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4화. 소환 (2)
이야기 말미에 한 편의 시가 기록되어 있었다.
세상에 나와 놀란 가슴 모든 꽃을 압도하고
더할 나위 없이 온화한 모습은 햇빛을 적시네.
만민이 국색으로 추앙하니
영혼이 속세에 얽혀 제왕을 건드리네.
허칠안은 무표정으로 책을 덮었으나 마음은 세차게 요동쳤다.
‘이 시는 왕비를 형용하는 거 아닌가? 제기랄, 왕비가 바로 구백여 년 전의 화신이라니……. 아니, 화신이 환생한 건가? 알고 보니 이 시를 쓴 건 삼백 년 전의 화신이다. 나는 줄곧 이 시가 너무 널리 퍼지고, 명성이 너무 자자해서 원경제의 시선을 끌었기에 그녀가 궁으로 보내진 줄 알았다. 어쩐지, 어쩐지 모두가 왕비의 영온이 좋다고 했던 게 이런 이유였군. 역시 책을 많이 읽는 건 좋은 일이야. 환골탈태는 의심할 필요가 없지만, 불로장생은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 않았으면 원경제가 어떻게 왕비를 순순히 진북왕에게 내어줬겠는가. 꽃 속의 선녀, 역시 대봉 제일의 미인답게 매력이 둘도 없군. 쯧, 가련한 여인이기도 하고.’
허칠안은 책을 조위에게 돌려주면서 물었다.
“이 시는 전종 대유가 지은 겁니까?”
조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아, 전종 대유도 그저 기록자일 뿐이군. 그럼 더는 의문이 없다. 아니면 왕비 일생의 수수께끼를 실토한 주지 스님이 어떻게 이 시가 논리적인 허점이 될 거라는 걸 알겠는가…….’
허칠안은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허칠안은 조위 원장과 한담을 나누던 중 갑자기 귓바퀴를 움직이더니 고개를 돌려 건물 밖을 보았다.
대유 셋이 함께 오는 모습만이 보였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아연실색하는 허칠안을 보았다.
“역시 우리 세 사람이 가르친 서생답군. 채시구에서 두 악인을 베어 한 사람의 힘으로 대세를 만회하다니. 눈물겹구려.”
대유 셋이 기뻐하며 칭찬한 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원장을 쳐다봤다.
“칠안이 언제 원장님의 제자가 되었습니까? 칠안, 원장님께서 자네에게 시를 지으라고 요청하였는가?”
그들은 말을 하면서 ‘그저 그의 시를 탐하는 거잖아요. 이게 사실이라고 교활하게 궤변을 늘어놓지 마세요’라는 눈빛으로 조위를 바라보았다.
조위는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어찌 자네들과 같겠는가. 지식인은 삼불후(三不朽)네. 덕, 공, 말을 쌓아야만 바른길이지. 시사에 희망을 거는 건 정통적인 길이 아니네.”
‘원장님께서 우리의 시사를 뺏지 않으면 됩니다…….’
대유 셋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장진은 가벼운 어조로 반박했다.
“길은 많고, 다르지만 이르는 곳은 같은 법입니다. 시사가 언제 문화의 보배가 아닌 적이 있었습니까? 제가 보기에 원장님께서는 오히려 집착이 과하십니다.”
조위가 손사래를 쳤다.
“자네들에게 변명하기 귀찮네.”
그는 돌아서서 허칠안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주로 양공이 주옥같은 시사를 지어 그들이 부러워하고 질투했는데 사실 운록서원은 자네에 대해 선의를 품고 있네. 시사와는 결코 무관해.”
그가 대유 셋을 쳐다보더니 허허허 웃었다.
“적어도 이 노인네는 저들과는 다를 게야.”
그는 반드시 허칠안에게 이 일을 해명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운록서원이 목적을 품고 있는 듯 보일 터였다. 항상 그의 시사의 덕을 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장진 등의 행위는 정말로 운록서원의 이미지를 욕되게 했다.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본인은 사실 상관없었다. 어쨌든 시사는 그가 지은 게 아니라 전생에서 표절한 것이었다. 근본 없는 시간 여행자로서 시사로 인맥을 넓히고, 이익과 맞바꿀 수 있다면 당연히 놓칠 수 없었다.
장진을 포함한 세 사람은 원장의 비아냥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간절하게 허칠안을 쳐다보며 물었다.
“자네도 오랫동안 시를 짓지 않았구먼. 최근에 이렇게 큰일이 발생했는데 열정이 끓어오르면서 시적 정서가 폭발하는 느낌은 없었나? 내가 몇 수는 다듬어줄 수 있네.”
대유 셋은 간절하게 허칠안을 쳐다봤다.
원장 조위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역시 아주 관심이 많아 정신을 집중하여 쳐다보았다.
‘운록서원은 나 대신 가족들을 감싸주었으며, 더욱이 원장은 직접 손에 조각칼을 쥐고, 조당에서 원경제를 협박했다. 물론 유가 이념에 맞고, 나한테 고의로 선심을 베푼 게 아니니 이 은혜는 기억해야 한다……. 음, 시를 베껴서 그들에게 줘도 무방하겠군. 하룻밤 또 하룻밤 그들에게 무임승차하는 것도 좋지는 않으니깐…….’
허칠안은 여기까지 생각하자 침음했다.
“사실 한 수가 떠오르기는 합니다만.”
‘맞다, 한 수가 떠올랐다. 나는 그저 시사 셔틀일 뿐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덧붙였다.
대유 셋이 미친 듯이 기뻐했다.
이럴 때, 그는 본래 호기롭게 한 마디 해야 했다.
<필묵을 준비해주십시오.>
다만 그는 붓글씨를 너무 못 쓰는 데다 지금은 손에 탄필(炭筆)도 없었기에 부끄러운 솜씨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격식을 제대로 갖추고 실내에서 천천히 걸으며 창문 밖의 짙푸른 대나무 잎을 보았을 때, 눈이 반짝이는 척하며 말했다.
“떠올랐습니다.”
조위도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대나무와 관련 있는가?”
‘원장은 대나무를 아주 좋아하는 것 같군…….’
허칠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위는 이 말을 듣더니 갑자기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그는 약간의 흥미를 품고 있었을 뿐이었지만 지금은 기대감이 배로 올랐다.
허칠안은 약간 기억을 더듬으며 이 시의 전문을 떠올렸다. 하지만 조위와 대유 셋의 눈에 그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청산을 물고 놓지 않으니.”
조위는 대나무를 노래하는 시임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자세히 음미하기 시작했다. 이 구절 속의 ‘물다’라는 글자는 잘 다듬어져 있으면서도 고작 한 글자로 대나무의 굳셈을 부각했다.
“바위틈에 뿌리를 내렸네.”
조위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는 전 구절을 보충하면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 내보이는 대나무의 의연함을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수없이 깎이고 부딪혀도 여전히 굳건하니, 동서남북 어디서든 불고 싶은 대로 불어라.”
원장 조위는 호흡이 다소 가빠졌다. 뒤에 두 구절은 외부 압력에 대한 대나무의 태도를 묘사했다. 설령 수없이 고난을 겪는다고 해도 여전히 굴복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매화, 난, 대나무, 국화 중에 그는 유독 대나무에 애정을 기울였다. 그렇지 않았으면 거처를 죽림에 짓지 않았으리라.
조위는 예전도 대나무를 노래하는 시를 지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허칠안의 시와 비교했을 때 자신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점을 인정해야 했다.
허칠안은 한 시에 두 대련, 안에서부터 밖까지, 대나무의 굳건한 품성을 남김없이 묘사하였다.
‘역시 대봉 시괴답군…….’
유가의 고품 술사는 감개가 깊어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이 시의 정취와 사조는 조금 부족하지만, 보기 드문 영죽시(詠竹詩)로군.”
이모백이 칭찬했다.
“어리석긴. 이 시는 대나무의 굳건함과 억세면서도 소박함을 노래했으니 사조가 화려하면 오히려 수준이 떨어지네.”
장진이 비난했다.
“얼핏 보면 대나무를 노래하지만, 사실은 대나무를 사람에 비유했네. 절묘하구나, 절묘해.”
진태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대유 셋은 평가를 마치고 바로 허칠안을 쳐다보았다.
“이 시에 제목이 있는가?”
허칠안은 즉시 그들이 무슨 생각을 품었는지 알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명명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들의 윤색이 필요합니다.”
대유 셋은 약속이나 한 듯 몇 걸음 뒤로 물러나 경계하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원 저작권을 어떻게 쟁취할지 헤아렸다.
바로 이때, 조위가 세 번 웃더니 말했다.
“내가 이 시를 위해 명명하겠네.”
“?”
장진 등은 굳은 표정으로 목을 비틀어 그를 쳐다보았다. 허칠안의 시가 마음에 든다고 다 얘기한 셈 아닌가?
조위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언짢아했다.
“자네들 나를 봐서 뭐 하는가. 이 시는 허칠안이 대나무를 노래함으로써 나를 비유한 게 아닌가? 이 늙은이가 운록서원을 수십 년간 굳게 지켰네. 마치 이 대나무처럼 말이지. 청산을 물고 놓지 않으니, 동서남북 어디서든 불고 싶은 대로 불어라.”
그는 말을 마친 뒤 대유 셋이 반응할 기회를 주지 않고 말했다.
“삼백 리 물러나게. 내가 시를 짓는 걸 방해하지 마.”
대유 셋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조위는 종이를 넓게 펼치고, 흥분한 감정으로 붓을 들어 쓰면서 개탄했다.
“좋은 시야, 좋은 시. 이 늙은이의 인생이 완벽해졌군. 음, 칠안, 이 시는 자네가 지은 거지만, 학문을 전수하는 이 은사가 옆에서 윤색을 가르치지 않았는가, 그렇지?”
이때 대유 셋이 번쩍 나타나더니 화를 냈다.
“원장님, 멈추십시오!”
조위는 소매를 휘둘렀다.
“오백 리 물러나게.”
대유들은 사라졌다가 1초 뒤, 다시 나타났다. 그들은 포효했다.
“뻔뻔한 영감탱이, 우리는 그쪽과 같은 하늘 아래서 살지 못하겠습니다!”
“보아하니 자네들 오랫동안 몸을 움직이지 않았군. 그만하게, 그만해. 이 늙은이가 자네들을 도와주지.”
“저희는 놀란 게 아닙니다. 3품이면 또 어떠합니까? 저희가 손을 잡으면 원장님이 두렵지 않습니다.”
“허, 이 늙은이가 자네들을 무시하는 게 아니네. 설령 열 사람이 더 와도 나는 손쉽게 제압할 수 있지.”
허칠안은 종리를 이끌고 도망갔다.
* * *
맑은 공기가 하늘을 찌르고 구름층이 흩어지는 청운산 정상에서 네 사람의 형체가 고공에서 주거니 받거니 싸웠다.
인기척이 너무 크게 나자 서원의 서생과 학자들이 깜짝 놀랐다.
“원장님과 대유들이 어쩌다 싸우기 시작했나?”
“이, 이게 무슨 일인가? 멀쩡하다가 왜 야단법석을 떠는 건가? 우리에게 화가 미치지 말아야 하는데.”
“대유 셋이 싸우는 건 아주 흔한 일이잖나. 다만, 원장님께서도 어쨌든 싸우기 시작하셨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대유 셋이 싸우는 것도 흔치 않네. 지난번에 몇 번 싸운 건 허 시괴의 시를 쟁탈하기 위함이었잖나.”
이때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 방금 허 시괴가 여인 한 명을 데리고 원장님의 죽림으로 가는 걸 본 듯합니다.”
“아니겠지…….”
사방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서생과 학자들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 * *
다른 한편 허씨 집안 안식구들이 잠시 머무는 소원(小院) 안에서 이묘진과 초원진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고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분명히 형님이 또 시를 지어서 대유 셋이 싸우는 걸 겁니다.”
허신년은 손사래를 쳤다.
‘이건 4품 고수가 낼 수 있는 기척이 아닌 것 같은데…….’
이묘진과 초원진이 속으로 말했다.
두 사람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허신년의 말을 들었다.
“영음에게 아주 이상한 천부적 재능이 있습니다. 그녀는 배우고 싶지 않아 하고, 배워도 습득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가르쳐도 쓸모없지요. 그러니 여러분은 본인이 특수하여 그녀를 가르쳐 계몽시킬 수 있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허신년은 하마터면 터놓고 말할 뻔했다.
‘여러분, 재앙을 자초하지 마십시오.’
이묘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되네. 전에 허씨 집에서 묵을 때 허 부인께 약조했네. 영음을 교육하는 걸 돕겠다고. 나중에 일 때문에 지체되었지만, 지금은 만사가 해결됐으니 약속을 실현하기에 딱 좋지.”
초원진은 웃었다. 똑똑한 사람은 많이 보았다. 가끔씩 우둔한 자를 보는 것도 일종의 재미라고 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