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타경-508화 (505/712)

508화. 폐하의 뜻

허칠안은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백성들에게 있어 초주성이 파괴된 사건이 그렇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요. 모든 죄는 요족과 오랑캐 두 종족과의 전쟁으로 귀결되니까요. 진북왕 역시 백성을 대량 학살한 살인마에서 대봉의 변방을 수호했던 영웅으로 둔갑하겠지요. 게다가 그는 요족의 3품 강자를 죽였으니 엄청난 공을 세운 셈이 될 테고요.”

회경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청아한 목소리로 동기의 악함을 책하며 이야깃거리를 던졌다.

“만약 자네가 제공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허칠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북왕은 아예 죽은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살아있다면, 제공들은 틀림없이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를 타도하려 할 터였다.

하지만 그는 지금 죽었다. 죽은 사람이 무슨 위협이 되겠는가? 이제 제공들의 핵심 동력은 절반이나 줄어들었다.

만약 정말 조국공이 한 말처럼 초주성 백성 대량 학살 사건의 진상을 바꿀 수 있다면, 이 일은 추문(醜聞)에서 공적과 은덕을 찬양할 가치가 있는 대첩(大捷)으로 변한다.

그럼 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회경이 말했다.

“아바마마의 다음 방법은 이익을 약속하는 것이네. 조당에서는 이익이야말로 영원한 거니까. 아바마마께서 결말을 바꾸고 싶으면, 위에 언급한 계책 외에 그는 충분히 양보해야 하네. 제공들은 생각하게 될 테지. 만약 정말 추문을 호사로 바꿀 수 있고, 또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있다면 그들이 여전히 이렇게 고수할까?”

허칠안은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리고 일단 대부분 사람의 생각에 변화가 생기면, 위 공과 왕 재상은 대세를 마주한 사람이 되네. 하지만 그들은 궁문을 닫을 수 없고, 밀려오는 대세를 막을 수 없어.”

회경의 싸늘한 웃음 속에는 약간의 비웃음이 있었다.

허칠안은 순간 그녀가 원경제와 제공 그리고 위연과 왕 재상을 비웃는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들 전부 혹은 자기 자신을 비웃는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일은 이렇게 커졌으니 조정에서 공고 하나 내린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경성 내의 유언비어가 난무하는데 소문을 바꾸고 싶으면 반드시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가 조당 신하들의 입을 막을 수는 있지만, 세상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는 없지요.”

허칠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바마마께서는 후수가 있네…….”

회경은 탄식했다.

“비록 내가 모르지만, 나는 지금껏 그를 얕잡아본 적이 없다네.”

두 사람은 더 이상 얘기하지 않고 한참을 침묵했다. 곧 회경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 일은 자네와 관련 없으니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게.”

‘그녀는 내가 이 일에서 어떤 역할을 발휘할 수 있는지 모르지. 하긴, 나는 일개 보잘것없는 자작이고 은라라 금란전조차 들어가지 못하는데 어찌 한 나라의 군주와 싸우겠어? 투쟁 놀이에 내가 또 경험이 미천하니 회경도 나는 안 될 거라고 생각하나 보지…….’

허칠안은 입꼬리를 올리며 보기 흉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나야말로 길리지고를 죽인 영웅이라고.’

* * *

위연은 점심 식사 후 야경꾼 관아 호기루에서 잠시 쉬던 중, 갑자기 들어온 하급 관리가 부르는 소리에 깼다.

“위 공, 폐하께서 사람을 보내 호출하셨습니다. 입궁하라 하십니다.”

하급 관리가 고개를 숙이고 몸을 굽혔다.

……위연은 몇 초간 잠자코 있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차를 준비하거라.”

* * *

황화리목(黃化梨木)으로 만든 팔각 탁자에 황포를 입은 자와 청의를 입은 자가 황궁 어화원의 밝은 노란색 휘장을 드리운 정자 안에 앉아 있었다.

위연과 원경제는 나이가 엇비슷했다. 하지만 한 사람은 혈색이 좋은 데다 머리에도 흑발이 가득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양쪽 귀밑머리가 일찍이 희끗희끗해진 데다 눈에는 세월이 누적된 온갖 풍파가 서려 있었다.

만약 두 남자를 술에 비교한다면, 원경제는 가장 밝고 선명하며 가장 존귀한 주전자와도 같았다. 반면 맛을 논하자면 위연이 훨씬 진하고 향기로웠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다.

원경제는 위연이 거두어간 흰돌을 쳐다보면서 탄식했다.

“회왕이 몰락한 후, 이 북경에 기둥이 없어졌네. 당분간 오랑캐는 풍랑을 일으키지 못할 테지만, 만약 동북 무신교가 북경을 우회하며 초주로 들어온다면 바로 경성으로 돌진하여 짐을 죽이러 올 것이야!”

원경제는 말을 하는 사이 바둑돌을 내려두었다. 바둑돌이 바둑판을 두드리는 낭랑한 소리 사이로 형세가 갑자기 한쪽으로 기울었다. 흰 돌이 날카로운 검을 이루어 바론(*lol 캐릭터)을 압박했다.

“쯧, 위 경 오늘 바둑 두는데 좀 정신을 딴 데 팔았구먼.”

위연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검은 돌을 비비 꼬았다.

“기둥이 너무 높고 너무 크면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무너지는 때, 상대는 물론이고 본인도 다치게 되지요.”

그는 계속해서 나긋나긋하게 바둑돌을 두었다.

두 사람은 잡담을 나누면서 승부를 겨루었다. 원경제는 네다섯 번 돌을 둔 뒤, 담담하게 말했다.

“며칠 전에 태자가 자객을 맞닥뜨려 후궁의 모든 사람이 불안에 떨고 있네. 황후 역시 좀 놀라서 한동안 제대로 못 먹고, 잠을 잘 자지 못해 초췌해졌더군. 위 경, 하루빨리 자객을 잡아 이 일을 떨쳐버려야 황후도 무서워서 흠칫흠칫할 필요가 없을 걸세.”

위연은 바둑판을 쳐다보더니 바둑돌을 던져 패배를 인정했다. 그는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폐하, 바둑에 조예가 점점 깊어지십니다.”

그런 뒤 그는 일어서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읍했다.

“소신이 직무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소신, 반드시 최선을 다해 하루빨리 자객을 잡겠습니다.”

원경제는 크게 웃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각, 망포를 입은 중년 태감이 환관 둘을 데리고 재상 왕정문을 만나 뵈러 내각의 문연각에 왔다.

그는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대태감은 불과 일각 만에 환관 둘을 데리고 떠났다.

재상 왕정문은 무표정으로 탁자 뒤에 앉아 마치 고요한 조각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 * *

원경제는 이튿날 조회에서 여전히 제공들과 초주 사건에 관해 논쟁하였으나 어제처럼 격렬하지는 않았다. 금란전 전체에는 적대적인 분위기가 만연했다.

비록 오늘 조회에서도 이 문제는 여전히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비교적 평화로운 방식으로 조회를 마쳤다.

정흥회는 오랫동안 관리 사회를 겪은 사람답게 불안한 냄새를 맡았다. 그는 어제 우려했던 문제가 결국에는 모습을 드러냈다는 걸 깨달았다.

제공들은 조회에서 여전히 뜻을 굽히려 하지는 않았지만, 어제처럼 진북왕을 단죄해야 한다고 강하게 뜻을 고수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훈귀들이 경성의 유언비어를 어떻게 없애고 초주 이만 병사의 이 일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바꿀지 언급했을 때, 일부 문관은 책망한다는 명목으로 토론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흥회를 가장 원망스럽게 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위연과 왕정문이 전 과정 내내 침묵을 지켰다는 점이었다.

정흥회는 조회가 끝난 뒤 말없이 걷던 중,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그에게 소리치는 걸 들었다.

“정 대인, 들어가십시오!”

그는 멍하니 고개를 돌려, 공작 관복을 입은 조국공이 쫓아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역력했다.

정흥회가 보기에 이는 승리자의 미소였다.

“정 대인, 사사로이 초주를 떠나서 경성에 들어와 고자질하다니. 자신이 대세를 업고 왔다고 여겼을 텐데 오늘 같은 날이 올 거라 생각해 본 적은 있는가?”

조국공은 태연자약한 태도로 담담하게 말했다.

“본공이 그대에게 밝은 길을 제시해 주겠네. 현재 초주성에는 일이 많이 밀려 있고, 그대는 초주 포정사네. 그러니 그대는 이 순간 초주에 남아 초주성을 재건해야 하지. 경성에 관한 일이라면 더 이상 개입하지 않아도 돼.”

그는 고개를 돌려 등 뒤에 있는 금란전을 쳐다보더니 일깨워 주었다.

“이건 폐하의 뜻이기도 하네.”

폐하의 뜻은 그대가 만약 적당한 시기를 봐서 물러나면 여전히 초주 포정사라는 것이었다. 이는 왔던 곳으로 다시 꺼지라는 말이었다. 어쨌든 초주는 경성에서 몇만 리나 떨어져 있으니 짐은 그대를 안 보는 편이 차라리 속 편하다는 뜻이었다.

“퉤!”

정흥회는 침을 뱉어 이에 대답했다.

“은혜를 모르는 놈.”

조국공은 정흥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

* * *

야경꾼 관아, 호기루.

위연은 정흥회가 조회를 마치고 가장 첫 번째로 방문한 사람이었다.

허칠안은 오늘 조당의 움직임을 줄곧 주시했다가 마침 역참으로 정흥회를 찾아가 상황을 물으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허칠안은 그가 위연을 찾아온다는 소식에 바로 호기루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밑에서 수위에게 가로막혔다.

“위 공께서 말씀하시길 손님을 만나는 동안에는 누구도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위 공께서는 한동안 대인을 만날 계획이 없으십니다. 대인을 여러 번 내쫓지 않으셨습니까?”

수위와 허칠안은 잘 아는 사이라서 말이 오가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허칠안 역시 사람을 때리는 데 거리낌이 없었기에 끊임없이 그자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는 때리면서 욕을 퍼부었다.

“자네는 말이 많아, 말이 참 많아…….”

* * *

희끗희끗한 귀밑머리의 위연이 7층에서 청의를 입은 채 탁자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등이 점점 굽어가고 마찬가지로 머리가 희끗희끗하며, 눈썹 사이에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맺힌 정흥회가 있었다.

“경찰이 끝날 때 정 대인이 보고하러 경성에 돌아와 본좌가 자네와 한 번 만난 적 있지. 그때 자네는 머리가 희끗희끗했지만, 정력은 아주 좋았네.”

위연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며 그의 눈빛은 연민에 차 있었다.

그가 오늘 다시 보니 이 자는 영혼을 잃은 듯했다. 짙은 눈두덩이와 눈의 핏발은 그가 밤에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걸 암시했다.

아래로 살짝 처진 입꼬리와 눈썹 사이의 응어리는 상대 마음속의 원념이 짙고, 풀리기 어려움을 의미했다.

“위 공께서도 포기하실 작정이십니까?”

정흥회는 나지막이 말했다.

“저는 허칠안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가 타고난 무사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경우에는 그의 기질 때문에 골치 아프기도 하지요.”

위연은 동문서답하였다.

“내가 그에게 말했네. 관리 사회에서 힘들게 버티려면 세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일세. 위험을 고려하고, 물러날 때를 생각하고, 변화를 헤아리라고, 일을 하기 전에 이 일이 가져올 결과를 고려하고, 그 속의 이해관계를 파악해서 할지 말지 저울질해야 한다고. 만약 대세를 막을 수 없다면, 그 칼끝을 피하고자 물러날 때를 생각해야 하네. 우리의 폐하께서는 아주 잘 하시지. 물러나기만 하면 안전해지고, 그제야 정세를 어떻게 바꿔야 할지 생각할 수 있다고 말이야. 허칠안 이 자식이 내게 ‘이 이치들은 저도 다 알지만, 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더군. 허, 저속한 무사 같으니라고.”

정흥회는 허 은라가 산굴에서 한 말이 떠올랐다. 그는 진북왕의 세력이 크다는 걸 확실히 알면서도 초주로 사건을 조사하러 갔다. 정흥회는 그의 융통성 없고 진지한 얼굴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위 공께서 ‘저속’이라는 두 글자를 내뱉게 할 수 있다는 게 바로 위 공께서 그를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걸 의미하지요.”

정흥회는 위연이 하는 말에 담긴 의미를 이해했다. 하지만 그는 허칠안처럼 자신이 지켜야 할, 절대 물러서지 않을 임계점을 지니고 있었다.

* * *

그는 홀로 아래층으로 내려가 건물 밑에서 기다리는 허칠안을 만났다.

“정 대인, 제가 역참으로 데려다드리겠습니다.”

허칠안이 그를 맞이했다.

“본관, 역참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정흥회는 고개를 저으며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미안합니다, 허 은라를 실망시켰군요.”

허칠안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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