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타경-531화 (528/712)

531화. 천기 차단

이튿날 허칠안은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일어났다. 그가 나무 대야를 받친 채 마당에 오니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의자에 앉은 왕비가 보였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햇볕을 쬐고 있었다.

그는 이목구비가 평범하기 그지없는 대봉 제일 미인을 쳐다보더니 조용히, 아무런 거리낌 없이 물을 한 통 떠서 세수하고 양치할 준비를 했다.

왕비는 이 모습을 보고 황급히 방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그녀의 나무 대야를 받치고 나왔다. 그녀는 그의 곁에 쭈그리고 앉아 남은 물 반 통을 자신의 나무 대야에 부었다.

그런 뒤 그녀는 흰 수건을 흠뻑 적시고 볼을 꼼꼼하게 닦았다.

허칠안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옆에 있는 여인을 쳐다보며 믿기 어렵다는 듯 말했다.

“제가 물을 뜨길 기다리셨습니까?”

왕비는 얼굴을 닦으면서 한번 흘겨보더니 우물우물 말했다.

“안 되나?”

허칠안은 돼지털 칫솔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공수했다.

* * *

허칠안은 왕비의 소원을 들어주고 나서 허부로 돌아왔다. 그는 애지중지하는 암말을 끌고 와서 그대로 야경꾼 관아로 내달렸다.

그는 관아 입구에 도착하자 문을 지키는 시위에게 말고삐를 내던지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시위는 본능적으로 말고삐를 받고는, 문득 허 은라가 이미 은라가 아니라는 생각에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벌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국 침묵을 지켰다.

가는 길 내내, 서로 잘 아는 은라와 동라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무도 다가가 인사하지는 않았다.

결코 그들이 잇속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함부로 지나친 열정을 보이면 누군가 몰래 폐하한테 보고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야경꾼은 바로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이었다.

위연만이 원경제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설령 허칠안이 더는 야경꾼이 아니라고 해도, 그들에게는 함께 향을 피우고 맹세한 정이 아직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7층에 있는 익숙한 다실에서 곧 위연을 만났다.

“위 공, 지종의 금련 도사가 제게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구색연화가 곧 여물 것이니 위 공께서 나서서 도와주실 수 있길 바란답니다. 그가 연밥 두 알로 보상할 것입니다.”

허칠안은 여전히 예전처럼 정중하게 공수했다.

그는 구색연화가 뭔지 설명하지 않았다. 위연의 식견으로는 구색연화를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위연은 허칠안이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박학다식한 사람 중 하나였다. 공부벌레 회경도 그한테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한 알로 족하네. 내가 천유더러 도와주러 가라고 할 것이야. 하지만 그 한 명뿐이네. 다른 야경꾼은 없을걸세.”

위연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즉시 일어서서 먼 경치를 조망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어디에 있는가?”

“검주입니다.”

“검주라…….”

위연이 침음하더니 말했다.

“잠시 후에 무림맹 자료를 가져와 자네에게 주겠네. 구색연화가 여물면 검주 악질 토호인 무림맹은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걸세. 심지어는 쟁탈하러 나설 것이야.”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인 뒤 물었다.

“위 공, 소항이라는 자에 대해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소항…….”

위연은 눈살을 찌푸리고 몇 번 되뇌더니 말했다.

“기억에 있는 듯하다만 바로 떠오르지는 않는구먼. 이 자는 뭐 때문에 묻는가?”

“그는 정덕 29년 진사로 원경 14년, 강주 지부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횡령 및 뇌물 수수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그는 제 친구의 부친인데 제가 그녀에게 약속했습니다. 그녀를 도와 부친 참형의 진상을 밝히겠다고 말이지요.”

허칠안이 말했다.

“무슨 문제가 있는가?”

위연이 반문했다.

횡령 및 뇌물 수수로 참수형을 당한 고관은 그다지 희한할 게 없었다. 매번 경찰 때마다 비슷한 고관이 실각했기 때문이다.

“제가 은밀한 경로로 알아보았는데 이 사람을 왕당, 조국공 그리고 여러 훈귀 종친이 손을 잡고 쓰러뜨렸습니다.”

허칠안이 말했다.

위연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자네 정보가 틀렸네. 나는 이십여 년 전에 이런 인물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지 않네.”

‘위, 위 공이 모른다…….’

허칠안은 눈동자가 약간 수축되었다. 그는 머릿속에 순간 생각이 들끓었다.

그는 마치 무언가를 쥔 것처럼 머릿속에 영감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으나 결국에는 우선 침묵하기로 했다. 그는 더 많은 단서를 수집하고, 더 많은 짐작이 생길 때까지 기다렸다가 위연과 다시 의논할 작정이었다.

“위 공, 저 당안고에 가서 이 자의 자료를 좀 찾아보고 싶습니다.”

“좋네. 내가 자네에게 친서를 주지.”

* * *

3일의 약속이 곧 다가왔다. 주루 별실 안, 허칠안이 일각을 기다리자 진 총포두와 대리사승이 잇따라 들어왔다. 두 사람은 평상복을 입고 간단한 위장을 하였다.

대리사승이 품속에서 권종 두 부를 꺼내 허칠안에게 건넸다.

“한 부는 원경 14년 것이고, 다른 한 부는 원경 15년 것이네.”

허칠안은 이 권종을 펼쳐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원경 14년 권종: 동각 대학사 소항, 뇌물을 받고 구휼 식량을 착복한 부하를 은폐하여 아사한 이재민이 셀 수 없음에 강주로 좌천하는 바이다.

원경 15년 권종: 동각 대학사 소항, 마찬가지로 뇌물을 받았기에 어전에 고발당하였고, 조정에서 사실관계를 철저하게 조사한 후 참수형에 처하는 바이다.

‘소항이 동각 대학사라니……. 조국공 밀서에 쓰여 있던 게 소당(蘇黨)인가?’

허칠안은 권종을 대리사승에게 돌려준 다음, 돌아서서 진 포두가 건넨 권종을 또 보았다. 두 개는 별 차이가 없었다.

“시승 대인, 대인께서는 조정에서 벼슬하신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허칠안은 술잔을 들어 의사를 표했다.

“스물다섯 해 되었네.”

대리사승 역시 술잔을 들고 한 모금 꿀꺽 마셨다.

“그럼 대인께서는 왜 동각 대학사 소항에 대해 인식하고 계시지 않는 겁니까?”

허칠안이 질문을 던졌다.

대리사승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그는 술잔을 든 채 멍하니 있었다.

‘맞다, 나는 왜 동각 대학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나는 왜 소항이라는 인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지?’

허칠안은 더 묻지 않았고,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는 두 사람의 시중을 들었다. 이 시대에는 음주 운전을 고려할 필요도, 운전하려면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하는 규칙을 고려할 필요도 없었다. 그가 의지할 곳 없이 만취한다고 해도, 암말 위에 엎드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암말은 그를 등에 업은 채 다그닥다그닥 허부로 돌아갈 수 있었다.

허칠안은 술을 양껏 먹고 밥을 배불리 먹은 후, 대리사승과 진 포두를 배웅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별실을 열고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허칠안은 약간 취기가 올라 의자에 누웠다. 그는 한 손을 탁자에 걸친 채 손가락으로 리드미컬하게 탁자를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대리사와 형부에는 권종이 있는데 유독 야경꾼 관아에만 없다. 시간에 근거하여 미루어보면 그때는 위 공이 아직 야경꾼 관아를 장악하지 않았다. 그가 진정으로 집권하기 시작한 건 산해관전역 이후……. 그리고 소항이 23년 전에 죽었고, 산해관전역은 20년 전에 발생했다. 소항은 동각 대학사인데 대리사승, 위 공이 이 사람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들뿐만 아니라 내가 조국공 영혼한테 다시 물었는데 그 역시 소항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밀서 안에 희한하게 사라진 그 글자도 연상된다…….’

허칠안의 머릿속에 네 글자가 떠올랐다. 천기 차단.

무의식적으로 든 그의 생각은 이러했다. 이 일이 감정과 관련 있는가?

하지만 이 추측은 증거가 부족하고, 상응하는 논리가 부족한 듯했다……. 그는 생각하다가 긴 의자에 기대어 졸았다.

* * *

일각 후, 그는 정신이 돌아왔다.

“잉? 내가 잠이 들었다고? 대리사승과 진 포두는 갔나?”

허칠안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일어섰다.

“소항 이 사건은 정말 번거롭다. 조금의 단서도 없잖아. 진작 알았으면 소소한테 약속하지 않았을 텐데. 사실 그녀가 너무 예쁘지만 않았어도 머리 쓰기 귀찮았을 텐데 말이야…….”

그는 마치 방금 일어난 모든 일을 잊은 듯 기지개를 켜고 별실을 나섰다.

* * *

늙은 태감이 해 질 무렵의 침전 안에서 팔오금 사이에 총채를 끼고 높은 문턱을 넘어 빠른 걸음으로 침전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원경제는 막 떡을 먹고 약 기운을 빌어 가부좌를 틀고 토납하던 중이었기에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늙은 태감은 더는 방해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가 꽤 조급해하며 한참을 기다리니, 마침내 원경제가 토납을 끝내고 눈을 뜨고 담담하게 말했다.

“무슨 일인가?”

늙은 태감은 소매 속에서 종이를 꺼내 원경제에게 건넸다.

원경제가 받아서 종이를 펼치고 보았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구색연화가 만물을 점화시키겠군…….”

원경제는 종이를 거두고 분부했다.

“위연에게 나를 만나러 입궁하라고 통지하거라……. 아, 그럴 필요 없다.”

늙은 황제는 막 인생의 ‘기복’을 겪은 참이니 만큼 한참을 침음하더니 말했다.

“회왕의 밀정에게 즉시 검주로 가서 구색연화를 쟁취하라고 통지하거라. 지종 도사와 협조해도 된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덧붙였다.

“가능한 한 법기를 많이 챙겨라.”

늙은 태감은 허리를 굽히고 물러났다.

* * *

검주는 아직 대봉의 서북 지역에 위치하지 못했다. 서쪽은 뇌주에 인접했으며 북쪽은 강주에 닿아 있었다. 동시에 검주로 운송하는 경로가 두 갈래 있었기에 아름다운 경치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검주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은 독특한 지역 문화였다. 무림맹!

역대 왕조는 항상 강호 조직으로 하여금 투항하게 하거나 그들을 탄압하곤 했다. 말을 잘 듣는 이들은 투항하게 하고, 말을 듣지 않는 이들은 탄압하거나 철저히 토벌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해야만 왕조 통치를 유지하고 태평성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늘 예외가 있는 법이었다.

검주의 무림맹이 바로 어느 정도는 조정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호 조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검주는 탄탄한 무도 문화를 지닌 만큼 파벌이 즐비했다. 그중에는 어떤 일에도 끄떡없는 ‘백 년 전통의 가게’가 많이 있었다. 이런 파벌은 전부 무림맹 관할이었다.

하지만 이 파벌은 무림맹의 현재 지위를 뒷받침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굳이 여기서 누군가 원인을 꼬치꼬치 캐보고자 한다면 사서에서 찾아야 했다.

대주 말기, 백성들은 안심하고 생활할 수가 없었으며 천하에 뭇 영웅이 반기를 들어 폭정을 뒤집고자 했다. 대봉 황제도 아직 뜻을 이루기 전에는 수많은 반란군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들은 병마 수백을 끌어들여 작은 현 공략을 위주로 한 뒤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그때 반란군 몇 부대는 이미 숙련된 경지에 이르러 어느 한쪽을 할거할 강한 군사력을 갖춘 상태였다.

그중 한 부대가 바로 검주에서 온 이들이었다.

이 검주 반란군의 우두머리는 3품 무사로 전란 시대에 궐기했다. 그는 사방으로 출정했으나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후에 대봉 개국 황제가 궐기하여 폭정을 뒤집는 주력 중 하나가 되었다. 대주가 멸망하자 각지 의병이 중원을 놓고 쟁탈전을 벌였다. 옛 조정은 이미 뒤집힌 뒤였으며, 검주의 그 3품 무사는 더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 대봉 시조에게 도전했다.

이후에 그들은 각자 군대를 승부수로 놓고 무사 간의 의기(意氣) 다툼을 벌였다.

결과는 두말할 것도 없이 검주 3품 무사의 패배였다. 그는 약속대로 군대를 대봉 시조에게 넘긴 뒤, 핵심 부하만 데리고 검주로 돌아와 무림맹을 세웠다.

그 3품 무사는 자취를 감춘 지 이미 수백 년이 되었지만, 무림맹은 여전히 그가 아직 살아 있다고 떠벌렸다. 이게 바로 무림맹의 진정한 저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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