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0화. 죄기소 (2)
감정은 고개를 숙이고 탁자 위를 쳐다보았다. 그는 제자가 바친 술안주가 다시 제자의 배 속으로 들어가는 걸 보면서 약간 낙담했다.
“채미야, 스승님은 그저 궁에 구경하러 갔을 뿐인데…….”
감정이 탄식했다.
“누가 스승님께 구경하라고 했나요?”
저채미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큰소리를 땅땅 쳤다.
“저와 영음 그리고 리나가 음식을 먹으면, 전부 손이 빨라요. 여섯 살 어린아이도 아는 이치인걸요.”
감정은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허칠안은 궁금해했다.
“어째 양 사형이 보이지 않지요?”
저채미가 대답했다.
“스승님께서 지하에 억눌러 놓아, 종리 사저와 동무가 되었어.”
‘허세왕이 또 무슨 짓을 해서 감정의 노여움을 산 걸까?’
허칠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채미는 이어서 말했다.
“스승님, 송 사형이 저한테 한 가지 일을 물어보라고 부탁했어요.”
이 말을 들은 감정은 잠시 침묵하더니 물었다.
“그가 또 사형수로 연금 실험을 하려고 하니?”
저채미는 고개를 저었다.
감정이 막 안도의 숨을 내쉬는데 제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인종의 제자가 되어 기술을 배우러 갈 거래요. 하지만 감정께서 송 사형의 스승님이니 제멋대로 주장할 엄두는 나지 않나 봐요. 그래서 스승님의 동의를 구한대요.”
……감정이 천천히 말했다.
“그의 이유가 뭐니?”
“송 사형의 인체가 마지막 단계까지 정제되었는데 원신이 육신과 융합하지 못해 아주 골치 아프대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잘 먹지 못해요. 도문은 원신 영역의 전문가이니 그는 도문 법술을 배우러 가고 싶은 거예요.”
저채미는 먹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송 사형이 말하길 그의 마음은 아직 스승님께 있으니 질투하시지 않길 바란대요.”
감정은 말하지 않고, 입가에 기름기가 번들번들한 저채미를 쳐다보다가 또 지하에 억눌린 종리와 양천환을 떠올렸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경치가 아름다운 경성을 바라보며 쓸쓸하게 탄식했다.
인간 세상은 가치가 없다.
허칠안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하여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 * *
난잡하게 어질러진 침전 안에는 뜯겨져 나간 휘장, 넘어진 향로, 갈기갈기 조각난 서화, 옆으로 뒤집어진 탁자, 금은 그릇이 바닥에 널려 있었다.
너른 소매와 긴 장포, 헝클어진 머리카락의 원경제는 ‘폐허’에 서 있었다.
재위한 지 37년, 오늘 군신들에 의해 그의 존엄이 무참히 짓밟혔다. 권모술수의 전봉이라고 자만하던 거만한 군왕에게는 충격이 실로 컸다.
보통 사람이 이렇게 체면을 깎여도 미칠 텐데 하물며 황제 아닌가.
“폐하…….”
늙은 태감이 문 밖에서 들어와 전전긍긍하며 한 마디 외쳤다.
원경제는 그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제공들께서 가지 않고 금란전 안에 모여 계십니다.”
늙은 태감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뭐 한다는 것이냐.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는 점이 있단 말이냐? 짐이 그들에게 약속하지 않았는가!!”
원경제는 흥분하여 두 손을 휘두르며, 목이 쉬도록 포효했다.
늙은 태감은 무릎이 후들거려 바닥에 꿇고 슬퍼했다.
“왕정문과 위연이 말하길 죄기소를 보지 못하면 조회를 마치지 않겠다고 합니다.”
원경제는 몸이 휘청거렸다. 그는 비틀거리며 몇 걸음 물러났다. 그는 갑자기 가슴에 통증이 느껴지고, 목구멍에서 비린내와 단맛이 소용돌이쳤다.
* * *
이날 점심 식사가 막 끝나자 조정에서는 전대미문의 포고를 붙였다.
황성문, 내성문, 외성문, 12개의 성문의 열두 군데 공고판에 원경제의 죄기소를 붙였다.
원경제 재위 37년만에 처음으로 쓴 죄기소였다.
이날 죄기소는 경성 각 계층을 뒤흔들었다.
* * *
첫 번째로 죄기소를 본 사람들은 이 소식이 몹시 충격적이라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들은 ‘내가 이 소식을 가장 먼저 접했다’는 흥분된 감정을 품고, 미친 듯이 소식을 퍼뜨렸다.
그 후 수많은 백성이 성문으로 몰려들었다.
“죄기소라고?”
글자를 모르는 백성 및 앞으로 비집지 못한 백성들이 큰소리로 외쳤다.
“그렇다네, 죄기소라네. 폐하께서 정말 죄기소를 쓰셨어.”
앞에 있는 사람이 소리 높여 대답했다.
“얼른, 얼른 읽게…….”
뒤에 있는 백성들은 한시도 기다리지 못하고 재촉했다.
“지난 일을 깊이 뉘우침에, 위에서 조서를 내린다. 부덕한 짐이 재위를 물려받았구나. 짐의 뜻은 천하를 새롭게 바꾸어 선조의 옛것을 돌려주려는 것이었으나 뜻밖에도 망나니를 두텁게 신임하여 초주성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원경 37년 5월 16일.”
방대한 죄기소 전편은 1,000자 가까이 되었다. 공고판 앞에 서 있던 한 늙은 유생이 다채롭고 리듬감 있게 다 읽었다.
평범한 백성 중에 누군가는 죄기소를 충분히 이해했지만, 더 많은 사람이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그들은 한 가지 일만 확인하였다. 원경제가 정말 죄기소를 썼다!
“초주성 백성 대량 학살 사건 때문인가?”
“폐하께서 죄기소를 쓰셨다는 건 다시 말해서 어제 허 은라가 한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거군. 그렇지 않은가?”
“시정에서 허 은라를 헐뜯는 유언비어들은 전부 거짓이고, 그렇지?”
백성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이 사건이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허칠안을 믿긴 했지만, 어제 허 은라를 헐뜯는 유언비어가 많았고 그 말들은 아주 그럴싸했었다.
그들은 그런 유언비어를 짓누르기 위해 확실한 정보가 급하게 필요했다.
게다가 조정은 이미 백성들 마음속 깊이 자리한 상태였다. 조정에서 만약 이 일을 인정하고, 거기에 허 은라의 신망까지 더하면 백성들은 더 이상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앞으로 누가 뭐라고 하든 믿지 않을 것이었다.
늙은 유생이 손을 아래로 젓자 군중은 즉시 조용해졌다. 그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고개를 젓더니 탄식했다.
“폐하께서 죄기소를 쓰셨으니 진북왕을 종용해 성안의 백성을 도살한 걸 인정하신 셈이네. 허 은라가 어제 한 말이 전부 사실이었어. 허 은라가 분노의 칼을 뽑지 않았다면, 초주성 백성 대량 학살 사건을 설욕하기 어려웠겠군. 정 대인, 죽, 죽어도 눈을 감지 못했겠어.”
환호성과 욕설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다들 의견이 분분했다.
“대봉에 허 은라가 나올 수 있었던 건 정말이지 하늘이 보우하신 게야.”
“애석하군, 허 은라는 이제 더는 관리가 아니니.”
“관리가 아니면 또 어떠한가. 그는 여전히 대봉의 영웅이거늘.”
욕설에 관해서라면…….
“아둔한 군주, 이 아둔한 군주. 초주 사람은 우리 대봉의 백성이 아니란 말인가?”
“20년간 도를 닦은 아둔한 군주일세. 진북왕을 종용해 성안의 백성을 도살하였다니. 이게 바로 폭군이지 뭔가.”
“대봉은 조만간 그의 손에 망할 것이야…….”
욕설은 이내 사그라들었다. 주위 관병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백성들은 여전히 작은 소리로 악담을 퍼붓거나 마음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 관병 역시 진짜로 불경죄를 범한 이 백성들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었다.
황제가 죄기소를 쓴 건, 그 자체로 잘못을 인정한 셈이었다. 또한 이는 백성들에게 분풀이하고 경멸할 경로를 제공해준 격이었다.
* * *
국자감은 온 세상 서생의 성지 중 하나였으므로 여기서는 본래 책을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때는 여기저기서 격앙된 호통 소리와 분노에 찬 욕설이 터져 나왔다.
지식인이 욕하기 시작하면, 백성들보다 더 다채로웠다.
“진북왕은 죽어도 전혀 아쉬울 게 없네. 그저 폐하마저 그럴 거라곤 생각지 못했을 뿐……. 아둔한 군주여, 나라가 망할 상이로구나. 어찌 그가 이렇게 멋대로 굴게 할 수 있는가. 감정, 감정이 사전에 전혀 몰랐을까?”
“조당 전체 제공 중에 대장부는 하나도 없구나. 우리는 꾸준히 성현의 글을 읽었는데 이렇게 줏대 없는 지식인들을 동반자로 삼아야 한단 말인가?”
“허 은라가 두 악인을 베어서 이 일을 뒤집어엎어야지만, 그들이 비로소 폐하에게 완강하게 맞설 엄두를 낸 게지. 퉤, 나였다면, 그 자리에서 격노했을 거야.”
“비록 무사가 힘으로 율법을 어겼지만, 이렇게 털끝만큼의 양심도 없는 일을 맞닥뜨리면 무사만이 애써 바로잡을 수 있는 법.”
“에휴, 장차 사서에 기록되면 지식인의 체면이 말이 아니겠군. 허 은라가 우리 유가의 지식인이 아닌 게 애석하군.”
이때 젊은 서생이 뛰어 들어와 흥분하며 말했다.
“여러분, 여러분. 제가 방금 좋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원내의 모든 서생들이 돌아보더니 잇따라 눈살을 찌푸렸다.
비록 황제가 죄기소를 써서 이 일을 인정하여 충신이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지는 않았지만, 이 일 자체는 여전히 비극이었기에 흥분할 가치가 전혀 없었다.
그 젊은 서생은 사람들을 맞이하며 흥분해서 말했다.
“제가 듣자 하니 오늘 운록서원의 원장 조위가 조당에 나타나 제공과 폐하 앞에서 허 은라가 그의 출중한 제자라고 말, 말씀하셨답니다.”
‘뭐라고?!’
순간, 원내의 분위기가 확 달아올랐다. 서생들은 감격하고 흥분한 표정을 지으며 성큼성큼 다가갔다.
“허 은라가 운록서원의 서생이라고?”
“조 원장의 출중한 제자라니, 이, 이 말이 사실인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서생 몇몇이 그자의 소매를 꽉 잡아당기며 큰 소리로 캐물었다.
‘지금 내가 만약 농담한 거라고 말하면 맞겠지…….’
그자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은 이미 관리 사회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제가 퍼뜨리는 유언비어가 아니에요.”
“하하하, 오늘 겹경사가 났으니 술 한잔 기울여야겠구나. 가세, 술 마시러.”
“오늘은 책을 읽지 않아야겠네. 제멋대로 굴겠어.”
그동안 대봉 시괴가 무사 출신인 게 모든 지식인의 마음속 가시였다. 그들은 매번 이 일을 언급할 때마다 감동하고 탄복하면서도 손을 불끈 쥐고 탄식했더랬다.
그들은 후손들이 이 역사를 다시 볼 때, 틀림없이 이 시대의 지식인들을 비웃을 거라 여겼다. 지식인들은 이런 사후 명성을 신경 쓰지 않는가!
그런데 그들은 지금 허칠안이 운록서원의 서생이라는 걸 알자 말도 못 하게 기뻤다. 비록 운록서원과 국자감 사이에 도통 다툼이 있지만, 사서는 이 점을 신경 쓰지 않을 터였다.
마찬가지로 모두가 유가의 지식인이었다.
국자감 서생은 마음에 맞는 벗을 불러 술을 마시러 나갔다.
감승(監丞)은 이 일을 제주(祭酒)에게 보고하면서 화를 내었다.
“국자감 서생 절반 가까이 빈둥거리러 나갔습니다. 오늘은 쉬는 날도 아닌데 말이죠.”
백발이 성성한 늙은 제주가 부드러운 침상에 기대어 별다른 표정 없이 말했다.
“오늘 조당에서 일어난 일은 우리에게 이치에 부합하면 돕는 이가 많고, 이치에 어긋나면 돕는 이가 적은 법이며, 성인(聖人)도 업신여기지 못함을 알려주지.”
‘제주의 말은 군중과 적이 되지 말고, 강적을 마주했을 때는 규칙도 적당히 포기하고, 양보하라는 뜻이겠군…….’
감승은 완곡하게 거절당하자 눈살을 찌푸렸다.
* * *
새하얀 궁장을 입고, 폭포 같은 머리카락을 지닌 회경은 회경부 탁자에 앉아 붉은 치마의 임안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웃었다.
“그는 지금껏 사람들을 실망하게 한 적이 없구나. 그렇지 않니?”
그러더니 그녀는 다시 탄식했다.
“이 일로 아바마마의 명성, 황실의 명성이 밑바닥으로 떨어지겠구나.”
달걀형 얼굴에 도화안을 한 임안은 달콤한 웃음을 띠고 날카롭게 말했다.
“잘못된 일을 했으면 야단쳐야지. 내가 비록 독서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태부(太傅)께서 잘못을 알면 개선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나은 건 없다고 지도하셨어.”
‘머리가 단순한 사람 노릇을 하는 것도 행복한 일인 셈이구나…….’
회경은 속으로 여동생을 깔보았지만, 겉으로는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임안의 체면을 살려줄 생각은 없었다. 다만 회경이 속내를 드러냈다면 임안은 분명히 화를 내며 그녀의 얼굴을 쪼아대려 달려들었을 것이다.
회경은 그녀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똑똑한 사람은 자신에게 성가신 일을 만들지 않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