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7화. 비장의 카드 (2)
월씨 산장 바닥에 새겨진 진문이 하나씩 반짝이기 시작했다. 청광이 응집하더니 세 사람의 형체가 진법에 드러났다.
금련 도사, 백련 도사 그리고 천지회 제자들이 진법 가장자리를 묵묵히 지키다 이 광경을 보더니 즉시 주변을 둘러쌌다.
추선의가 가장 선두로 돌진하여 소녀의 고운 눈빛으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허 공자님, 어떻게 되었나요?”
그녀는 질문을 마친 뒤 숨을 죽이더니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제자들 역시 긴장한 표정으로 허칠안을 쳐다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죽였소!”
허칠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천지회 제자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추선의는 희열을 느끼며, 숭배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금련 도사가 물었다.
“그 4품 둘은…….”
허칠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
도사가 웃었다.
“그렇지도 않습니다.”
허칠안은 제자들을 밀어젖히고 분부했다.
“상처를 치료하는 단약과 식사 그리고 따뜻한 물과 깨끗한 옷을 준비해 주십시오. 도사님, 저를 구할 준비하세요…….”
그는 갑자기 비틀거리더니 바닥으로 쓰러졌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고, 환호성이 뚝 끊겼다. 그들은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두 눈이 탁해졌고, 피부는 건조하면서도 어두워졌으며 사지가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는 허 은라를 발견했다.
그는 기운이 급격히 떨어지고, 심장 박동과 호흡이 멈추려고 했다.
이는 힘이 다해 죽을 징조였다.
그는 유가 법술의 반격인 《천지일도참》으로 인해 말끔히 뽑아낸 에너지가 힘을 다하여 죽을 지경에 이른 듯했다.
추선의는 비명을 지르며 허칠안의 옆으로 달려들었다. 그녀는 놀란 나머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금련 도사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 먼저 콧김을 살핀 뒤 맥을 짚었다. 허칠안의 오장육부가 쇠약해지려는 조짐이 보였다.
생기가 빠르게 사라졌다.
“가서 보양하는 단약을 챙겨 오고, 내가 소중히 간직하던 그 혈삼(血參)을 가져오게…….”
금련 도사는 일련의 명령을 하달했다.
남궁천유는 몸을 숙이고 허칠안의 다른 한 손을 잡아 기기를 끊임없이 주입해 그의 몸을 온양했다.
천지회 제자들은 놀라고 초조한 표정을 한 채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여제자들은 허칠안이 뜻밖의 일을 마주할까 봐 걱정되는 마음과 두려움에 눈물을 닦았다.
* * *
허칠안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고요한 밤하늘, 창밖에서는 가늘고 높은 벌레 울음이 들려왔다. 작은 나무 탁자 위에 놓인 콩알 같은 등잔불은 방 안을 주황빛으로 물들였다.
그는 탁자에 앉아 있는 흰 치마의 미인을 보았다. 그녀는 희고 매끈한 손으로 뺨을 괴고 무료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엇, 깼군요!”
흰 치마의 여인이 말했다.
소녀의 달콤한 목소리와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나태하고 간드러졌다.
허칠안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 또 다시 감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뭐해요?”
그녀가 물었다.
“아마 내가 눈을 뜨는 방식이 옳지 않은가 보네. 내가 의식을 잃은 사이에 곁을 지킨 사람이 뜻밖에도 너라니.”
“대인께서 눈을 천 번 떠도 보이는 건 저일 거예요.”
소소는 뾰로통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에 있는 게 싫은 거죠? 아니면 곁에 남아 하염없이 훌쩍거리면서 대인을 돌볼 그 아이를 보고 싶은 건가요? 음, 추선의 맞죠? 허칠안, 참 대단하십니다. 어디를 가든 아름다운 여인을 불러들이다니요. 대인은 시골에서 교미시키려고 준비한 씨받이인가요?”
“사실 나와 심오한 내용을 쉽게 교류하며 관포지교의 친분을 쌓은 여인은 손에 꼽을 정도야.”
허칠안이 지친 몸으로 버티고 일어나 앉아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바보 같이 앉아서 뭐해. 물 좀 따라줘. 목이 마르군.”
소소는 말로는 그를 나무랐지만 행동은 아주 고분고분했다. 그녀는 바로 컵에 물을 따라 주었다.
“너는 내가 너무 매력적이라서 항상 여자아이들의 호감을 사는 게 나한테 문제가 있어서라고 생각해서는 안 돼. 이건 전형적인 피해자 유죄론이라고.”
허칠안은 갈증을 해소하고 찻잔을 다시 소소에게 건네며 물었다.
“어째서 네가 나를 지키는 거지?”
소소는 침상 옆에 앉아 찻잔을 쥐고 간드러지는 눈을 희번덕였다.
“주인님께서 내가 대인의 첩이니 부군이 다쳤으면 첩이 당연히 옷을 벗기고 침상 옆에서 돌봐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 추선의를 내쫓아 버리고 대인을 돌볼 사람으로 저를 남긴 거예요.”
‘혹시라도 내가 허튼짓을 할까 봐 예쁜 소녀를 내쫓아 버리고 종이 인형이 나를 보살피게 했구나…….’
허칠안은 이묘진의 속셈이 음흉하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내가 얼마 동안 의식이 없었지?”
그는 주먹을 쥐었지만 약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신체의 기가 빨려 생긴 후유증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한 시진 내로 보완하고 의식을 회복할 수 있다는 말은 영험한 묘약을 적잖이 썼다는 의미기도 했다.
“나 대신 금련 도사님에게 감사하다고 해줘. 좋은 약을 적잖이 쓰셨군.”
허칠안이 웃으며 말했다.
소소를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입을 삐죽였다.
“이 천지회는 찢어질 듯 가난하더라고요. 그들에게 대인을 응급 처치하라고 했으면 내일 깨어나지 못했을 거예요. 머리에 문제가 있는 그 술사가 대인을 구한 거예요.”
“양 사형?”
허칠안은 어리둥절하다가 환자에게 의료 행위를 함에 있어 도사는 비위를 맞춰도 술사를 따라갈 수 없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천지회도 최선을 다했어요. 가장 좋은 단약과 혈삼을 가져와 대인을 구했어요. 하지만 머리에 문제 있는 그 술사가 ‘도사는 도사군. 궁상맞아 가엾군’이라고 했어요. 그러고는 단약 한 알을 꺼내 대인에게 먹였어요. 듣자 하니 그건 혈태환처럼 진귀한 최상품 단약이라던데요.”
소소가 말했다.
‘역시 술사는 돈이 많아. 인종처럼 전부 대부호지…….’
허칠안은 머릿속으로 그 장면을 그려보더니 마음속으로 양 사형이 이번에는 제대로 허세를 부렸다고 생각했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소소, 나는 별일 없으니 너 먼저 나가렴. 음, 밖에서 지키고 있는 게 좋겠어. 누구도 나를 방해하러 오면 안 돼.”
허칠안이 분부했다.
“나는 아직 대인의 첩이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사람을 부려먹다니요.”
소소는 기분 나빠했다.
“얼른 가!”
허칠안은 그녀의 종이 엉덩이를 툭 쳤다.
소소가 문을 닫고 나가자, 허칠안은 허리춤의 향낭을 떼고 매듭을 풀어 구겸의 영혼을 풀어 주었다.
후…….
음산한 바람이 향낭에서 스쳐 나오자 방 안의 온도가 급속하게 떨어졌다. 한 허구의 형체가 나타나 공중에 떠올랐다.
그의 표정은 멍하고, 두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사람이 죽은 후, ‘천지(天地)’ 두 영혼은 즉시 몸을 떠나 비몽사몽 멍한 상태에 빠진다. 인혼(人魂)은 몸속에 7일간 숨어 있다가 비로소 나오는데 이때 천지 두 영혼이 와서 인혼을 찾는다.
세 영혼이 모이면 생전의 기억을 되찾고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젊은이의 신분은 보통이 아니야. 내 몸속의 기운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으니 어쩌면 그에게서 핵심 기밀을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몰라…….”
허칠안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는 심장 박동이 더 빨라지고 피가 끓어오르는 듯했다. 그는 오랫동안 이렇게 흥분한 적이 없었다.
바로 이때, 그의 귓바퀴가 살짝 움직이자 마당 밖에서 소소의 요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들어오면 안 돼. 우리 집 부군께서 쉬고 계시니 아무도 방해하면 안 된다고.”
그런 뒤 추선의의 기분 나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냥 가서 좀 볼게요.”
“도사는 출가한 사람이지만, 남녀 간의 규율도 알아야지. 한밤중인데 어디 남자 방에 접근하는 거야?”
“허 공자님은 천지회의 은인이고, 제가 방에 들어가서 문병하는 게 어떻단 말인가요? 출가한 사람은 공명정대하고 양심에 물어 부끄럽지 않습니다.”
“아이고, 양심에 물어 부끄럽지 않다고? 너희 천지회에 제자가 34명 있는데 어째서 너 혼자만 오는 거지? 그의 몸을 탐하는 게 아니고선.”
“너, 너, 너…….”
추선의는 부끄러운 나머지 얼굴과 귀가 빨개졌다.
“너는 무슨 너야. 넌 이성을 그리워하는 소녀잖아. 이 몸은 경험자야. 너희 같은 계집애가 마음속으로 뭘 생각하는지 내가 모를 수 있겠니?”
소소는 호전적인 암탉처럼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우리 부군께서는 목숨처럼 여색을 좋아해서 찬밥 더운밥 가리지를 않으셔. 나는 낭자들에게 거리를 유지하라고 권해. 철 좀 들으렴. 그렇지 않으면 처녀의 몸을 잃게 되고, 결국에는 농락당한 뒤에 버려질 거야. 이 일이 밖으로 퍼지면 듣기 좋지도 않잖아.”
소소는 ‘허’하고 소리를 냈다.
“혹시 꼬마 도사의 생각과 꼭 들어맞았나?”
“저, 저는 금련 사숙을 찾으러 갈게요…….”
추선의 같은 낭자가 어디 늙은 귀신 소소와 싸워 이기겠는가. 그녀는 수치와 분노로 발을 동동 구르며 달아났다.
‘그래. 난 쓰레기니 금련 도사를 찾아가렴…….’
허칠안은 방 안에 떠 있는 영혼을 쳐다보더니 한숨을 쉬고 묵묵히 향낭을 거둬들였다.
그는 갑자기 자신이 지나치게 초조해한다는 걸 깨달았다. 산장에는 초원진 등의 고수가 있었다. 눈과 귀가 영민하여 일부러 엿듣지 않아도 만일 지나치거나 하면, 그의 가장 큰 비밀이 순식간에 그들의 귀에 들어갈 터였다.
‘우선 금련 도사, 그들을 안심시킨 후에 양천환을 찾아가 방음 진법을 쳐달라고 해야지…….’
허칠안은 향낭을 허리춤에 도로 걸고, 문을 연 뒤 뜰 밖에 있는 소소를 향해 손짓했다.
소소는 두 손을 뒷짐 지고 입으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뿐한 발걸음으로 방에 들어왔다.
“보아 하니 자신의 신분에 아주 큰 소속감을 지닌 듯해.”
허칠안이 흐뭇해했다.
농염하기 그지없는 이 여자 귀신은 입으로는 거부했지만, 속으로는 아주 성실하게 허씨 집안 첩이라는 신분에 일찌감치 몰입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부군을 꾀어내려는 여인에게 강렬한 적의를 품었다.
“저는 그저 대인의 좋은 일을 망치고, 대인의 인상을 깎아 먹으면 쾌감이 충만해지는 느낌이 들 뿐이에요.”
소소는 매력 있게 헤헤 소리 내더니 우쭐거렸다.
소소가 고개를 치켜들고 그에게 혀를 내밀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자, 곱고 우아한 자태에 교태와 귀여움이 더해졌다.
그들이 대화하는 사이 금련 도사가 달려왔고, 뒤이어 백련 도사, 이묘진과 초원진 그리고 리나와 항원 대사가 차례대로 따라왔다.
양천환과 남궁천유는 그를 병문안하러 오지 않았다.
“내일 결전이니 우리 미리 상의해야 하네. 자네 어떠한가?”
금련 도사는 허칠안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은 뒤 표정이 좀 어두워졌다.
“사나흘 요양하면 회복됩니다. 내일 전투는 죄송합니다…….”
허칠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현재 상황은 신체 기력은 이미 회복했지만, 기기는 아직이었다. 싸울 수는 있지만 아주 강한 실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적 역시 기기는 필요 없이 그와 순수하게 육탄전을 벌이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거 참 좋지 않군!”
갑자기 백의 형체가 반짝이더니 방안에 나타나서는 모든 사람을 등진 채 창문을 향했다.
양천환이 여유롭게 말했다.
“내가 설치한 진법은 여덟 겹이네. 모든 진법의 진안(陳眼)에는 지키는 고수가 한 명 필요하지. 나는 본래 자네의 금강신공에 맞춰 인위적으로 방어 진법을 한 층 설치했네.”
그는 밤에 젊은 부잣집 공자와 4품 전봉급 수행원 둘을 베어 죽여 완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 둘은 본래 추가로 나온 이들이었으며, 자기편에서 허칠안이라는 엄청난 고수에게 손해를 입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