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5화. 소환 (3)
허칠안과 종리는 소원(小院)으로 돌아왔을 때 마당 안에 분위기가 다소 경직되었다는 걸 눈치챘다. 이묘진은 나무 걸상 위에 앉아 있었는데 총명한 얼굴이 좀 멍했으며 눈동자가 흐트러진 상태였다.
그녀는 마치 실연당한 아이처럼 의기소침하게 풀이 죽어 있었다.
초원진은 끝내 칼집 밖으로 나오지 못한 검을 감싸 안고 무표정으로 벽에 등을 기댔다. 하지만, 관자놀이에 툭툭 튀는 핏대가 그를 배반했다.
“여러분, 기분 나쁜 일을 마주한 것 같습니다?”
허칠안은 두 동료를 살폈다.
두 사람은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허신년이 탄식했다.
“초 협객과 이 도사께서 굳이 영음에게 글자와 산수를 가르쳐야겠답니다.”
허칠안은 깜짝 놀라 두 사람을 향해 공수했다.
이묘진은 허칠안이 자신을 비웃었다는 생각에 돌을 쥐고 꽝 내리쳤다.
* * *
점심 식사 후, 허칠안은 가족들을 데리고 허부로 돌아왔다. 허신년은 마차 세 대를 빌려 외성으로 가 가노들을 소집하여 돌아왔다.
하인들이 돌아오자 숙모는 그들에게 청소하라고 지휘하였다.
허칠안은 용마루 위에 앉아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 하인들을 보면서, 초원진과 허신년이 경전과 이치를 논하는 걸 들었다. 두 사람은 각자 학식을 과시했다.
내청 안, 저채미가 계월루의 최상급 떡을 가져왔다. 리나와 허영음은 그녀와 마음껏 먹기 시작했다.
이묘진은 객실 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도를 닦았다. 소소는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무명 장포를 걸친 종리가 무릎을 감싸 안은 채 얌전히 있었다.
‘설령 원경제가 보복하려고 한다 해도 대군을 파견해서 둘러싸지 않는 이상, 허부의 현재 전력치라면 정말 암살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겠군.’
허칠안은 속으로 말했다.
‘금련 도사의 연밥이 여물면, 우리는 경성을 떠나야 한다. 그때 가면 양천환과 저채미에게 집을 돌봐달라고 해야겠다. 감정이 내게 허부를 비호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도 나를 궁 안으로 몰아넣어 맨손으로 원경제 모가지를 베어 죽이라고 압박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여기에 앉아서 움직이지 마세요. 저는 귀한 손님을 만나러 방에 들어갈 겁니다. 그녀가 가면 내려오세요.”
허칠안은 돌아서서 종리에게 당부했다.
종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 * *
허칠안은 즉시 용마루를 뛰어내려 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문과 창을 닫고 지서 파편을 꺼내 부검(符劍)을 쏟아냈다.
이 부검은 북행할 때, 낙옥형이 초원진에게 책임지고 그에게 주라고 했다.
허칠안은 지금까지도 착한 이모가 그에게 이걸 선물한 이유가 친분을 맺자는 뜻이었는지 아니면 금련 도사가 그 대신 부탁한 일이었는지 잘 알지 못했다.
허부로 돌아오기 전에 그는 지서 파편으로 금련 도사에게 연락했다. 그를 통해 낙옥형이 반은 자신의 사람이니 적당히 믿어도 된다는 걸 확인했다.
금련 도사는 부검이 전서 역할을 할 수 있으니 낙옥형과 연락이 될 거라고 말했다. 그는 직접 황성으로 갈 필요가 없었다.
그는 부검을 꽉 쥐고, 원신을 동원해 정신력을 한 가닥 투입한 뒤 목소리를 낮추었다.
“국사, 국사, 저 허칠안입니다…….”
혼단 일을 제대로 파악하는 게 비교적 나았다. 그렇지 않으면 늘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또한 낙옥형에게 원경제가 부리는 간교한 계책을 방비하라고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했다.
‘내친김에 절세미인의 호감도를 끌어올려 장차 낙옥형도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대빵이 되도록 쟁취해야겠다. 아주머니, 저 더는 노력하고 싶지 않아요…….’
그는 잠시 반복해서 되뇌었지만, 부검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국사가 나를 상대하고 싶지 않은가보군. 역시나 필경 나의 신분과 지위가 너무 낮다. 낙옥형처럼 신분이 고귀하고, 수련 경지가 강한 사람의 눈에는 아직 멀었지…….’
허칠안은 허탈했다.
그가 막 포기하려던 참에 갑자기 금빛 기둥이 하늘에서 내려와 지붕을 뚫고 방 안으로 강림했다.
금빛 기둥에서 아리따운 모습이 응결되었다. 그녀는 머리에는 연화관을 썼으며 몸에는 장포를 걸쳤다. 그녀는 미간에 짙은 붉은색의 주사(朱砂)가 있었으며 이목구비가 빼어났다.
그녀는 선량한 이모의 지성과 엄마 친구의 아름다움 그리고 옆집 여자아이의 고움을 겸비하고 있어 알 수 없는 감동을 자아냈다.
‘정말 왔네?’
허칠안이 놀라 기뻐하기도 전에 갑자기 처마에서 기와가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한 사람 형체가 처마에서 굴러떨어지더니, 빠직 하는 소리와 함께 마당 안으로 묵직하게 떨어졌다.
종리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어기적어기적 기어 일어나더니 말없이 가버렸다.
낙옥형은 문득 모든 걸 깨달았다.
“자네 지붕에 어째 사람이 있는가? 너무 빨리 와서 신경 쓰지 못했네.”
“…….”
‘아니, 신경 쓰지 않은 게 아니라 운명이 너한테 애써 그녀를 등한시하라고 한 거야. 가엾은 종 사저…….’
낙옥형은 선녀처럼 도도하게 맑은 눈을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았는가?”
‘뜻밖에 국사가 정말 왕림하다니. 게다가 본체가 직접? 금련 도사가 이렇게 체면이 서다니…….’
허칠안은 금련 도사의 체면이 서는 데 감개무량하면서도 과분한 대우에 한편으로 불안감을 느끼며 예를 갖췄다.
“국사를 뵙습니다.”
그는 다시 낙옥형을 살필 때 어딘가 다른 점을 발견했다. 영보관에서 만난 낙옥형은 아름답기 그지없었지만, 여전히 사람의 몸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 보이는 여자 국사는 온몸에서 거룩한 빛을 내뿜었다. 굳이 형용하자면 대략 ‘얼음 같은 피부에 옥 같은 몸매’가 가장 좋은 표현인 듯했다.
낙옥형은 그를 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이건 양신(陽神)이네.”
‘양신이라……. 도문 3품의 양신? 광풍과 우레를 두려워하지 않고, 크고 넓은 하늘을 노닌다는 전설 속의 양신?’
허칠안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마치 판다를 둘러싸고 구경하는 듯 눈을 떼지 못했다.
낙옥형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고,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 노한 기색이 스쳤다.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를 무슨 일로 소환했는가?”
허칠안은 자신의 시선이 무심코 국사를 기분 나쁘게 했다는 점을 눈치챘다. 그는 황급히 옷깃을 바로 하고 단정하게 앉은 뒤, 곁눈질하지 않고 나지막이 말했다.
“국사께 말씀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헤아려 보았다.
“초주 백성 대량 학살 사건에서 원경제와 회왕이 공모하여 한 사람은 혈단을 정제하고, 다른 한 사람은 혼단을 정제했습니다. 회왕이 혈단은 정제한 건 3품 대원만에 충격을 가한 뒤 왕비의 영온을 삼키기 위함입니다.”
그는 이미 사이가 틀어졌다는 생각에 일부러 티를 내며 ‘폐하’라고 호칭하지 않았다. 버젓한 2품 도수라는 자가 왕비가 몸에 영온을 감추고 있다는 비밀을 모를 리가 없었다.
“제가 알고 싶은 점은 원경제가 혼단을 정제하여 어디에 쓰려는지 입니다.”
낙옥형은 이 말을 듣자 미간을 찌푸렸고, 몇 초 동안 침음하더니 천천히 말했다.
“원경제는 20년간 도를 닦아 이제 곧 6품 음신경(陰神境)에 이르네. 결단(結丹)은 기약할 수가 없네.”
‘이, 이건……. 20년간 도를 닦았는데 여전히 6품이라니. 나는 어떻게 빈정대야 할지도 모르겠네. 나라를 세운 힘의 자원이 설령 돼지 한 마리라고 해도 결단했겠네!! 원경제의 수련에 관한 천부적 자질과 허영음의 공부와 관련한 천부적 자질이 같나?’
허칠안은 생각을 거두었다.
“위장일 리는 없습니까?”
낙옥형을 그를 쳐다보더니 말을 하지 않았다.
허칠안은 연거푸 읍하며 유감의 뜻을 표했다.
이런 질문은 도문 2품 강자에 대한 존중이 아니었다.
낙옥형은 계속해서 말했다.
“원경의 영혼은 선천적으로 허약하네. 이건 그가 도를 닦는 자질이 부족한 이유지.”
금련 도사가 혼단이 원신을 강화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설마 원경제가 선천적인 결함을 메우기 위해서?’
허칠안은 속으로 생각했고, 낙옥형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원신을 강화하는 방법은 지극히 많아. 명상, 미끼 모두 가능하기에 굳이 혼단을 정제할 필요가 없네.”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말해서 혼단은 다른 역할을 한다는 거군요.”
심리학적인 각도로 보자면, 이런 일을 꺼리지 않는 사람은 미치광이뿐이었다. 하지만 원경제는 미치광이가 아니라 꾀가 깊은 군왕이었다.
그는 일을 하기 전에 분명히 결과를 따져볼 터였다. 그는 이익이 충분해야 비로소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만약 혼단이 그저 6품의 근간을 굳히는 데 그친다면, 그가 자발적으로 성안의 백성을 도살하는 계략을 꾸밀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대가가 너무 컸다.
그는 기껏해야 회왕을 묵인하는 데 그칠 터였다.
낙옥형이 반문했다.
“자네는 무슨 의견이 있는가?”
허칠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단서가 부족하여 짐작할 길이 없습니다. 저는 이 일을 조사해볼 겁니다. 국사께서는 마음속으로 해주시면 됩니다.”
그는 2품 강자의 지혜로, 너무 많은 설명과 당부를 할 필요가 없다고 믿었다. 일깨워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낙옥형은 ‘음’하고 소리 내더니 물었다.
“왕비 그녀는 정말 오랑캐에게 납치당한 뒤에 소식이 끊겼나?”
허칠안이 손목을 불끈 쥐고 탄식했다.
“그렇습니다. 애석하게도 대봉 제일 미인은, 회왕이 이미 죽었으니 왕비께서도 아마…….”
그는 안타까움을 적당히 드러내고, 정상적인 남자답게 절세미인이 불행히도 참혹한 일을 당했다는 점에 대한 유감을 표했다.
낙옥형은 아무런 내색하지 않고 그를 쳐다보며 잠시 침묵하더니 무심코 물었다.
“금련의 말을 들으니 옹주성 밖에 있는 지하 궁전 고분 안에서 상고 시대의 방중술(房中術)을 발견했다고?”
‘이걸 뭐하러 묻지?’
허칠안은 어리둥절하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철저하게 깨달았는가?”
낙옥형은 이 말을 할 때, 아름다운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는 데 전념했다.
“그건…… 아직 수련한 적이 없습니다. 금련 도사님의 말씀을 들으니, 이 기술은 방중술에 정통한 남녀가 함께 수련해야만 된다고 하시더군요. 아무 여인을 찾는다고 쌍수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허칠안 역시 능구렁였지만, 절세미인과 이런 사적인 일을 얘기하자니 좀 민망했다.
낙옥형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허칠안은 그녀의 눈에서 약간의 만족을 보았다.
“초주성 백성 대량 학살 사건은 일단락되었네. 원경은 지금 이 일이 즉시 지나가길 간절히 바랄 테니 한동안은 절대로 자네에게 보복을 가하지 않을 걸세.”
낙옥형이 일깨워주었다.
“후일은 자네 스스로 더욱 대비하게. 일단 그가 보복할 기미를 보이면, 즉시 가족들이 퇴관하게 하고, 이후에 다시 기용되도록 해.”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황제의 미움을 산 대가였다.
배후의 검은손은 한동안 나설 기미를 보이지 않을 테니 보이지 않는 화지만, 원경제는 가까이 있는 우환이었다.
‘나는 반드시 아주 빠르게 수련 경지를 끌어 올려야 해. 그래야만 스스로 보호하는 능력이 생기니까…….’
“이 부검은 잘 거두게. 위험할 때 기기로 분발시키면, 가까스로 내가 공격하는 셈일 거야. 만약 연락해야 하면, 신념을 주입하면 되네.”
낙옥형의 음신이 금빛이 되어 갔다.
허칠안은 부검을 잘 거두고 미간을 문질렀다.
“단기 목표는 5품 승직이다. 그런 뒤 원경제를 조사해야지. 헤, 나한테도 황제를 조사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