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7화. 버려진 왕비 (1)
세 사람은 허부로 돌아왔다. 소소는 마침 용마루 위에 앉아 눈부시도록 붉은 종이우산을 쓴 채 경치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마당 안, 배불리 먹고 마신 허영음은 그럴듯하게 권법을 연마하며 기혈을 단련했다. 그녀는 더빙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아이쿠, 아이쿠!
그녀는 옅은 두 눈썹을 치켜세우고 험상궂은 모습을 했다.
저채미와 리나는 옆에서 잡담을 나누며 겸사겸사 지도를 했다.
소소는 옥마루에 앉아 그 광경을 구경했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 그녀의 치맛자락을 휘날렸다. 그녀는 마치 속세를 떠난 선녀처럼 매우 신비로웠다.
이묘진은 마당에 서서 고개를 들고 손짓했다.
“소소, 내려와. 네게 할 말이 있어.”
“네!”
소소는 아름답게 웃더니 가뿐하게 착지했다.
콩알이는 소소를 가리키며 리나와 채미에게 말했다.
“나도 이거 배울래요.”
“너는 안 돼. 너는 너무 뚱뚱해.”
리나와 채미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콩알이는 화가 나 그녀들을 상대하지 않고 달려가 큰 오라버니의 다리를 껴안았다.
“큰 오라버니, 나 뚱뚱해요?”
허영음은 큰 오라버니한테서 자신감을 되찾고자 했다.
“뚱뚱하지 않아. 너는 지방간이야.”
허칠안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귀염둥이고, 저는 큰 오라버니의 지방간이에요. 맞지요?”
허영음은 여전히 이 대화를 기억했다. 예전에 큰 오라버니가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맞아, 맞아.”
콩알이는 리나와 저채미 옆으로 돌아가서 큰 소리로 선포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귀염둥이고, 저는 큰 오라버니의 지방간이에요.”
“조용히 해!”
방에서 나온 숙모는 부끄러운 나머지 얼굴과 귀가 빨개졌다. 그녀는 닭털로 만든 먼지떨이를 들고 온 마당에서 허영음을 때리러 쫓아다녔다. 하지만 그녀는 허영음을 쫓아갈 수 없었다…….
숙모는 화가 나서 빽빽 소리 질렀다.
허칠안 등은 방으로 들어갔다. 이묘진은 소소를 탁자 가장자리에 앉히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부친이 참수당한 것과 관련된 단서를 찾았다.”
그는 소소의 연약한 몸이 떨리는 걸 볼 수 있었다. 미소를 머금은 입가가 천천히 평평해지고, 활발하고 날렵한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뒤이어 그녀의 눈동자에 비참함과 막연함이 스쳤다.
그녀는 물안개가 덮인 듯한 눈으로 허칠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인께서 조사하셨나요?”
허칠안은 준비해온 밀서를 꺼내 책상 위에 두었다.
소소는 지체할세라 펼쳐서 반복해서 여러 번 읽었다. 그녀 눈에 글썽이는 눈물이 더욱 진해지는 듯했으나 아무리 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글썽이는 눈물에는 일종의 감정적인 색채가 드러났지만 진실하지는 않았다.
귀신이 어찌 울겠는가. 맞다, 그녀는 가족을 위해 흐느끼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내, 내 부친이 어찌 이렇게 많은 적을 건드릴 수가 있지? 이, 이건 불합리해.”
소소는 슬퍼했다.
“우리가 경성에 온 목적 중에 네 집안 사건을 조사하는 것도 하나야. 마음 놓아. 내가 너 대신 그해 그 사건을 확실하게 조사할게.”
허칠안은 공수했다.
“그럼 비연 여협객이 있으니 조용히 기쁜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이묘진이 즉시 고개를 돌리고, 분을 바른 얼굴로 화를 내며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녀는 당연히 소소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얘기했을 뿐이었다. 이런 일을 어디 그녀만 믿을 수 있겠는가. 이 일은 틀림없이 허칠안이 주도해야 했다.
허칠안은 그녀가 주제넘게 나서는 걸 차마 볼 수 없어서 괜히 심통을 부리는 거였다.
“허 은…… 허 공자, 부탁하네.”
이묘진은 입을 삐죽거렸다.
“본래 여러분께 약속했던 것이지요. 다만.”
허칠안은 곤란한 기색을 드러냈다.
“나는 본래 작은 사건이라 겸사겸사 되는 일인 줄 알았소. 하, 하지만 이렇게 깊이 연루되었는지는 생각지 못했소. 게다가 나는 지금 이미 은라가 아니기에 사건을 조사하는 데 곳곳에서 제한을 받아 아마도…….”
소소는 표정이 약간 변했다.
“번복하고 싶어요?”
허칠안이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아니, 기한을 늘려야 해.”
종리와 이묘진은 순간 반응하지 못했지만, 소소는 알아듣고 머뭇머뭇 고개를 숙이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얼, 얼마나요?”
허칠안은 뜸을 들였다.
“나중에 얘기하자.”
그는 소소가 정말 승낙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방금 그는 그저 농염한 여자 귀신을 놀려주려고 허풍을 떨었을 뿐이었다.
그가 마침 말을 하려는데, 마당에서 문지기 장씨가 다소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랑, 대랑 관부 사람이 왔습니다…….”
이묘진은 소리를 듣고 눈썹을 비틀더니 탁자 위의 비검을 쥐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 * *
허칠안이 그녀를 따라 문을 나서자 마침 세차게 저택으로 진입하는 한 무리의 병마가 보였다. 선두에는 금군 통솔자 갑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있었고, 십여 명의 무장 병사가 그의 뒤를 따랐다.
이밖에 야경꾼 몇몇이 수행하고 있었다. 은라 이옥춘, 동라 송정풍과 주광효였다.
본디 기세등등한 금군 통솔자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안뜰을 훑어보았다. 사천감 저채미, 종리, 천인 양종의 이묘진과 초원진…….
그는 눈빛이 살며시 부드러워졌다.
허칠안은 이옥춘 세 사람과 눈빛을 마주치다가 시선을 피했다. 그들은 긴 교류를 나누지 않았다.
그 금군 통솔자가 한 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목소리를 높였다.
“허칠안, 폐하의 뜻을 받들게. 왕비마마가 납치당한 일을 물을 것이니 협조하길 바라네.”
‘원경제가 왕비한테 아주 마음을 쓰는군. 이렇게 민감한 시기에도 여전히 사람을 파견해 나를 조사하다니. 이는 그가 왕비를 아주 중시한다는 걸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잘 대응해야겠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의 평화를 깰 가능성이 있다. 만약 내가 왕비를 몰래 숨겼다는 사실을 원경제가 알면, 틀림없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허칠안은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장군께서는 무얼 묻고 싶으십니까?”
금군 통솔자가 나지막이 말했다.
“번거롭겠지만 허 공자 저택의 모든 사람을 소집하게. 또한, 이곳은 말할 장소가 아니니 대청에 들어가 얘기하지.”
* * *
허칠안은 즉시 문지기 장씨에게 저택의 하인을 소집하게 한 뒤, 금군 통솔자와 이옥춘 그리고 송정풍, 주광효를 데리고 내청으로 들어왔다.
하인들을 모두 안뜰에 불러모았기에 차를 내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허칠안은 주인석에 앉아 무표정으로 금군 통솔자를 쳐다보았다.
‘이게 무슨 태도인가. 정말이지 시건방지군…….’
금군 통솔자는 그를 쳐다보더니 정색했다.
“왕비마마가 납치당한 경위에 대해 폐하께서는 이미 사절단에게 들으셨다. 하지만 일부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지 못하니 허 공자가 사실대로 알려주게.”
허칠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자 금군 통솔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회왕부에 돌려보낸 여종의 묘사에 따르면 왕비마마가 납치당한 후, 허 공자가 오랑캐의 우두머리 넷을 쫓아갔다고 하던데 이런 일이 있었는가?”
허칠안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금군 통솔자가 캐물었다.
“나중에는?”
“나중에는 당연히 도망쳤지요. 설마 장군께서는 6품 무사인 제가 4품 강자 넷과 대적할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설령 저한테 유가에서 준 마법서가 있다고 해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허칠안은 반문하는 어조로 말했다.
금군 통솔자는 전혀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일단 묵인한 셈이었지만, 완전히 믿지도 않았기에 눈을 가늘게 뜨고 캐물었다.
“자신이 적수가 아닌 걸 알면서 허 대인은 왜 쫓아가려 했는가?”
허칠안은 평소와 같은 얼굴로 말했다.
“저도 당시에 지키고 있는 4품 강자가 한 명 더 있는지 몰랐습니다. 쫓아간 건 그저 신하의 본분을 다하여 왕비마마를 구해서 돌아올 기회가 있는지 없는지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안 되는 일이라는 걸 판단했으니 당연히 멈출 수밖에요.”
‘신하의 본분을 다한다라? 조정 전체에에서 네가 가장 사람 구실을 못 하는데…….’
금군 통솔자는 몇 초 침묵하더니 갑자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여태껏 자네에게 왕비가 아직 살아 있다고 알려준 자가 없었나 보군? 여종의 묘사에 따르면 그때 ‘왕비’는 이미 사요 홍릉 손에 죽었다고 했는데 허 대인은 왕비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허칠안이 도착했을 때, 가짜 왕비는 이미 죽은 뒤였다.
사절단은 왕비가 납치되어 행방이 묘연하다고 보고했다. 그건 그들이 이 광경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칠안은 그때 이 광경을 똑똑히 보았다. 이치대로라면 그의 인식 속에 왕비는 이미 죽었었다.
지금 허칠안은 왕비가 아직 죽지 않은 일에 대해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이는 무슨 의미인가?
금군 통솔자의 물음에, 허칠안은 마찬가지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여태껏 그 여인이 가짜 왕비라는 사실을 제가 모른다고 장군께 알려준 자가 없었나 보군요.”
금군 통솔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허칠안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당시 저상룡이 사절단을 버리고 혼자 도망쳤는데 그는 ‘왕비’를 짊어졌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시위에게 여종을 업고 같이 도망치라고 했습니다. 허허, 저상룡은 결코 선한 자가 아닙니다. 만약 이럼에도 제가 진짜 왕비가 여종 틈에 섞여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다면 대봉 제일의 신포(神捕)라는 명성은 실력 없이 얻은 것 아니겠습니까?”
금군 통솔자는 멍해졌다. 그는 허칠안의 말에 반박할 힘이 없었다. 심지어 그는 마땅히 그러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만약 가짜 왕비가 허칠안을 속일 수 있다면, 그는 전기적인 신포가 아니었다.
이때 한 금군이 내청 입구로 걸어와 공손하게 말했다.
“대인, 이미 조사를 마쳤습니다.”
금군 통솔자는 즉시 일어서서 말했다.
“이만 가보겠네.”
그는 이옥춘 세 사람은 보지도 않고 곧장 병사들을 데리고 떠났다.
내청 안에는 옛 동료와 지난날 감정이 두터운 네 사람만이 남았다. 그들은 순간 이야깃거리를 찾지 못해 서로 침묵했다.
한참 지난 뒤, 이옥춘이 일어서자 허칠안이 황급히 따라 일어섰다. 춘 형이 그의 앞으로 걸어가 잠시 살피더니 손을 뻗어 그 대신 가슴팍의 주름을 평평하게 잡아주며 담담하게 말했다.
“옷에 주름이 있으면 체면이 서 보이지 않네. 이런 작은 일은 자네 스스로 처리하는 걸 명심하게.”
그는 말을 마친 뒤 목소리를 낮추었다.
“잘했네. 나는 자네가 자랑스러워.”
“대장…….”
허칠안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옥춘은 손사래를 치고 송정풍과 주광효를 쳐다봤다.
“칠안, 우리 하루빨리 경성을 떠나자고.”
송정풍은 두 팔을 벌려 그와 포옹하며 귓가에 목소리를 낮추었다.
“폐하께서 자네를 가만두지 않을 걸세.”
주광효가 묵직하게 말했다.
“경성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말게. 우리 형제 셋이 어쩌면 다시 만날 날이 없을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그래도 좋네. 어쨌든 목숨이 날아가는 것보다는 낫잖나.”
허칠안은 입을 벌리고 씩 웃었다.
“당분간은 가지 않을 걸세. 나중에 시간 있으면 기루에 가서 노래를 듣자고. 내가 한턱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