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화. 잘못을 인정하다 (1)
인파 속, 갑자기 한 사내가 비집고 나왔다. 그는 쇠뿔 활을 등에 멘 이한이었다. 그는 두 무릎을 바닥에 꿇고 목놓아 울었다.
“간신을 없애고, 초주성 백성과 정 대인께 정의를 구현해주신 허 은라께 감사드립니다.”
신도백리, 위유룡, 조진, 당우신, 진현 부부……. 정흥회를 경성으로 호송한 몇몇 의인들이 일제히 인파를 비집고 나와 형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간신을 없애고, 초주성 백성과 정 대인께 정의를 구현해주신 허 은라께 감사드립니다.”
이 광경은 주변 백성들의 눈에 깊이 각인되었다.
백성들이 형대 위 대범하고 떳떳한 젊은이를 바라보고 있으니, 인파 속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젊은이였다. 그는 자신의 뜨거운 피, 자신의 앞날, 심지어 자신의 생명과 정의를 맞바꾸었다.
이 광경은 나중에 사서에 기록되었다.
대봉력, 원경 37년, 초여름, 은라 허칠안이 조국공과 호국공을 채시구에서 참수하여 초주 백성 대량 학살 사건을 개관사정(*蓋棺定論: 사람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그 사람에 대해 제대로 평가함을 이르는 말)하였다. 7명의 의인은 형대 앞에 무릎을 꿇고 일어나지 않았다.
“쨍!”
허칠안이 일어나 손목을 털자, 흑금장도가 청명한 소리를 내며 쓸쓸한 핏자국을 형대에 뿌렸다.
그는 형대 아래에 무릎을 꿇은 의인들을 천천히 훑어본 다음 금군을 훑어보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새까맣게 밀집한 백성들을 훑어본 뒤 깊이 숨을 들이쉬고는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허칠안이 두 악인을 베었다. 분풀이하기 위함도, 사사로운 원한 때문도 아니다. 그저 가슴속의 의기(意氣)를 위해, 정 대인의 억울함을 씻어주기 위해, 조정에 한마디 하기 위함이다…….”
백성들은 소리 없이 적막한 가운데 그를 쳐다보면서 묵묵히 경청했다.
허칠안은 낭랑하고 힘찬 목소리로, 차마 형용하기 어려운 깊음을 담아 읊었다.
“만일 하늘에 정이 있다면 하늘 역시 늙고, 인간의 바른길 역시 상전벽해이거늘.”
허칠안의 시선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스쳐 먼 곳의 쪽빛 하늘로 향했다. 흰색 구름 사이로 판에 박힌 듯한 그 형체가 다시 보이는 듯했다. 그를 향해 허리를 굽혀 읍하였다.
허칠안은 답례하고 한참 동안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정 대인, 편히 잠드십시오.’
* * *
‘만일 하늘에 정이 있다면 하늘 역시 늙고, 인간의 바른길 역시 상전벽해라…….’
먼 곳에 있는 용마루 위, 회경이 눈 같은 백의 차림으로 몸을 떨더니 다소 멍하니 입으로 중얼거렸다.
‘인간의 바른길 역시 상전벽해라니. 이게 바로 네가 내심 고수하는 신념인가, 허칠안?’
군중 밖에서 평범한 자태의 부인이 명치를 움켜쥐고 쿵쾅쿵쾅 미친 듯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채시구 주변에 떼지어 모인 백성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거나 눈물을 닦았다. 그들 사이에서 슬피 흐느끼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버지, 왜 우시는 거예요? 대인들은 왜 전부 우는 거예요?”
덜 붐비는 자리에 있는 어린아이가 고개를 들고 눈을 깜박였다.
남자는 아이를 안아서 어깨 위에 올려놓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저 남자를 보면서 이 말을 기억하거라. 반드시 이 말을 기억해야 하고, 그를 기억해야 해. 앞으로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하든 그의 험담을 하면 안 된다.”
“그가 누군데요? 제가 왜 그의 험담을 해요?”
어린아이가 궁금해했다.
“그는 대봉의 영웅이지만, 오늘 이후 그는 아마 ‘나쁜 사람’으로 변할 거란다.”
허칠안이 칼집을 들자 쨍 소리와 함께 형대 위에 꽂힌 조각칼이 뽑혀 손바닥에 쥐어졌다. 형대 주변의 고품 무사 십여 명이 깜짝 놀라 연신 뒤로 물러났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굴었다. 형대에서 뛰어내려 한 걸음씩 밖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이묘진이 선물한 특수 향낭을 가볍게 열어 두 망혼을 자루에 거두어들였다.
길거리를 가득 메운 백성들, 새카만 인파가 알아서 물러나 아주 곧은 통로를 터주었다.
“허 은라, 늙은이의 절을 받으십시오.”
머리가 희끗희끗한 늙은 유생이 공수하며 읍하였다.
“허 은라, 늙은이의 절을 받으십시오.”
조직하지도 않고, 청하지도 않았으나 자리에 있는 백성들은 공수하고 읍을 올렸다. 동작이 가지런하지는 않았지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었다.
* * *
회경은 용마루 위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다가 순간 얼떨떨해졌다. 그녀는 황제의 장녀이자 버젓한 공주였다. 천 명이 굽어보는 건 둘째 치고, 그녀는 만 명도 본 적이 있었다.
예컨대 한 나라의 군주인 아바마마처럼 말이다.
하지만 제3자는 그저 그의 권력과 용포를 경외할 뿐이었다.
백성들이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존재는 허칠안이 유일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저 그 사람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금군이 길을 막은 채 소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들은 맞은편에서 오는 젊은이를 그저 바라볼 뿐, 지금 나서야 하는지 아니면 물러나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들은 참지 못하고 통솔자 세 명을 쳐다봤다가, 통솔자와 다른 무사가 먼 곳에 서서 조금도 저지할 뜻 없이 꼼짝하지 않고 선 모습을 발견했다.
“워워…….”
말이 낮게 울면서 양쪽으로 비켜 길을 내어주었다.
그는 몇백 보 걸어 나오더니 멈춰서서 황궁 방향을 멀리 바라보았다.
‘백성은 임금을 떠받들어 모실 수도 있지만, 몰아낼 수도 있는 법. 당신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연스레 누군가 인정하도록 옥죌 것이니…….’
* * *
이때 군신은 오문 밖에서 흩어지지 않고 인내심 있게 소식이 전해지기를 기다렸다.
게다가 만약 성안에서 정말 대규모 전투가 발발하면 황궁에 있는 게 가장 안전했다. 황궁에는 고수가 많이 있었다. 비록 그들이 평소에는 그럴싸하지 않더라고 해도 말이다.
황궁은 금군 대대를 업고 있었다. 백전(百戰), 신기(神機), 기병(騎兵) 3개 대대는 총 10만 금군으로 황제 직속 군대였다.
마지막으로 무장과 훈귀 중에는 사실 고수가 아주 많았다. 궐영수 같은 5품이 결코 적지 않았다.
문무백관들은 서로 귀에다 대고 소곤거리며 이 일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조국공과 호국공 두 공작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토론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 마음은 딴 데 있었다. 그들은 시선이 자꾸 궁문 방향을 향했다.
마침내 병사 하나가 칼자루를 쥔 채 궁 밖에서 내달려왔다.
왕 재상은 걸음을 내디뎌 앞으로 나가 병사를 막고 나지막이 물었다.
“궁밖의 상황은 어떠한가? 금군이 허칠안을 제압했는가? 조국공과 호국공은 안전한가?”
이 금군은 황제에게 상황을 보고하러 온 참이라 왕 재상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기에, 몸을 피해 계속해서 앞으로 갔다.
하지만 무장 몇몇이 앞을 가로막고 호통쳤다.
“말하거라!”
‘우르르’ 발소리 사이로 품계가 다른 수백 명의 문신과 무장이 발을 맞추고 앞으로 나가 몰려왔다.
“…….”
병사는 순간 직위가 가져서는 안 될 압력을 받아 할 수 없이 말했다.
“조국공과 호국공은 채시구에 끌려가 참수당했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빠른 걸음으로 떠났다.
조국공과 호국공이 채시구에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자리에 있는 문무백관은 이 소식을 듣더니 한참 동안 말을 내뱉지 못했다.
물론 자리에 있던 관원들은 허칠안의 사람 됨됨이에 관해 속으로 다 생각한 바가 있었다. 그와 대립한 적 있던 손 상서와 대리사경 등은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그들은 조국공과 호국공이 백성들 앞에서 참수당했다는 사실을 진짜로 확인한 뒤에도 황당한 마음을 거둘 수 없었다.
“정말이지 법도 하늘도 업신여기는 사람일세…….”
어떤 관원이 중얼거렸다.
“그는 가증스러운 자야.”
손 상서는 그자를 본 것처럼 잠시 멈칫하더니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존경할 만한 사람이기도 하지.”
주위에 손 상서와 친분이 있는 문관 몇몇이 믿기 어렵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손 상서가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이 자식을 갈기갈기 찍어 죽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네. 하지만 그건 그저 나의 사사로운 원한일 뿐이지. 진북왕을 도와 무고한 백성 38만을 도살한 궐영수야말로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악질이네. 잘 죽였어, 훌륭해.”
‘잘 죽였어, 훌륭해……,’
여러 문관들이 마음속으로 묵묵히 이 한마디를 읊었다.
그들 중에 누군가는 이익을 위해 타협하길 원했다. 누군가는 황권을 거스를 엄두를 내지 못했으며 누군가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며 몸을 사렸다. 누군가는 가슴에 의분이 가득 찼으나 형세와 원칙에 쫓겨 침묵하였다.
하지만 옳고 그름에 관해선 사람들 모두 마음속에 저울이 하나씩 있었다.
위연과 왕 재상은 놀라지도 의아해하지도 않고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들은 마치 이 상황을 진작에 예견한 듯했다.
“하루면 충분합니까?”
위연이 담담하게 말했다.
“충분합니다.”
왕 재상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 * *
원경제는 침전 안에서 입구를 등진 채 한마디도 하지 않고 뒷짐 지고 서 있었다. 옆에서는 늙은 태감이 차마 기를 펼 엄두가 나지 않은 마음에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는 원경제를 여러 해 모셨기에 이 제왕의 성정을 아주 잘 알았다. 그는 감정을 분출하기 위해 탁자를 젖히겠지만, 그 행동은 그저 감정을 쏟아내기 위함일 뿐이었다. 그는 막상 감정을 다 쏟아내고 나면 문제가 되었던 일을 진정으로 마음에 담아두지는 않았다.
하지만 만약 그가 일주향 이상 침묵한다면, 이 제왕이 진지해지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그는 마치 강적을 맞닥뜨린 듯 진지하게 계산하고 일을 계획했다.
정말 이상한 부분은 진북왕 사건을 처리할 때 그는 분명히 이렇게 침울하고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는 오히려 허칠안이 두 국공을 납치한 후 뜻밖에도 이렇게 ‘흉한 꼴을 보였다.’
설령 허칠안이 두 국공을 죽여 분풀이했다고 해도 폐하께 손해는 아니었다. 어쨌거나 폐하의 목적은 이미 달성했기 때문이다.
이때 발소리가 빠르게 들려오더니 시위가 문 앞에 멈췄다.
원경제는 몸을 홱 돌려 나지막이 말했다.
“말해라!”
시위는 문 앞에 서서 공수했다.
“허칠안이 두 국공을 채시구에서 참수했습니다. 그, 그리고…….”
원경제는 조국공과 호국공이 참수됐다는 걸 듣자 성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소리쳤다.
“단번에 얘기하거라!”
시위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천여 명의 백성들 앞에서 폐하를 비방했습니다. 폐…… 폐하께서 진북왕이 백성을 대량 학살하게끔 종용하고, 호국공 궐영수가 칼을 잡았다고 말이죠.”
원경제는 눈동자가 돌연 수축했다. 몇 초 후, 그는 소매 속에 모았던 손을 약간 떨었고 얼굴에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그가 또박또박 말했다.
“이 개자식이 아직 살아 있는가?”
“그, 그가 사천감에 갔는데 통솔자들이 막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가 손에 조각칼을 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위는 황제의 분노를 감지하고는 전전긍긍하며 말했다.
금란전 안은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만큼 무서울 정도로 적막했다.
경직된 분위기에 늙은 태감은 숨조차 쉴 엄두가 나지 않았고, 퉁퉁한 몸을 약간 떨었다.
한참 뒤 원경제는 아무런 감정 없는 목소리로 전했다.
“즉시 사람을 보내 허칠안 가족을 체포한다. 감옥으로 압송한 뒤 처분을 기다리도록 해라. 만약 거역하면 그 자리에서 사살한다. 금군 오백 명을 파견해 사천감으로 허칠안을 체포하러 가라. 내각에 통지하여 즉시 포고를 입안하라. 은라 허칠안은 무신교 간첩으로 정흥회 사건을 빌어 소동을 일으켜 우리 대봉 황실의 명성을 해쳤다.”
늙은 태감이 명령을 받들어 떠나자 원경제는 목소리를 낮추고 혼잣말했다.
“더는 기운이 흩어져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