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1화. 기회
‘희겸의 표현대로라면 기운을 빼내기 전에 용기를 부수면 안 된다. 바꿔 말하면 만약 ‘용기’가 깨진다면 기운이 대봉에게 돌아가는 셈인가? 그럼 내가 이 일을 위 공에게 알리면 그는 나를 어떻게 대할까?‘
허칠안은 초를 불고 침상에 누웠을 때, 갑자기 이 질문이 떠올랐다.
그는 기운을 빼 버릴 수도 있었다. 그가 위연에게 초대 감정과 대봉 황실에 남은 혈통의 존재만 알리고 기운에 관한 정보는 흘리지 않으면 됐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위연이 어디까지 아는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마치 그가 감정이 어디까지 아는지 꿰뚫지 못했듯이 말이다.
‘만약 이 정보를 위연에게 알리고, 위연이 다시 자신이 쥐고 있는 정보와 지식을 결합해서 기운의 내막을 추론해낼 수 있다면……. 아, 알고 보니 대봉의 국력이 쇠약하고 백성이 생활고에 시달리며 조당의 적폐가 심각한데 이 모든 게 전부 기운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기운은 허칠안에게 있었다.
포부가 있고, 웅대한 뜻이 있어 고질병을 말끔히 제거하려 애쓰는 국사(國士)로서 위연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대의멸친할 것인가 아니면 감싸고 외면하는 걸 택할 것인가? 이건 내 기우가 아니다. 위연이 보여준 간계와 그의 전설에 의하면, 내가 18층에 있다면, 그는 아마도 99층에 있을 것이다…….’
허칠안은 몸을 뒤척이다가 일어나더니 어둠 속에서 생각에 잠겼다.
그는 갑자기 모두가 의심스러워지면서 전 세계가 본인을 해치려 하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초대와 당대는 미덥지 않았다. 만약 본래 그가 한결같이 붙들고 있던 위연에게 기운에 관한 정보가 들어간다면, 아마도 그들은 사이가 틀어져 원수가 될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어두운 밤에 허칠안은 중얼대며 자문했다.
“만약 내가 3품 나아가 2품 전투력을 지니고 있다면, 제멋대로 굴며 바둑판에서 뛰쳐나와 기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저 6품 무사일 뿐이다. 초대 감정이 칼 한 자루를 내 머리 위에 매단 것 같다. 가까운 시일 내에 떨어지지는 않을 테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나는 아마 단기간 내에 전봉 무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가장 좋은 대응 방식은 호랑이를 몰아 늑대를 삼키는 것이다. 적의 적으로적을 상대한다. 하지만 초대와 당대 모두 좋은 인간은 아니야…….”
한참이 지난 뒤, 고요한 방 안에서 허칠안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법이 떠올랐다. 우선 연밥을 지키고 최대한 빨리 5품으로 승직한다……. 그런 뒤 경성으로 돌아와 위 공과 진실 게임을 한 판 하자…….”
* * *
첫 번째 아침 햇살이 비치는 이른 아침. 밀정들은 검은 장포를 두른 채 월씨 산장 산기슭의 큰길을 따라 20여 대의 화포를 운송하면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천기와 천추는 길가에 서서 뒷짐 지고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부하들이 화포를 일자로 늘어놓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밀정들은 질서정연하게 사격 전 준비 업무를 했다. 그들은 산장 내부의 적이 나서서 습격하고 파괴하는 사태 따위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종의 연화 도사와 제자들이 이 화포 대오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림맹의 태도를 파악해봤을 뿐이다. 조청양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지만, 무림맹은 결국 월씨 산장과 대립각을 세웠거든.”
천기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어젯밤 묵각과 신권방의 태도 탓에 그들을 몹시 경계하는 중이었다. 만약 무림맹 내부에서 반대 목소리가 많이 나온다면, 이 검주의 거대한 물건이 설령 월씨 산장을 배반하지 않는대도 전투력은 크게 떨어질 것이다.
따라서 그는 반드시 무림맹 문제를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했다. 물론 그는 정말로 그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러 온 것도 맞았다. 만약 조청양이 조정의 위엄에 굴복했다면, 그는 이긴 쪽에 걸 생각이었다.
바꾸어서 말하면, 그는 비록 위험을 좀 무릅쓰는 선택을 하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틀린 길을 가지는 않았다. 조청양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그는 명색이 맹주로서 아무리 고집스럽고 건방지더라도 고독한 강호 필부와는 필경 달랐다. 그에게는 고려해야 할 문제가 더 많았다.
그는 이번에 수확도 좋았지만, 대가도 컸다. 그는 명색이 4품 고수이자 밀정 우두머리 중 한 사람으로서 조청양에게 모욕당하고 구타당했다. 그는 충분히 단단한 마음속 담장이 없었기에 한동안은 심리적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할 터였다.
천기가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는 그저 지원 전투력을 제공하고, 지종에게 물꼬만 터주면 된다. 후속적인 연밥 쟁탈은 우리의 주요 목적이 아니다. 허칠안을 죽이는 것이야말로 주목적이지. 이해했는가?”
천추가 ‘음’하고 소리 내더니 웃으며 말했다.
“어젯밤에 그는 천지일도참 그리고 유가 법술을 시전했으니 고작 몇 시진 만에 회복하기란 불가능하네. 이때 죽이지 않으면 언제까지 더 기다리겠는가.”
그들은 회왕 밀정으로서 그리고 지금은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람으로서, 허칠안을 속속들이 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신비로운 그 젊은이 몸에 있던 산산이 조각난 법기에 근거하여 사후 현장을 분석하고 그를 평가했으며 배경을 판단했다.
또한 그때 그는 많은 사람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갑자기 순간 이동하여 부검으로 4품 수행원 둘을 베어 죽이는 조작을 하기도 했다.
그들은 일차적으로 허칠안이 《천지일도참》과 유가 법술을 시전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들은 보이는 자료에 근거하여 이 두 가지 수단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 * *
무림맹, 지종, 회왕 밀정 세 측의 세력이 모였고 그들 뒤에는 둘러싸고 구경하는 수백 명의 강호 인사가 있었다.
어떤 이들은 순전한 산수(散修)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혼란한 틈을 타 한몫 챙기러 작은 파벌에서 온 자들이었다.
이 강호 인사들은 어제 작은 마을에서 기습전을 치른 후, 적극성에 크게 타격을 입었다. 그들은 한편으로 월씨 산장의 강대함을 두려워하면서 현실을 직시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허칠안의 신분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는 영향력이 점차 커질수록 사람들을 점점 더 두렵게 했다. 사람들은 그를 적으로 삼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나는 이날을 아주 오래 기다렸네. 애석하게도 이건 우리들의 무대가 아니야.”
류호가 인파 속에서 구리 막대기를 짚은 채 개탄하였다.
“혼란한 틈을 타 한몫 챙기려는 자에게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지.”
어느 동료는 희망을 품기도 했다.
“내가 어제 양측의 전투력을 계산해보았는데 월씨 산장의 표면적인 전투력에 근거하면 무림맹, 지종 그리고 조정 고수들에 비해 훨씬 딸리더군.”
“어찌 차이가 극심할 뿐이겠는가? 자네들, 지종 도사가 아직 현신하지 않았다는 걸 잊지 말게. 2품이라고. 만약 그가 오면, 전체를 쓸어버릴 거야.”
“그렇다면 우리는 그 틈을 타 한몫 챙길 수 있는 기회조차 없겠군.”
“에이, 자네들 보기에 만약 허 은라가 불문 두법의 실력을 꺼내 보인다면 지종 도사를 강하게 뒤흔들 희망이 있지 않은가?”
“불문 두법에서 감정이 암암리에 도와주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냥 얘기해보는 거잖나. 내가 말한 건 불문 두법 때 허 은라의 위세네. 나야 물론 그게 감정이 암암리에 도운 거라는 걸 알고 있지.”
류 공자는 검을 들고 만화루 여인들에게 다가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용용, 스승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니 월씨 산장은 완강히 저항하고 있을 뿐, 연밥을 지킬 확률은 높지 않다고 하네.”
용용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친분이 두터운 동료를 쳐다보고는, 그가 그새 루주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은밀히 훑어대는 걸 발견했다.
“나는 월씨 산장이 연밥을 지킬 수 있는지 없는지 전혀 관심 없네.”
용용이 소리를 낮추었다.
용용이 보기에 류 공자의 눈빛은 이미 극도로 절제된 상태였다. 어쨌거나 루주 같은 절세미인은 지나치게 눈에 띄었으니 이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를 몰래 보지 않는 남자가 있다면 도리어 문제가 있는 사내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 생각이 일치하는군.”
류 공자가 웃기 시작했다.
현장의 만화루 미녀들을 포함한 사람들 대부분이 같은 생각이었다. 월씨 산장이 연밥을 지킬 수 있는지 없는지 그들과 무슨 관계란 말인가?
그들은 허 은라에게 이변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걸로 됐다.
그들은 허 은라의 대의에 감복했기에 그가 이렇게 무너지는 걸 원치 않았다. 스러나 설사 그가 무너진다 해도 그들이 연밥을 쟁탈하는 데 문제가 생기지도 않았다.
* * *
천지회 제자들이 월씨 산장 안에 모여, 각자의 법기를 손에 쥔 채 적을 기다렸다.
본래 오늘 모임은 평범한 운동회였다. 하지만 백련 도사는 곧 싸움에 임하는 제자들의 긴장과 두려움이 생각보다 더 심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백련 도사는 모든 제자들 앞에 서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앞선 배치에 따라 자신의 위치를 지키면 된다. 긴장하지 말고, 겁내지 말아라. 4품 고수는 너희가 상대할 필요 없다.”
제자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아직 젊었기에 이런 규모의 전투를 거의 겪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심지어 이번 전투는 가히 전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초원진과 이묘진은 이 모습을 보더니 계속해서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구호를 외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허칠안은 패도를 들고 여유롭게 걸어오면서 그들의 긴장한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제자들 앞에 서서 칼을 짚고 선 뒤 담담하게 말했다.
“이건 자네들에게 사실 기회네.”
추선의 등의 제자가 즉시 그를 쳐다보더니 귀를 기울였다.
“천지회의 목적이 무엇인지 자네들이 나보다 더 잘 알겠지. 자네들이 장차 상대할 사람이 누구인지는 더 말할 필요 없겠지?”
허칠안은 모든 이를 둘러보았다.
제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당연히 이 점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했으며, 충분한 실력도 없었다. 젊은 제자들은 지금 사전에 지종 요도들과 맞붙어 보니 능력 이상의 일을 무리하게 떠맡았다는 생각에 당황스러웠다.
“애당초 내가 상백 사건을 맡았을 때의 기분이 자네들과 비슷했네. 마음이 불안하고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었지. 하지만 결국에는 내가 사건을 풀었네. 자네들은 왜인지 아는가?”
허 은라가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자 제자들 마음속의 긴장감이 풀렸다.
“왜냐하면 자네들과 비교했을 때 나는 물러설 곳이 없었거든. 당시 나는 상급자를 칼로 베어 요참형을 선고받았네. 만일 공을 세워 속죄하지 않는다면 죽는 길뿐이었지.”
추선의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 공자께서 잘하셨습니다.”
“맞습니다.”
모든 제자가 황급히 맞장구쳤다.
“이는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네. 내 핵심 의미를 이해해 주게.”
허칠안은 도사를 노려보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물러설 곳이 없었기에 모든 걸 내걸 수 있었네. 후에 운주 사건 때 나 홀로 반란군을 막아선 것도 마찬가지지……. 이 역시 퇴로가 없었고, 당시 상황이 아주 위급했기에 필사적으로 싸우지 않으면 전군이 전멸할 가능성이 농후했네…….”
허칠안은 당당하고 차분하게 자신의 경험을 늘어놓았다. 제자들은 아주 진지하게 듣다가 나중에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더니, 서서히 피가 끓어오르는 듯했다.
그들은 숭배하는 대상의 휘황찬란한 사적을 경청하니 어느 정도 감정적 공감이 형성되었다. 허칠안이 원한 게 바로 이런 공감이었다.
“지금 자네들에게 기회가 생겼네.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지종의 마지막 존엄을 지키게. 장차 종문을 다시 찾은 뒤에 지종의 연대기에는 자네들 모두의 이름과 자네들의 전기가 기록되어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야.”
백련 도사는 지금 상황에서 의문점을 발견했다. 두려워하던 제자들은 어느새 감정이 격해지더니 흥분하여 두려움이 사라졌다.
‘역시 위엄과 명망이 있는 사람은 뭘 말해도 다 옳구나……. 음, 그의 어휘도 아주 기술적이야. 자신의 경험을 결부시켜 제자들의 감정을 끌어올렸다…….’
백련 도사는 칼을 짚은 채 선 젊은이를 보고 있자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녀는 그저 그가 상대방이 의지하고 믿을 만하며 사람을 안심시키는 동료라고 생각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