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9화. 연밥이 여무는 시기가 다가오다 (1)
허칠안은 허부에서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곳에 저택을 한 채 샀다. 작은 사합원(四合院)으로 남향에 동쪽과 서쪽에 곁채가 각각 두 칸씩 있었다.
“이 저택은 제가 남의 명의를 빌려 사들인 부동산이니 누군가 조사하지 않을 겁니다. 제 지금 모습도 알아보는 이가 없으니 안심하고 머무셔도 됩니다.”
허칠안은 열쇠를 꺼내 사합원 문을 열고 말했다.
“앞으로 이곳에서 혼자 사십시오. 신분이 민감하니 여종과 어멈을 불러드릴 수가 없어요. 따라서 많은 일을 스스로 익혀서 하셔야 해요. 예를 들면 빨래, 음식, 뜰 청소 같은 것들이요. 물론, 제가 은자를 좀 남겨드릴 테니 이런 육체노동이 힘들어서 싫다면 사람을 쓰셔도 됩니다. 하지만 스스로 할 수 있는 건 가능한 한 스스로 하세요. 내성의 치안은 좋습니다. 낮에는 말할 것도 없고, 저녁에는 야경꾼과 어도위가 순찰하니 안심하고 머무셔도 됩니다.”
왕비는 그가 건넨 열쇠를 받아 손에 쥐더니 대답하지 않았다.
허칠안은 그녀를 쳐다보면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아니면 제가 이틀에 한 번씩 와서 머물까요?”
왕비는 깜짝 놀라 가슴을 감싸며 ‘쿵쿵쿵’ 몇 보 뒷걸음질 쳤다.
‘나는 너랑 자려고 한 말이 아니야…….’
허칠안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더니 설명했다.
“저는 동쪽 곁채나 서쪽 곁채에서 쉬면 되니까요.”
왕비는 이 말을 듣자 침묵했다.
왕비는 그의 말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거절하지도 않았다. 이 저택은 네가 산 것이니 네가 굳이 나와 함께 묵겠다면 연약한 여인인 나는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 * *
왕비는 집으로 들어가 한 바퀴 구석구석 돌아보았다. 그녀는 이 집에 부엌살림, 침구와 가구 등이 모두 갖추어져 있을뿐더러 가구들이 전부 새것임을 발견했다.
심지어 옷장에는 새것도 헌것도 아닌 옷이 몇 벌 있었다.
“이 옷들은 누구 것인가?”
그녀는 기분이 좋아져 약간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제 숙모 거예요. 두 분 몸매가 비슷한 것 같으니 아마 입을 수 있을 거예요.”
허칠안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자네 지금 나더러 다른 사람의 헌옷을 입으라는 건가?”
왕비는 믿기 어려웠다.
허칠안은 걸어와서 방문에 기댄 채 두 팔로 가슴을 감싸고 빈정거렸다.
“침상 밑 궤짝에 최고급 비단이 있으니 직접 옷 몇 벌 하셔도 되고요.”
왕비는 말문이 막혀서는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못 해…….”
‘배워야 할 게 아직도 많다고. 금사조 한 마리가 다시 자유로운 하늘로 날아오르려면 반드시 독립하는 법을 배워야 해.’
허칠안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망연자실한 그녀의 기분을 상대하지 않고 손을 저었다.
“우물에 가서 물 한 통 길러보세요. 힘을 좀 봐야겠어요.”
* * *
왕비는 흥미가 생겨 그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우물가에 와서 물을 길으려고 시도를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너무 무거워서 못 들겠어.”
허칠안은 그녀에게 물통을 작고 정교한 나무통으로 바꿔 주었다. 물 한 통은 세숫대야 반 정도 무게였기에 허영음도 들 수 있을 만큼 가벼웠다.
왕비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역시나 들어 올렸다.
“아, 통이 우물에 빠졌어.”
왕비는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통에 달린 끈마저 우물에 떨어뜨렸다. 그녀는 애꿎은 허칠안을 쳐다봤다.
“왜 피해자의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는 거죠?”
“그게 우물 안으로 떨어질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이건 마마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깨닫지 못했거나 애꿎은 눈빛으로 애교를 부려 저의 용서와 관용을 얻고자 함을 의미하지요.”
“나, 나는 애교부리지 않았어.”
왕비는 인정하는 대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럼 어떡해?”
“이 순간, 마마에게는 남자가 필요하지요.”
허칠안은 손바닥을 벌리고 기기를 운행하여 나무통을 빨아올렸다.
‘남자가 필요하다라…….’
왕비는 화를 내며 반박했다.
“나는 지금 과부잖아. 나는 남자가 없다고.”
이 화제는 깊이 들어가기에 적합하지 않은 문제였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았기에, 허칠안은 화제를 딴 데로 돌렸다.
“서재 안의 책은 한가할 때 보시면 됩니다. 시간 때우는 데 좋아요.”
왕비가 입을 떼 거절하기 전에 허칠안이 덧붙였다.
“안심하세요. 전부 심심풀이로 읽는 화본입니다.”
왕비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럼 흥미가 생기지.”
책을 보는 일은 전혀 급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방에서 나무 대야를 옮겨와 혼자의 힘으로 우물에서 물을 길었다. 그런 뒤 그녀는 허칠안 숙모의 옷을 꺼내 몽땅 나무 대야 안으로 던져 버렸다.
그녀는 서툴게 옷을 빨았다.
허칠안은 우물가에 앉아 풀 한 가닥을 입에 문 채, 예전 진북왕비이자 대봉제일 미인이 나무 걸상에 앉아 열심히 빨래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소매를 걷어 올려 희고 보드라운 팔을 드러냈다. 보리 팔가락지가 그녀의 경국지색 미모를 가렸지만, 무심코 드러나는 기질은 언제나 매혹적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결코 외모에 국한되지 않았다.
“자네는 언제 경성을 떠날 계획인가?”
왕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듯 물었다.
“제가 경성을 떠나려고 하는지 어떻게 아시지요?”
허칠안은 반문했다.
“비록 내가 그와 함께 지낸 시간이 길지 않지만, 그의 사람 됨됨이는 어느 정도 안다네. 우쭐대고 자부심이 강하니 자네를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거야. 지금 보복하지 않는 건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지. 만약 그가 여기서 손을 놓을 거라 여기면 아주 처참하게 죽을 것이야.”
왕비는 이마를 쓸어 올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게다가 아주 여색을 좋아하지. 처음에 내가 궁에 들어왔을 때 말이야, 그는 처음으로 나를 보고는 사람이 다 멍해졌네. 그때 나는 알았지. 설사 황제라고 해도 평범한 속인과 별반 다를 거 없다고 말이야.”
‘마마의 얼굴값을 너무 높게 생각하시네요. 그렇게 치자면 황제뿐만 아니라 우신(雨神)도 마마의 아름다움을 차지하고 싶겠네요…….’
허칠안은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그럼 자네가 경성을 떠날 때 나를 데리고 갈 수 있나?”
그녀는 조심스럽게 떠보았다.
“데리고 가지 않을 겁니다.”
허칠안은 불쾌해했다.
왕비는 ‘아’하고 소리 내더니 고개를 숙이고 계속해서 옷을 문질러 빨았다. 허칠안은 고개를 치켜들고 쪽빛 하늘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었다. 그때 거품이 섞인 더러운 물이 얼굴에 뿌려졌다.
나쁜 선례를 만든 자는 포복절도하였다.
허칠안이 매서운 눈길로 노려보았으나 그녀는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도발하듯 아래턱을 치켜올렸다.
* * *
어느새 해 질 무렵이 되었다. 허칠안과 왕비는 손을 잡고 겨우 삼킬 수 있을 정도의 음식을 만들었다.
그는 저녁 식사를 마친 뒤 그녀의 의사를 떠보았다.
“야간 통행금지입니다. 저, 음, 저 오늘 가지 말까요?”
왕비는 대답 없이 뒷정리에만 신경 썼다.
“저기요?”
허칠안이 소리쳤다.
“남든 말든 나한테 물어서 뭐하겠는가. 나는 연약한 여인인데 자네를 내쫓을 수나 있는가?”
그녀는 극성스럽게 대답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태도를 충분히 보였다.
* * *
검주의 산을 끼고 물 가까이에 있는 어느 산장이었다. 정자와 다리 아래로 물이 흘렀다.
각루는 정교하게 세워져 있었다. 석가산, 화원, 푸르른 나무가 돋보여 경치가 수려하였다.
산장 안뜰에는 한기를 내뿜는 못이 있었고, 못에는 구색 꽃봉오리가 자라나 있었다. 빨, 주, 노, 초, 파, 남, 보, 금, 은…….
금련 도사는 밤의 연못가를 천천히 거닐었다. 장포는 하얗게 색이 바랬으며 희끗희끗한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온화하면서도 반짝이는 눈빛으로 연못의 꽃봉오리를 묵묵히 응시했다.
이 산장은 검주 부잣집 상인의 집이었다. 여러 해 전에 그 부호가 곤경에 빠져 나쁜 놈에게 추격당했는데 마침 지종의 어느 도사가 그를 구해 주었더랬다.
그는 감사를 표하기 위해 이 산장을 도사에게 증여하였다.
후에 이 산장은 지종 수선파(修善派)의 비밀 거점이 되었다. 이제 이곳은 천지회 본부이기도 했다.
산장 안에는 지종 도사가 총 36명 있었다. 금련을 제외하고도 4품 강자인 백련(白蓮) 도사가 있었다.
나머지 제자들의 수련 경지는 같지 않았다.
금련 도사는 제자 일부를 이끌고 여기까지 도망쳐 와 섣불리 공격하지 않고 기회를 엿보았다. 그들은 장포를 갈아입고 호미를 들었다. 그들은 겉으로는 산장의 하인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큰일을 위해 치욕을 참는 도사였다.
금련 도사는 심사숙고하여 이곳으로 거점을 택했다. 검주는 대봉 무도의 성지이자 유일하게 ‘무림맹주(武林盟主)’가 있는 주(州)였다.
다른 12개 주는 파벌이 즐비하지만, 오합지졸 같았다. 하지만 검주의 무림 전체는 하나였다.
검주 강호를 통치하는 이들이 바로 무림맹(武林盟)이었다.
현지 관아조차도 그들에게는 정중하게 굴어야 했고, 조정조차 그 지위의 조직을 인정해야 했다. 물론 무림맹은 절대 힘으로 금령을 범하는 사도 조직이 아니었다.
반대로 무림맹의 존재는 검주 강호의 질서를 대대적으로 개선하였다. 이제 그들은 진정으로 강호의 일을 강호 수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금련 도사가 거점을 이곳으로 선택한 이유는 질서가 완벽했고 충분히 강한 강호 조직이 있었으며 지종 요도의 침투를 효과적으로 억제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연못 물이 갑자기 들끓기 시작했다. 기포가 꾸르륵하면서 한기가 연무처럼 피어올랐다.
구색 꽃봉오리가 갑자기 살아났다. 빨, 주, 노, 초, 파, 남, 보, 금, 은…… 차례로 반짝이고, 노을빛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은 마치 호흡하는 듯했다.
노을빛이 수십 차례 오르락내리락한 후 꽃봉오리가 진동하더니 수백 장(丈) 높이의 노을빛이 솟구쳐 어둠을 밝혔다.
수십 리 밖에서도 고개를 들기만 하면 유달리 아름다운 노을빛을 볼 수 있었다.
“구색연화는 매번 여물기 직전에 노을빛을 내뿜는군요. 아무리 해도 감출 수가 없어요.”
이때 흰색 긴 치마를 입고 젊은 부인 차림을 한 유순한 여인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다가왔다. 그녀는 금련 도사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서서 밤하늘에 천천히 사라지는 노을빛을 조망했다.
“흑련은 틀림없이 눈치챘을 겁니다. 숨길 수가 없어요. 종주(宗主), 적합한 조력자를 찾으셨습니까?”
젊은 부인은 노심초사했다.
금련 도사가 웃으며 반문했다.
“그대는 적합한 조력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도호(道號)가 백련인 젊은 부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인종 도수 낙옥형이지요.”
금련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흑련의 업화를 두려워하기에 그를 적으로 삼지 않을 거야. 구색연화는 그녀가 목숨을 내던질 정도는 아니야. 게다가 나 역시 당분간은 그녀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보수를 주지 못하고 말이야.”
‘허칠안을 그녀의 침상으로 보내지 않는 이상…….’
금련 도사는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낙옥형은 쌍수 도려(道侶)의 후보자를 아주 중요시했기에 지금은 아직 결심할 수가 없었다. 아마 그녀는 아직도 허칠안을 고려하는 듯했다.
젊은 부인 백련은 잠깐 생각하더니 종주의 평온한 표정을 보자 확신이 생긴 듯 버들눈썹을 치켜올렸다.
“설마 천지회 구성원을 움직이고 싶으십니까? 하지만 그들이 성장하기 전에, 흑련을 없앨 수 있다는 충분한 확신이 있기 전에는 그들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을 거 아닙니까?”
“그들의 성장은 내 상상을 뛰어넘네.”
금련 도사가 설명했다.
“그들이 정확히 누구입니까?”
백련은 호기심에 차 반짝이는 눈동자를 깜박였다.
“그들이 검주에 오면 알 수 있을 걸세.”
금련 도사는 뜸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