 강호 필부가 낙옥형을 만날 수 있겠는가. 실제로 그녀를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허, 허 은라가 그녀를 불러왔네…….”
누군가 이 말을 내뱉자 순간 사위가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시선을 옮겨 국사의 뒤에 포니테일을 묶은 젊은이를 쳐다보았다.
그는 표정이 차분하고 몸가짐이 반듯하여, 마치 인종 도사가 부름에 응한 일에도 전혀 감정이 동요되지 않은 듯 평온했다.
‘이건……. 허칠안과 인종 도사는 무슨 관계지?’
‘낙옥형이 도사의 신분과 국사의 존엄이 있는데 뜻밖에도 허 은라의 부름에 응하다니. 정말이지, 그야말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군…….’
‘틀림없이 무슨 은밀한 관계일 거야. 허 은라의 명망이 높다고 해도 한계가 있어야지. 버젓한 2품을 이렇게 대할 수는 없다고…….’
‘2품은 구주 전봉에 서 있는 인물이라고. 그들 둘에게 꿍꿍이가 없다고 말한다면, 나는 때려죽여도 믿지 않아…….’
이 순간 ‘관중’들의 의심이 폭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종의 요도들은 선녀 같은 낙옥형을 얼떨떨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은 악의가 약간은 꺾였는데, 오히려 성욕에 사로잡혔다. 달려들어 그녀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운 모습이었다.
지종의 요도는 그 자체로 욕망을 좇고, 인성을 타락시켰다. 하여 그들 인성에서 가장 추악한 부분이 평소보다 백배 천배 확대되었다.
그리고 낙옥형이 닦는 인종의 길에도 마찬가지로 이 방면의 폐단이 있었다. 그렇기에 지종 요도들은 욕망에 사로잡혀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들이 만약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았거나 상대방이 인종의 큰 누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면, 진작 욕망에 몸을 맡긴 채 섬뜩한 웃음을 지으며 달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은 거리낌이 없었다. 금련 도사 미간의 소용돌이가 다시 나타나더니, 짙은 안개 같은 검은 연기가 발악하며 나와 상반신만 있는 사람 형태가 되었다. 그는 무척 모호한 모습이었다.
흑련의 분신은 탐욕스럽게 낙옥형을 바라보며 섬뜩한 웃음을 지었다.
“낙옥형, 얌전한 조카딸아. 사숙은 진작에 너와 쌍수하고 싶었단다. 네 몸의 업화는 틀림없이 더할 나위 없이 맛이 좋을 테고, 나의 마성을 크게 부추길 수 있단다.”
금련 도사는 두피가 저려서 안색이 변한 채 허둥지둥 수습하며 포효했다.
“요도, 허튼소리 지껄이지 마라! 빈도가 오늘 파벌을 깨끗이 청산하여 네 육체와 정신 모두 멸해주겠다!”
그의 미간의 소용돌이가 갑자기 세찬 흡입력을 폭발시켜 검은 연기를 도로 빨아들였다.
낙옥형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손에 쥔 총채를 내려놓았다.
사실 그녀는 흑련에게 기백을 압도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흑련은 이미 마도에 빠진 상태였고, 그녀는 업화가 달라붙어 조심스럽게 본성을 유지하는 채였다.
이런 시기에 일단 흑련의 마성에 오염되면, 체내의 업화가 폭발하면서 마도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물론 이 모든 전제는 그녀의 본체가 친히 현장에 올 경우에만 가능했다.
조청양이 진지한 얼굴로 나지막이 말했다.
“국사의 분신은 설령 3품이라고 해도 약자는 아닌 편이지.”
낙옥형이 담담하게 말했다.
“알았으면서도 썩 꺼지지 않는다니.”
조청양은 전혀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소탈하게 웃었다.
“무사는 천군만마라고 해도 한 팔로 막아낼 수 있거든.”
이 말은 간단하게 통역하면 ‘무사의 머리는 강철이라 때려죽여도 쫄지 않는다’라는 뜻이었다.
“이 마음가짐은 아주 훌륭하나 모든 무사가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건 전혀 아니지.”
낙옥형은 고개를 끄덕인 뒤 총채로 조청양을 쳐냈다.
땅땅땅!
자색 장포 맹주의 몸에서 검기가 한 마디씩 터졌다. 이 검기는 그를 끊임없이 뒤로 밀치더니, 자색 장포를 남루한 천 조각으로 잘라버렸다.
이윽고 그 검기는 폭발하여 흩어진 끝에 주변 사람들에게 천지를 궤멸시키는 재난을 초래했다. 현장에 십여 명이 비명횡사하였는데 모두 산인들이었다.
천지회, 지종, 밀정 및 무림맹 무사들 같은 이런 세력은 전부 4품 고수에게 보호받았기 때문에 가까스로 여파를 막을 수 있었다.
“물러나게, 어서 물러나……!”
소월노가 호통쳤다.
“월씨 산장으로 물러나게. 멀리 갈수록 좋아!”
모든 4품 고수가 소리쳤다.
수백 명이 소리를 지르면서 뿔뿔이 흩어지더니 산장 밖을 향해 도망쳤다.
각 측의 군대가 떠났다. 조청양은 여전히 가부좌를 튼 금련 도사를 제외하곤 일을 방해하는 제삼자가 보이지 않자 더 이상 참지 않았다. 그는 한쪽 팔을 높이 들어 손바닥을 칼로 삼았다.
그가 기기를 삼키고 내뱉어 40m 길이의 대도(大刀)로 응결시키자 칼날이 공기를 비틀었다.
이건 단순한 기병(氣兵)이 아니라 3품 도의가 응집된 기병이었다.
“도의가 그다지 원만하지 않네. 알고 보니 4품 무사의 정혈이 급히 서두르다 오히려 그르치고 있구먼.”
낙옥형이 도도한 어조로 말했다.
조청양은 비웃는 듯, 하찮게 여기는 듯 말했다.
“국사께서 한 수 가르쳐주시지요.”
그가 40m의 대도를 내리쳤다.
순간 낙옥형의 눈에 도광(刀光)만이 남았다. 눈부시면서도 아름다운 도광이었다. 주위의 공기는 마치 장벽으로 변한 듯 그녀의 가는 길을 막아서서 피할 수 없게 했다.
낙옥형은 약간 눈을 내리깔고 속눈썹을 풍성하게 말아 올렸다. 그녀는 오른손에 총채를 쥐고, 왼손 손가락으로 천천히 총채를 쓰다듬었다.
수천수만의 가는 실이 한데 뭉치더니 꼿꼿하게 섰다. 이 순간, 총채가 손에 잡히는 검으로 변했다.
그녀는 가볍게 검을 내밀었다.
쿵!
칼날과 검기가 함께 죽었다. 거기엔 예리한 충격파가 섞여 있었다. 그녀는 조금도 힘을 들이지 않고 주위의 사물을 파괴하였다.
유일하게 금련 도사 앞에는 광막(光幕)이 떠올라 충격파를 막았다. 부서진 칼날과 검기가 광막에 부딪혔다. 빛 찌꺼기와 물결 같은 빛 그림자가 잔잔한 파도를 이루었다.
쿵!
충격파의 영향을 받아 차가운 연못의 지벽(池壁)에 균열이 생기고, 물기둥이 하늘을 향해 치솟더니 다소 구부러진 줄기를 포함한 금색 연뿌리가 나왔다. 줄기의 끝엔 칙칙한 금색 연밥이 보였다.
이때 아홉 가지 각기 다른 색의 꽃잎이 시들어 떨어졌다. 칙칙한 금색의 연밥 안에는 또 연밥 40알이 정렬해 있었다.
조청양의 눈빛이 갑자기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는 차가운 연못 상공에 번쩍 나타나 손을 뻗어 날려버린 연뿌리와 연밥을 손에 쥐고자 했다.
터져 나온 물기둥이 채 떨어지기 전에 물방울 전부가 소검이 되더니, 검우(劍雨)로 응집되어 모조리 조청양을 공격했다.
이는 그를 조금씩 물리쳐, 연뿌리에서 서서히 멀어지게 했다.
낙옥형은 기회를 틈타 소매를 말더니 연뿌리와 연밥을 훔쳐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조청양은 분노에 차서 낮게 울부짖었다. 그가 다소 남루해 보이는 자색 장포를 펄럭이니 무시무시한 기기 파동이 일었다. 이는 수백 미터 밖으로 도망친 사람들을 두려움에 벌벌 떨게 했다.
낙옥형은 정교하고 긴 눈썹을 치켜올리고, 바람을 몰아 곧장 하늘 끝으로 갔다.
그녀는 연뿌리를 챙겨 떠날 작정이었다. 그녀는 껍질이 거칠고 육질이 두꺼운 무사와 얽히지 않으려 했다.
조청양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그녀를 추격하지 않을 작정인 듯 칼을 치켜올리고 가로세로로 비스듬히 긋자, 칼이 순식간에 눈부신 빛을 발하며 물방울 소검 수백 개를 베어냈다.
이 광원들은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광원이 다시 나타났을 때는 이미 낙옥형 주변에 수십 장(丈)짜리 장막이 덮여 있었다.
조청양은 별안간 주먹을 쥐었다.
모든 것을 멸한 도의가 재빠르게 수축하더니 낙옥형의 몸을 흩날리는 재로 만들었다.
허공에서 연뿌리 한 토막, 연밥 하나가 떨어졌다.
조청양이 막 앞으로 나아가 연밥을 받으려던 참이었다. 그는 무사의 직감으로 솜털이 곤두서는 걸 의식하고 위기를 포착했다. 하지만 그는 피하지 않고 역이용하여 상대방을 공격할 심산으로 비스듬히 섰다.
그가 허공에서 검지(劍指)를 찌르자 이것이 무언가와 부딪혀 ‘펑’하는 소리를 냈다. 갑자기 드러난 뽀얀 손이 순수한 빛 찌꺼기로 터졌다.
조청양은 돌연 굳어서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곧 낙옥형의 모습이 나타났는데, 기운이 좀 약해 보였다. 그녀는 팔을 들고, 빛 찌꺼기를 모아 연뿌리로 응집하였다.
그런 뒤 그녀는 손바닥을 펴고 자잘하게 부서진 영혼을 손바닥에 응집시켰고, 그 영혼은 흐릿한 허영으로 변했다. 얼굴이 어슴푸레한, 조청양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