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8화. 체면 (2)
손을 쓴 사람은 예쁘장한 소녀였다. 그녀는 눈이 파랗고 깊으며 피부가 밀색이었다.
남강 사람의 특징은 이렇게 뚜렷했다.
퉁퉁한 뚱보는 안색이 변했다. 그는 전투 경험이 풍부했기에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 그는 재빠르게 검은 망치를 버리고 날렵하게 뒤로 물러났다.
“너희 중원 남자들은 전부 겁쟁이인가 봐? 이렇게 가벼운 걸 쓴다고?”
리나는 손에 망치 두 개를 든 상태였다. 그녀는 마치 꼬마 여자아이가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그것을 던졌다 받았다 했다.
저쪽에 있는 모든 강호 인사들은 멍하니 이 장면을 보면서 놀란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전투력은 둘째치고, 이런 힘만으로도 그들 모두를 짓눌렀다.
“남강 고족, 역고부?”
누군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는 듯 중얼거렸다.
리나는 쪽빛 눈동자로 모두를 훑은 뒤 입을 벌려 덧니를 내보이며 헤헤 웃었다.
“너희 중원에 오는 정이 있으면 가는 정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더라.”
몇몇 고수를 제외하곤 모든 강호 인사들은 섬뜩해져 슬그머니 무기를 꽉 쥐었다.
철컥…….
리나가 한 발로 바닥을 디디니 벽돌이 갈라지면서 화살처럼 군중 속으로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그녀는 한주먹으로 한 사내를 때려눕혔다. 그녀는 힘이 무궁무진한데 유독 몸동작이 민첩하고 몸 기술이 정밀했다.
십여 명이 회합해도 그녀 발끝에 닿을 수 있는 자가 없었다.
‘정말 세다…….’
천지회 제자들은 눈을 반짝이며 사기가 진작되었다.
그들은 이전에 모든 시선을 이묘진과 허칠안 그리고 초원진에게 두고, 이 타민족 소저를 소홀히 했다. 그들은 그녀가 덤인 줄 알았기에 이렇게 강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구리 막대를 쓰는 사나이가 나선 뒤에야 리나의 공세를 저지할 수 있었다.
수십 명이 구리 막대 사나이를 필두로 하여 포위 공세를 이루었다. 게다가 군중 속에는 암살 무기를 다루는 명수 몇몇이 있었기에 시도 때도 없이 간사한 각도로 암살 무기를 몇 번 내던졌다.
여러 측이 협력하여 마침내 우세를 되찾아왔다.
여러 동료가 타민족 소녀에게 매달린 틈을 타, 구리 막대를 쓰는 사나이가 큰 소리와 함께 몸을 돌려 막대를 휘둘렀다. 그의 막대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는 처량하고 날카로웠다.
리나는 손을 들어 다시 한번 손바닥으로 무기를 막았다. 그녀는 발을 들어 사나이를 곧게 걷어차 버렸고, 그는 피투성이가 되었다.
“리나, 충분해.”
이묘진이 모든 제자들 뒤에서 돌아 나와 소리 높여 제지했다.
격렬하게 교전하던 쌍방이 갑자기 전투를 멈췄다.
리나는 구리 막대기를 아무렇게나 내던지고선 가늘고 힘 있는 다리를 내디뎌 사람들을 지나 이묘진 옆으로 돌아왔다.
“그, 그대는 비연 여협객?!”
한 강호 인사가 이묘진을 알아보았다.
‘비연 여협객?’
사람들은 약간 안색이 변해 이묘진을 자세히 살폈다.
천종 성녀는 강호 필부들을 훑어보더니 물었다.
“누가 대장인가?”
그녀는 강호를 아주 잘 알았다. 만약 단결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면, 강호 인사들은 가장 위엄과 명망이 있거나 협객으로서 가장 명성 있는 자를 임시 대장으로 선발하곤 했다.
어떤 때는 명성과 위엄이 실력보다 더 중요했다. 실력은 사람들이 자신을 꺼리게 하고 두려워하게 할 수 있지만, 명성으로는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있었다.
건장한 남자가 복부를 감싼 채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와 공수했다.
“검주 남회군(南淮郡), 류호(柳虎)입니다. 소저께서는 정말 비연 여협객입니까?”
‘그저 실력이 좋지 않은 산수들이야. 허칠안이 나설 필요 없이 내가 처리할 수 있겠어…….’
이묘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여러분, 구색연화는 지종의 지보네. 지금 주위에서 강적이 몰래 엿보고 있는데 자네들의 실력으로는 쟁탈하기에 역부족이야. 섣불리 개입하면 죽는 길밖에 없으니 차라리 내 체면을 봐서 물러가게. 이 일에 개입하지 말고.”
‘이건…….’
류호는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는 비연 여협객의 명성을 익히 들었다.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명성이 자자했다.
이 천종 성녀는 작년에 데뷔하였다. 그녀는 강호를 두루 돌아다니며 의로운 일을 하여 강호에서는 명망이 높았고, 벗도 무수히 많았다.
‘만약 그녀에게 미움을 산다면, 입만 놀리기만 해도 나는 그녀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지명 수배에 대처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연밥이 매혹적이긴 하지만, 비연 여협객의 말에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원래 이번에 인연이 닿아 온 것인데, 인연은 무리하게 요구해서는 안 되는 법…….’
류호는 물러날 마음이 생겼다.
다른 강호 인사들 역시 약간 거리낌이 들었다. 그들은 이묘진에게 미움을 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들은 관아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조정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강호에서 인맥이 넓은 비연 여협객의 미움을 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역시 비연 여협객다워. 이 영향력은 이미 덕망과 명성이 높은 원로들을 능가하는군…….’
백련 도사는 먼 곳에서 관망하던 중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허칠안이 나서지 않아도, 이묘진으로도 충분해 보였다.
그녀는 바로 보잘것없이 그럭저럭 강호를 누비던 천종의 역대 성자, 성녀가 떠올랐다. 이번 세대 성녀 이묘진은 선배들과 다른 듯했다.
그럭저럭 살아가다가 한 시대의 여협객이 되었다…….
이묘진은 웃더니 공수했다.
“묘진이 먼저 여러분에게 감사를 표하겠네. 앞으로 강호에서 상봉하면 친구일세. 무슨 도움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얘기하게. 묘진이 반드시 모든 힘을 다해 도울 걸세.”
사람들은 여전히 달갑지 않았지만, 비연 여협객의 구두 약조를 얻어내어 반발이 조금은 줄어들었다.
“비연 여협객, 대단한 위엄입니다.”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보기 좋게 수염을 기른 중년 검객이었다.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기개가 높은 이 사람은 손에 검은 칼자루와 날카로운 검을 쥐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쪽빛 적삼을 입은 수십 명의 검객이 있었다. 류 공자와 그의 사부 역시 그 안에 있었다.
“묵각이군!”
“각주 양최설(楊崔雪)입니다.”
앞서 큰일을 위해 치욕을 참고 현실과 타협한 산수들이 이 순간에는 줏대가 생긴 듯 자발적으로 다가왔다.
묵각은 수많은 파벌이 있는 검주에서도 선두에 자리한 큰 파벌이었다.
이묘진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보기 좋은 수염의 검객을 훑어보았다.
“구곡(九曲) 검법, 홍하(紅河) 묵각?”
묵각은 부상한 지 백 년이 채 되지 않은 검주 파벌로, 내실이 튼튼했다. 파벌을 만든 창시자가 홍하에서 도리를 깨달은 뒤, 홍하의 구곡을 구경하면서 최고의 검법을 깨달았다고 했다.
창시자는 홍하 가장자리에 묵각을 세웠다.
여기서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건 양최설이 경력이 풍부한 4품으로 검법의 조예가 깊다는 점이었다. 가장 폭넓은 사람들이 아는 전적은 홀로 4품 두 명과 하루를 꼬박 격투했는데 무승부였다는 것이었다.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양최설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지막이 말했다.
“소위 금전도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데 하물며 구색연화 같은 보물인데요. 비연 여협객께서 세력으로 사람을 누르는 건 너무 막무가내이지 않습니까.”
이묘진은 냉소를 지었다.
“줄곧 듣기로 양 각주는 강직하여 아첨하지 않고, 사람 됨됨이가 올바르다고 하던데 확실히 도리를 아는 사람이군. 얘기하는 게 전부 생억지네그려. 구색연화는 본래 지종의 물건인데 자네들이 힘으로 빼앗으려고 하면서 이런 허울 좋은 말만 늘어놓다니.”
그녀는 묵각 각주 양최설의 명성을 들은 적이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이 자는 방식이 올바르고, 의협심이 많은 사람을 가장 좋아하는 부류였기에 평판이 좋은 강호 협객들에게 자주 은량을 선물한다고 했다.
그러한 이유로 양최설은 사람들에게 우스갯소리로 양 선인(善人)이라고 불렸다.
“허, 비연 여협객께서는 천종 성녀시니 당연히 저희 같은 평범한 사람의 고충을 모르시겠지요.”
누군가 괴상야릇하게 말했다.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무슨 강호를 거닌답니까? 이 몸의 수련 경지와 이 신병(神兵) 모두 목숨 걸고 얻어낸 것입니다.”
“제 말이요. 목숨을 내걸지 않고서 마지막에 승자는 누구일지 어떻게 압니까?”
누군가 뒷받침해주자 산수들의 말하는 어조가 바로 딱딱해졌다.
양최설은 고개를 저었다.
“비연 여협객께선 천종 성녀이니 공법(功法)이 부족하지 않고, 명사(名師)가 부족하지 않은데 산수의 어쩔 수 없음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누군가는 한 품계에 머물러 수십 년을 나아가지 못합니다.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구하고 싶어도 명사를 찾을 수 없지요. 누군가는 손에 쥘 법기가 부족하지만, 십 년을 하루처럼 보통 무기를 씁니다. 목숨을 걸고 쟁취하러 가지 않는데 어떻게 승직하겠습니까? 어떻게 두각을 나타내겠습니까? 저는 그저 그대가 그들을 격파하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쟁취할 자격을 박탈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백련 도사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이묘진 뒤의 제자들은 다시 경계하기 시작하며 전투할 준비를 했다.
이묘진은 좀 화가 나서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자가 훼방을 놓자 자리에 있던 필부들이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다.
이묘진이 칼자루를 누르고 담담하게 말했다.
“양 각주가 무림맹을 대표하여 물을 흐려놓는 건가?”
비검이 웅웅 소리를 내며 진동하더니 충분한 준비를 마치고 기다렸다.
십여 명의 쪽빛 적삼 검객이 잇따라 검을 뽑았다.
양최설이 손을 들어 검자루를 누르는 순간, 이묘진의 끓어오르던 검세(劍勢)가 깡그리 사라졌다.
“비연 여협객께서는 도문의 제자라 결국 검법이 좀 떨어지는군요.”
양최설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묘진이 평범한 강호 산수를 겁먹게 하는 건 지장 없지만, 이 묵각의 각주는 기기가 옹골지다. 설령 4품 안이라도 강자다…….’
초원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더는 수수방관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발을 내디디고 나와 웃으며 말했다.
“소생 초원진입니다.”
양최설은 어리둥절하더니 정중하게 읍하였다.
“경성 제일 검객, 존함은 익히 들었습니다.”
초원진이 바로 말했다.
“각주께서 소생의 체면, 인종의 체면을 살려주실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양최설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저 일개 무사입니다. 인종은 도문인데 저와 무슨 상관이며, 자리에 있는 모두와 무슨 상관이랍니까? 초 형이라면…… 제 직언을 용서해주십시오. 아무런 실적도 없는데 무슨 체면이 있는 겁니까?”
……초원진은 얼굴이 어두워졌다.
양최설은 계속해서 말했다.
“저는 검객입니다. 검도(劍道)는 곧지요. 할 말이 있으니 얼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도문은 속세와 거리가 멀어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공경하지는 않습니다. 비연 여협객께서는 의로운 일을 하지만, 저희가 눈앞의 기회를 포기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초 형은 더욱 말할 것도 없고요.”
류호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이묘진은 냉소를 지었다.
“말을 쭉 늘어놓았는데 그냥 직접 누구의 체면도 필요 없다고 말하면 되는 것 아닌가? 우리 아무래도 개인적으로 진짜 능력을 보여줘야겠군.”
양최설이 또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없는 게 아닙니다. 그저 두 분이 부족할 뿐이지요. 나라를 위하는 자, 백성을 위하는 자, 백성들의 추대를 받는 자 모두 그 안에 있지요.”
“재미있군!”
이때 허칠안이 제자들 뒤에서 돌아 나왔다. 그는 미소를 머금고 걸어왔다.
“내 체면은 양 각주가 살려줄지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