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5화. 분노 (4)
날이 이미 밝았다. 내성 거리 위에는 행인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허칠안은 이묘진이 빌려준 비검을 밟은 채 단숨에 황성을 빠져나와 내성 거리에 가뿐하게 떨어졌다.
그런 뒤, 그는 국공 나리 둘을 들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며 거리를 지나갔다.
길가의 행인이 가장 먼저 눈길을 준 상대는 공작 조복(朝服)을 입은 조국공과 호국공이었다.
“엇? 허 은라 아니야? 야경꾼 차복을 입지 않으니까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네.”
누군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가 손에 든 게 누구지? 이, 이건 망포인가? 거물이다…….”
“나는 저 사람을 알아. 애꾸눈이잖나. 그는 어제 성에 들어온 호국공 궐영수네.”
“초주성 포정사 정흥회가 요족, 오랑캐와 결탁하여 진북왕을 죽였다고 고발한 호국공?”
평범한 백성이 공작을 알기란 어려웠다. 그들은 조국공은 몰랐지만, 호국공은 어제 남의 이목을 끌도록 자기를 한껏 과시하며 거리를 지나갔기에 내성 백성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허 은라가 그를 들고 뭘 하는 거지? 저자는 공작이잖나. 도,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한 거지?”
“뭘 하려는지 신경 쓸 필요 없어. 저자가 무슨 공이라고 그랬지? 틀림없이 초주 사건에 연루됐을 거야. 집에 있는 아내를 불러 구경하러 나오라고 해야겠네.”
“여보, 나 대신 노점 좀 보고 있어요. 내가 따라가서 볼게.”
“하지만 바깥양반, 저도 보러 가고 싶다고요…….”
길거리 행인들은 이 사태를 놀랍고도 이상히 여기는 마음으로, 눈앞의 광경을 손가락질하며 지켜보았다. 그들은 함께 모여 떠들썩하게 즐긴다는 마음가짐으로 허칠안을 따라갔다. 심지어 노점상은 노점 자리마저 버리고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따라갔다.
그들은 단순히 구경거리를 보려고 모이는 게 아니었다. 그저 이 일이 허 은라와 관련 있고, 또 어제 남의 이목을 끌도록 과시하며 거리를 지나다닌 공작이 나타났으니 지나가는 이들의 호기심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 모여들어 점점 많아졌다.
서서히 넘쳐나는 인파가 되었다.
이는 바로 허칠안이 원하는 상황이었다. 단칼에 궐영수를 베는 게 깔끔하겠지만, 그가 원하는 결과는 아니었다.
* * *
마침내 그는 두 공작을 들고 채시구 형장에 이르렀다.
형장은 채시구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곳에 사람이 많은 게 주된 이유였다. 공개적으로 참수해야 하는데, 사람이 많지 않으면 어떻게 공개적으로 백성들에게 보이겠는가.
채시구의 백성은 즉시 허칠안에게 주의를 기울였다. 정확하게 말해 쏟아져나오는 인파에 주의를 기울였다.
“어, 어찌 된 일이지?”
채시구 쪽의 백성들은 깜짝 놀라 멍해졌다.
“허 은라 아닌가?”
채시구가 인파로 뒤덮였다.
허칠안은 조국공과 호국공을 형대에 내던지고 칼을 뽑아 그들의 손발 인대를 끊었다.
뒤이어 그는 두 손으로 각자 조국공과 호국공의 머리를 잡아들고 그들이 고개를 들게 했다. 허칠안은 웃었다.
“봐라,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으니 오늘 죽어도 가치 있겠구나.”
궐영수는 두려운 나머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 나는 일등 공작이자 개국 공신의 후손이다. 너, 너는 나를 죽이면 안 된다, 나를 죽이면 대봉에 네가 발붙일 곳은 더는 없을 것이다.”
전쟁터를 누비고 다닌 도지휘사는 이 순간에 군인의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되네. 본공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모든 걸 만회할 수 있네. 본공이 폐하께 자네를 너그러이 용서하라고 간청드릴 것이네. 본공이 맹세하네…….”
그는 아직 미래가 밝았다. 그는 막 조당에서 승리를 거둔 시점에 이렇게 죽을 수 없었다.
조국공이 침을 삼키더니 말했다.
“허칠안, 자네는 폐하께서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하네. 우리를 죽이면, 설령 죽음을 면하는 금패가 있다고 해도 자네를 구할 수 없을 걸세. 우리를 놓아주게. 아직 되돌릴 여지가 있어.”
허칠안은 웃었다.
“만약 내가 그를 두려워했다면, 너희 둘을 데리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
허칠안은 차분한 눈빛과 부드러운 어조를 유지하며 말했지만, 조국공의 마음속에선 두려움이 폭발하였다. 조국공은 마늘을 빻는 것처럼 머리를 조아렸다.
“허 은라, 본공이 잘못했네. 제발 나를 놓아주게, 나를 놓아줘……. 전부 호국공 궐영수와 폐하의 잘못이네. 그들이 백성 대량 학살 사건을 꾸몄네. 그들이야, 그들이라고.”
“닥쳐!”
궐영수가 크게 소리쳤다.
“닥쳐야 할 사람은 자네야!”
조국공이 흉악한 얼굴로 말했다.
“자네는 그를 알지 못하네. 자네는 경성에 있지 않으니 그를 전혀 알지 못해. 그는 미친놈이야, 미친놈이라고. 그, 그는 정말 우리를 죽일 걸세.”
“큰 소리로 말해 보아라. 누가 초주성의 백성을 도살했는지 백성들에게 알리거라!”
허칠안은 칼을 뽑아 조국공의 목덜미에 들이댔다.
얼어붙은 칼끝이 마치 혈관을 응결하는 듯했다. 조국공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입술을 덜덜 떨었다. 무너져가는 그가 소리쳤다.
“진북왕과 호국공 궐영수 그들이 성안의 백성을 도살했다.”
“아직 부족하다!”
허칠안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폐하도 계신다. 폐하께서는 모든 걸 알고 계신다. 그는 진북왕이 성안의 백성을 대량 학살하려는 걸 알고 계셨다……. 나를 죽이지 말게. 제발 나를 죽이지 말아줘.”
조국공은 눈물을 흘리며 목놓아 울었다.
쿵쿵.
주변의 백성들은 순간 이성을 잃었다.
지금 우리가 뭘 들은 거지? 초주성 38만 백성을 도살한 게 진북왕과 궐영수이고, 그들의 군왕, 그들의 폐하가 이 모든 걸 종용했다고?
“어쩐지 정 포정사가 죽은 것도 그들에게 죽임당한 것이구나!”
누군가가 눈을 붉히며 큰 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그가 진북왕을 종용해 백성들을 대량 학살했다니…….”
백성들은 눈만 크게 뜬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는 원망과 실의가 스쳤다.
그들은 따라와서 구경했다가 이런 광경을 볼 줄은, 이런 말을 들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대봉의 친왕이 백성을 대량 학살하고, 대봉 황제는 묵인했다.
그렇다면 이들이 언젠가 칼을 그들에게 겨눌 수도 있지 않을까?
자리에 있는 천여 명의 백성들, 빽빽한 인파 사이의 그들은 마음속에 무언가가 무너져내리는 듯했다.
이때 채시구 주위의 용마루 위에서 한 형체가 도약하며 왔다. 그들 중 누군가는 금군 갑옷 차림이었으며 누군가는 평상복차림이었다. 하지만 기운은 전부 강했다.
“폐하의 명이다, 허칠안을 벌하여 죽인다!”
십여 명의 사람 형체가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넘실대는 해조 같은 기기로 허칠안을 곧바로 덮쳤다.
인파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천둥처럼 진동했다. 금군들이 말을 채찍질하며 오더니 채찍을 휘둘러 인파를 내몰았다.
호국공 궐영수는 미친 듯이 기뻐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빨리 본공을 구하고, 이 자식을 죽여라!”
조국공의 절망적인 눈빛에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어 들끓는 증오로 허칠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침 이때, 하늘에서 청광 한 줄기가 내려와 ‘땅’하는 소리와 함께 형대에 박혔다.
형광이 번쩍이자, 떼거지로 달려들던 고수들이 벼락을 맞은 듯 일제히 날아가 공중에서 미친 듯이 선혈을 내뿜었다.
“드디어 왔군!”
허칠안은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듯했다.
그건 예스럽고 소박한 검은색 조각칼이었다.
종이가 나타나지 않았던 시절에 그 유가 성인이 조각칼을 사용해 대대로 전해지는 경전을 새겼다.
그는 어제 이미 원장 조위의 동의를 얻은 뒤, 황궁을 떠나기 전에 조각칼을 소환했더랬다.
청광이 맴도는 조각칼은 형대 앞에서 빛의 장막을 형성했다.
허칠안은 한 발로 조국공의 등을 밟고, 장외 백성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기기를 운행하여 한 글자 또박또박 세찬 천둥소리처럼 말했다.
“조국공이 충신을 모함하고, 악인을 도와 악행을 저질렀다. 호국공 궐영수와 동조하여 초주 포정사 정흥회를 죽였으니 대봉 율법에 따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참수한다!”
그는 흑금장도를 들어 묵직히 내리쳤다.
사람 머리가 굴러떨어졌다.
선혈이 형대에 튀었고, 백성들 눈에 쓸쓸한 핏빛을 남겼다.
조국공이 처형당했다.
“안 돼……!”
궐영수의 입에서 절망적인 포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국공의 죽음은 그를 깊이 자극했다.
조국공이 한 말대로 이자는 미친놈이었다, 미친놈!
“허칠안, 허 은라, 허 대인, 본공이 잘못 알았네. 본공은 진북왕에게 현혹되어서는 안 됐네. 본공이 잘못했어. 제발 본공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게. 나를 죽이지 말아……!”
궐영수는 울부짖었다.
그는 수많은 백성 앞에서 죄를 인정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대성통곡했다.
“알고 보니 너 역시 두렵구나!”
허칠안이 냉소를 지었다.
“그렇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마치 네가 긴 창으로 꿰뚫은 아이처럼, 네가 쏘아 죽이라고 명령한 백성들처럼, 네가 무참하게 감옥에서 목 졸라 죽인 정 대인처럼 말이다.”
“너희들 어서 본공을 구해라, 너희들 어서 본공을 구하라고. 제발, 어서 본공을 구해라!”
거대한 공포가 궐영수의 가슴을 후벼팠다. 그는 조각칼의 청광에 상처 입은 고수들을 향해 절망적으로 울부짖었다.
그는 머리 꼭대기에 도살용 칼이 걸려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허칠안이 초주 백성 대량 학살 사건을 위해, 정흥회를 위해 그를 죽일 거라는 점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이 자가 왜 상관없는 백성들을 위해 이 정도까지 하려는지 알지 못했다.
허칠안은 도살용 칼을 내려치지는 않았지만, 호국공의 죄악을 선고하려 했다. 그는 죽어야 할 자를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초주 도지휘사, 호국공 궐영수는 회왕과 함께 무신교와 결탁하여 초주성의 백성을 남김없이 학살하였다. 무고한 인명을 수없이 죽였으니 용서할 수 없다. 사건이 발생한 후, 원경제와 공모하여 초주 포정사 정흥회를 모함하고 감옥에서 목 졸라 죽였다. 무고한 인명을 수없이 죽였으니 용서할 수 없다. 오늘, 이를 선고함으로써 즉각 참수형을 집행한다!”
푹!
그가 손을 들어 칼을 내려치자 사람 머리가 뒹굴며 떨어졌다.
세상이 거꾸로 뒤집힌 궐영수는 쪽빛 하늘과 자신의 시체를 보았으며, 냉소를 지으며 선 허칠안을 보았다.
“용서…….”
그의 머리가 땅에 굴러떨어졌고 입술이 움직였다. 이내 끝없는 어둠이 그를 집어삼켰다.
“후…….”
허칠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마치 가슴 속의 울분을 모두 토해낸 듯했다.
백성들은 그를 쳐다보았다. 현재 이곳은 분명히 인파로 가득찼건만 무서울 정도로 적막했다.
허칠안은 이런 적막한 속에서 손을 뻗어 품에 넣더니 그의 신분을 상징하는 은패를 꺼냈고, 단칼에 베어 부러뜨렸다. 콰당, 두 동강 난 은패가 떨어졌다.
그는 칼을 짚은 채 광기를 부리며 웃었다.
“위 공, 허칠안은…… 벼슬을 그만두겠습니다.”
* * *
먼 곳의 용마루 위, 붉은 옷을 입은 자가 입을 가린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 뒤에서 오늘 특별히 새하얀 긴 치마를 입은 회경은 넋이 나간 채로 형대 위에서 그가 방자하게 웃음 짓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군중 밖에 있던 평범한 자태의 부인은 늦게 오는 바람에 넘쳐흐르는 인파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지 못했다.
그녀는 바깥에 서서 먼 곳에 있는 그 남자가 죄를 공표하고,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한 뒤 미친 듯이 박장대소하는 걸 들었다.
모남치는 갑자기 그녀가 행운아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