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9화. 퇴거 (1)
양최설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소리가 들리는 쪽을 살펴보니, 검은색 경장을 입고 머리를 높게 묶었으며 허리에 긴 칼을 찬 젊은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좀 낯이 익은 것 같은데…….’
그가 막 생각했을 때, 뒤에 있던 제자 중에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허칠안, 그가 어째서 여기에 있지?”
이 말을 한 사람은 류 공자였다. 그는 경성에 있을 때 허칠안과 접점이 있었다.
류 공자는 다시 허칠안을 보니 그래도 아주 기뻤다. 그들은 애당초 싸우다가 정이 든 셈이었다. 비록 허 은라가 준 첫인상은 좋지 않았지만 (만나자마자 그가 애지중지하는 패검을 부러뜨렸다).
하지만 허 은라의 인품은 인정할 만했다. 사실이 그랬다. 그는 용용 낭자를 범인으로 잡아갔을 때 기회를 엿봐 무력으로 점유하는 짓을 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오해했음을 안 후에는 제대로 사과했을 뿐만 아니라 사천감에서 산출한 법기까지 그에게 선물했더랬다.
류 공자가 지난 일을 회상하는 사이, 갑자기 각주가 흥분한 얼굴로 그의 어깨를 누르더니 방금 한 말을 증명하기를 요구하며 눈을 빛냈다.
“그, 그가 허칠안?”
류 공자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경성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사부님도 아시고요.”
양최설은 즉시 사제를 쳐다보았고, 류 공자의 사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허 은라입니다.”
양최설이 다시 허칠안을 볼 때는 이미 기억 속의 초상화와 일치했다. 확실히 그는 허칠안이었다.
류호는 갑자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눈 속에는 젊은 남자의 모습이 비쳤다. 그는 며칠 전까지 입가에 달고 살았던 화제가 떠올랐다.
검주와 경성은 이천 리 떨어져 있었다. 정보망이 있는 대조직을 배제하고는 강호의 산인(*散人: 세상을 버리고 한가하게 지내는 사람)과 일반 백성이 진정으로 초주성 백성 대량 학살 사건의 전말을 듣고 황제의 죄기소를 보기까지 사실 닷새라는 시간이 걸렸다.
소식이 초주까지 전해지자 순식간에 파문이 일었다. 사람들은 강호에서 관아까지 모두 이 일을 얘기했으며, 다들 허 은라의 대의에 박수를 치며 쾌재를 불렀다.
허칠안은 불문 두법에 이어 또다시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백성들 사이에서 영웅이자 청렴하고 공정한 관리가 되었다.
원수처럼 질투하던 강호 인사도 그를 더할 나위 없이 숭배하고 존경했다.
그는 뜻밖에도 자신이 여기서 직접 그 전기적인 인물을 볼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역시나 헌걸차다. 뛰어난 인재야…….’
류호는 속으로 감탄했다.
다른 강호 산인의 심정은 그와 대체로 같았다. 다들 경악하면서도 기뻐했다.
‘우리가 초주에서 허 은라를 만났다니……. 이건 남 앞에 내세워 자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깃거리다.’
양최설은 엄숙한 표정으로 의관을 바로한 뒤에야 마중 나가더니 허리를 굽혀 읍을 올렸다.
“묵각, 양최설, 허 은라를 뵙습니다.”
경력이 풍부한 4품 고수이자 한 파벌의 우두머리가 아랫사람에게 예를 갖추는 건 본래 지극히 신분이 하락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리에 있는 강호 인사 및 묵각의 모든 쪽빛 적삼 검객들은 양최설의 행동이 전혀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허 은라의 일련의 장거(長擧), 더욱이 초주성 백성 대량 학살 사건에서 보여준 모습이라면 충분히 그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양 각주, 겸손하십니다. 제게 이렇게 예의를 차리시면 안 됩니다.”
허칠안은 손을 뻗어 부축하는 시늉을 했다.
“제가 허 은라를 만나 뵌 적은 없지만 흠모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직접 뵈니 가슴이 벅차고 마음이 들뜨네요.”
양최설의 간절한 웃음에는 각주의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
‘만난 적은 없지만 흠모한 지 오래되었다니. 뭔가 이상한 느낌인데…….’
허칠안은 웃으며 말했다.
“소생 역시 각주의 명성을 익히 들었습니다.”
사실 그는 들은 적이 없었지만, 비즈니스상 일단 상대를 띄워주었다.
천지회 제자들은 이상히 여기며 이 장면을 지켜보았다. 묵각 각주는 본래 건방진 표정과 태도로 이묘진과 초원진을 비꼬고 풍자하더니, 이 순간에는 전혀 허세 부리지 않고 허 은라에게 친절한 미소로 성실하게 말했다.
또한 강호 산인들과 쪽빛 적삼 검객들은 먼 곳에서 미소를 지으며 이 광경을 쳐다보았다.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여제자들은 허칠안을 바라보다 점점 그에게 매혹되었다. 이 남자가 지닌 인격적인 매력이 아주 강했다.
가장 빛나는 별을 쫓는 건 모든 사람이 지닌 천성이었다.
이 순간 이 자리, 허칠안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녀들 눈에 가장 빛나는 별이었다.
‘그가 이렇게 강한 성망을 지니고 있다니…….’
백련 도사는 아름다운 눈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성격이 담박하고 욕심이 없었기에 명예와 이익을 아주 담담하게 대했다. 그녀는 주관적인 판단으로 남을 헤아렸는데 외부 세계에서는 허칠안의 명성을 잘못 짚었다.
“양 각주, 체면이고 뭐고 방금 농담한 겁니다.”
허칠안은 몇 마디 인사말을 나눈 뒤,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는 정중하게 읍한 뒤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저와 천종 이 장군 그리고 초 형은 친분이 두텁습니다. 이번에 그들 두 사람의 요청을 받아 월씨 산장에 연밥을 수호하는 걸 도우러 왔습니다. 각주께서 관대히 봐주시길 청하는 바입니다.”
양최설은 잠시 침음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허 은라께서 연밥을 지키고 있다는 걸 안 이상, 이 몸은 이 일에 개입하지 않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늘그막에 명예를 잃겠군요.”
반은 농담조였으나 반은 진지한 어조였다.
“감사합니다!”
허칠안은 돌아서서 다른 사람을 쳐다보더니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우연히 알게 된 것도 인연이니 관대하게 봐주실 수 있길 바랍니다. 모두 친구를 맺고 앞으로 힘든 점이 있으면 얼마든지 분부하십시오. 허칠안이 반드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말은 귀에 거슬리지 않아 사람들이 아주 잘 받아들였다.
강호를 거니는 데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가?
체면을 살려주는 일이었다.
체면을 살려주지 않는데 무슨 강호를 거닌단 말인가.
하물며 허 은라 같은 인물이니, 그가 좋은 말을 한마디 하면 보통 사람의 열 마디보다 쓸모 있었다.
류호가 입을 벌리고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 어머니께서 다른 사람의 한담을 즐겨 들으시는데 얼마 전에 허 은라의 사적을 듣고선 집에 돌아와 시종일관 허 은라를 칭찬하더군요. 허 은라께서는 청렴하고 공정한 관리라고 말씀하시면서요. 제가 허 은라와 짝을 이루었다는 걸 그녀가 알게 해야 하는데요.”
“저 역시 물러나겠습니다. 어머니, 이 몸 역시 고향 사람이 뒤에서 헐뜯는 걸 원치 않습니다.”
누군가 큰 소리로 한마디 맞장구쳤다.
“허 은라, 사내의 약속은 천금과 같이 무거운 법이지요. 개입하지 않겠다면 개입하지 않을 겁니다. 저희가 이런 말을 쓸 수는 없지만, 이 이치는 압니다.”
또 누군가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명성이 있는 사람이구나. 진정으로 명성이 있는 사람은 그와 대적하길 원하는 자가 아무도 없구나…….’
이묘진은 속이 좀 쓰려서 볼이 불룩해졌다.
어느새 허칠안은 이미 이렇게 두터운 신망을 쌓았다.
그녀는 애당초 그가 지서를 통해 문자를 보내면서 운주로 도망친 금오위 백호 주적웅의 체포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던 때가 기억났다. 그때의 그는 약소했고, 인맥도 부족했다.
그런데 그는 시간이 반년 넘게 지나자 수련 경지든 명성이든 전부 그녀를 따라잡았다.
‘이 명성이라면 조정 제공들 역시 부러움에 가슴을 치고 발을 동동 구르겠군…….’
초원진은 잠자코 사태를 방관하였다. 그는 강호를 여러 해 떠돌았는데, 허칠안처럼 빠르게 부상한 자가 어찌 드물고 진귀하지 않겠는가. 그의 존재는 유일무이하다고 해야 하는 게 맞았다.
양최설은 잠시 망설이더니 전음으로 말했다.
“묵각은 이 일에 개입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무림맹은 세력이 강하고 고수들이 아주 많습니다. 지종의 정통 도사도 마찬가지겠고요. 허 은라께서는 역량을 헤아려가면서 행해야지 위세를 부리면 안 됩니다. 내일 이 몸이 관전하러 올 것입니다. 급박한 시기에…….”
그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다.
‘묵각의 각주는 아주 의협심이 강한데? 어쩐지 강율중 그들이 강호는 관리 사회보다도 만 배는 재미있다고 늘 얘기했더라니. 시간이 나면 나도 강호를 한 번 거닐어야겠어…….’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여 상대방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선 전음으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각주.”
양최설은 손을 흔들며 다시 읍하더니 묵각의 제자들을 데리고 떠났다.
류호 일행 역시 뒤따라 떠났다.
‘후…….’
천지회의 제자들은 얼굴이 환해져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허 공자.”
자태가 유달리 특출난 소녀가 연약한 목소리와 함께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두 손을 뒤에 두고 입을 오므리더니 말했다.
“허 공자께서 도와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녀는 말을 하려다가 만 듯한 기세였다. 그녀는 나이가 많지 않았는데 젖살이 빠진 후 막 뾰족하게 깎인 소녀의 아래턱에는 아름다운 연약함이 묻어났다.
일이 년 더 지나면 마음속으로 흠모하는 낭군이 뾰족한 아래턱을 쥔 채 한 마디 놀릴 수 있을 듯했다.
‘소저, 오늘 그대가 바로 내 사람이오.’
‘여동생은 올해 몇 살인지? 남자친구는 있는지 없는지? 위챗 추가해도 될까…….’
허칠안은 속으로 세 차례 물었지만, 겉으로는 아주 쌀쌀맞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소녀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제자, 제자는 추선의(秋蟬衣)라고 합니다. 허, 허 공자님께서도 지서 파편 소지자가 맞지요?”
항원 대사, 초원진 그리고 이묘진은 이 말을 듣더니 무의식적으로 쳐다봤다.
‘제기랄, 소저 너무 악랄한 거 아니야? 사람들 앞에서 나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고 싶은 거야?’
허칠안은 정색했다.
“나는 아니오.”
“앗?”
이 대답은 추선의의 예상을 벗어났다. 그녀는 작은 입을 크게 벌린 채 좀 실망했다.
“그, 그럼 공자께서는 정말 묘진 사저와 초 사형의 인정 때문에 온 거예요?”
다른 제자들 역시 그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허 은라가 도의나 정분 때문에 나서서 도운 게 아니라 천지회 구성원이기를 바랐다.
이 점은 아주 중요했다.
“나는 사건을 조사하러 왔소.”
허칠안은 무시하는 태도로 말했다.
“사건 조사요?”
추선의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순진무구하게 말했다.
“저희 천지회에 무슨 사건이 있을 수 있나요?”
허칠안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띠었다.
“나는 금련 도사님과 막역한 사이오. 설령 지서 파편 소지자가 아니라고 해도 남은 아닐 것이오.”
백련 도사가 이상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허 은라가 왜 자신의 신분을 부인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엇? 양 선배는?”
허칠안은 고개를 돌려 사방을 둘러보았다.
“모르겠습니다. 그 강호 필부들이 나타난 후 그는 사라졌습니다.”
한 제자가 대답했다.
‘양천환은 또 허세 부리러 어디까지 간 거야…….’
허칠안이 분석했다.
“내가 여기에 왔다는 정보가 분명히 그 사람들을 통해 퍼질 것이네. 월씨 산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작은 마을이 있지?”
방금 말한 그 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 도호는?”
허칠안이 물었다.
“허 은라, 저는 능운(凌云)이라고 합니다.”
젊은 제자가 대답했다.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능운 사제, 자네에게 한 가지 일을 부탁하겠네. 즉시 변장하고 마을에 가서 정보를 캐내게. 각지 군대의 반응을 좀 봐주게.”
능운 도사는 흥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 공자님, 안심하십시오. 제가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 * *
어느 외진 구석, 양천환이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손가락으로 지면에 원을 그리며 중얼거렸다.
“나는 이해했다, 이해했어. 우선 나는 먼저 충분한 성망을 쌓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