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4화. 개막 (1)
침전 안에 있던 늙은 태감은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그는 문턱을 넘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화를 냈다.
“폐하, 그, 그 허신년이 또 밖에서 큰 소리로 욕을 하고 있습니다. 실로 가증스럽습니다. 그를 죽이셔도 됩니다.”
원경제는 의자 위에 앉아 손에 도교의 경전을 쥐고 있었다. 그는 이 말을 듣더니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를 죽이면, 정말 몰아치는 세력을 막을 수 없이 군중의 분노를 사고 말 것이다.”
늙은 황제는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제 위연은 무슨 행동을 취했나?”
늙은 태감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위 공께서는 밤에 은밀하게 왕 재상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이 말속에는 조당의 맹호 두 마리가 사사로이 동맹을 맺었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위연과 왕정문은 조당에서 가장 큰 두 당파를 상징했다. 만약 그들이 손을 잡는다면 어느 누구도 그들의 적수가 되지 않았다. 설령 폐하라고 해도 두 사람에게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다.
그해 매관매직이 한창이었는데 그 후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모조리 박멸했더랬다. 팔아넘긴 관직과 부여한 작위는 5년 사이에 파면할 건 파면하고, 참수할 놈은 참수하여 왕 재상이 절반은 회수했다.
늙은 황제는 웃더니 하찮게 여긴다는 듯이 돌아서서 물었다.
“궁 안에 이상한 점은 없나?”
늙은 태감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잠잠합니다. 그런데 어제 임안공주마마께서 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회경공주마마께서는…….”
늙은 황제가 눈을 가늘게 떴다.
“회경은 왜?”
“출궁하셔서 회경부로 돌아가셨습니다.”
늙은 황제는 한참을 침묵한 뒤, 음 소리를 내더니 분부했다.
“잠시 후에 만일 임안이 와서 알현을 요청하면, 그녀에게 돌아가라고 하거라.”
* * *
셋째 날, 군신들은 여전히 궁문에 모여 있었다. 하지만 세심한 사람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인원수가 거의 변하지는 않았더라도, 큰 권력을 손에 쥔 일부 대신들은 오늘 오지 않았다. 허칠안은 야경꾼 관아에서 회경공주 저택의 시위장을 만났다. 그들은 장공주의 명을 받들어 공주 저택에 가서 담소를 나누게 하기 위해 허칠안을 부르러 왔다.
현재 황궁은 분쟁의 장소가 되었기에 어떤 관리도 궁에 들어갈 수 없었다. 궁 안의 황자, 황녀 그리고 비빈들은 자연스레 관리를 소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회경공주도 나한테 할 말이 있다는 건가?’
허칠안은 즉시 시위장을 따라 애지중지하는 암말을 타고 회경부로 달려갔다.
* * *
회경부는 황성 지역에서 가장 높고 수비가 가장 삼엄한 구역에 있었다.
이 구역에는 황실 종친의 저택이 있었기에, 여기는 임안 등 황자와 황녀의 저택이 있는 황궁 다음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좌우간 나는 초주 사건의 수석 수사관이었다. 비록 지금은 폭풍의 중심에 있지 않지만, 나 역시 주요 관련 인물 중 하나다. 회경이 이 시기에 나를 뭐 하러 찾는 것일까. 너무 오랫동안 나를 만나지 못해 그리움에 사무쳤을 리는 만무하고…….’
솔직히 말해서 허칠안이 회경부를 오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히려 그는 이공주의 저택이라면 여러 차례 간 적 있었다. 시선이 너무 많거나 규칙에 어긋나는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허칠안은 임안 저택에서 전용 객실을 한 칸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었다.
회경부의 구조는 임안부와 달랐지만, 전체적으로는 적적하고 우아한 편이었다. 마당 안의 식물부터 장식품까지 모두 담박함이 스며들어 있었다. 허칠안은 환하고 널찍한 응접실에서 오랜만에 각시서덜취처럼 우아한 회경을 만났다.
그녀는 백색 궁군을 입고 옅은 노란색의 얇은 천을 걸쳐, 단순하면서도 소박하지 않게 보였다. 새까만 머리카락 절반은 풀어헤쳤고 절반은 쪽을 진 뒤 푸른빛의 옥잠 하나와 금보여 하나를 꽂은 채였다.
그녀의 이목구비는 빼어나면서도 입체감이 돋보였다. 정교한 눈썹은 길면서도 곧았고, 큰 눈동자는 반짝이면서도 깊이까지 지녔으니 마치 늦가을 후의 맑은 못 같았다.
“마마!”
허칠안은 읍을 올렸다. 본래 그는 웃으면서 그녀에게 자신이 선물한 도장이 마음에 드냐고 묻고 싶었다. 그는 입가에 말이 맴돌았지만 곧 놀릴 흥미가 사라졌기 때문에, 회경의 손짓을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내게 북경에 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게.”
회경은 담담한 표정을 내보이며 다소 무겁고 침울한 눈초리를 했다. 그녀는 마치 당장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없는 듯했다.
허칠안은 바로 초주에서 발생한 일을 자세히 일렀다.
회경은 그의 말을 다 들은 뒤 한참을 꼼짝하지 않더니, 더없이 아름다운 얼굴에 감정 없이 소리를 낮추었다.
“나와 같이 마당에 가서 걷자꾸나.”
* * *
공주부의 뒤 화원은 아주 컸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결코 어색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좋은 세월을 함께한 옛 친구와 상봉한 듯 화기애애했다.
“아바마마께서 잘못하셨어. 우선 회왕은 친왕이고 그다음이 무사이거늘.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위가 높을수록 먼저 고려해야 할 부분이 앉은 위치고, 이게 바로 자립의 근본인데.”
한참 뒤, 회경이 탄식했다.
“따라서 회왕은 백번 죽어 마땅해. 설령 이로 인해 대봉이 전봉 무사를 한 명 잃는다고 해도 말이야.”
‘그럼 네 아바마마는? 그 역시 백번 죽어 마땅하지 않나?’
허칠안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마마, 대의입니다.”
회경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청아하고 우아한 얼굴에 울적함을 내비치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이게 대의와 무슨 관련이지? 그저 쓸데없이 피가 들끓는 것일 뿐이야. 나는…… 아바마마께 실망했다.”
허칠안이 막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회경의 전음을 받았다.
“아바마마께서 궁을 닫고 나가지 않는 건 위축되어서가 아니라 그의 책략이다.”
‘회경공주는 수련 경지가 얕지 않구나. 전음을 하려면 반드시 연신경에 도달해야만 가능한데. 그녀는 줄곧 때를 기다렸나 보군…….’
허칠안은 속으로 깜짝 놀라 전음으로 반문했다.
“책략이요?”
회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전음으로 설명했다.
“자네, 주의하게. 요 사흘 동안 궁문을 막고 있던 문관들 중에 누가 갔고, 누가 왔는지 말이야. 또 그저 구경만 하는 자들은 누구인지.”
허칠안은 어안이 벙벙했다.
회경은 그를 쳐다보더니 계속해서 전음했다.
“회왕이 성안의 백성을 도살한 일은 경성에 퍼져나갔네. 간사한 신하든 어진 신하든, 분개하고 격앙되었든 아니면 명성을 얻기 위함이든 무릇 지식인이라면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 없지. 군중의 심리가 격앙되는 이 시기가 물결이 가장 센 시기네. 그러므로 아바마마는 그 칼끝을 피하기 위해 궁을 닫고 나오지 않는 거지.
하지만 첫 번째 북소리에 사기가 충천하고, 두 번째 북소리에 사기가 떨어지고, 세 번째 북소리에 사기가 고갈되는 법. 제공들이 침착해지고, 누군가 이름을 날리려는 목적을 달성하고, 관리 사회에 다른 목소리가 나타나면 그때가 진정으로 아바마마가 제공들과 힘을 겨룰 때일 것이네. 하지만 이날이 너무 멀지는 않을 거야. 본 공주가 장담하는데 3일 내일 거야.”
그녀는 말을 마친 뒤 또 ‘허’하고 소리를 내더니 비웃는 듯 경시하는 듯 말했다.
“지금 경성에는 사방에서 유언비어가 터져 나오고, 백성들은 놀라움과 분노로 들끓고, 각 계층에서 모두 왈가왈부하니 언뜻 보면 대세인 것 같네. 하지만 아바마마의 진정한 적수는 그런 잡상인들이 아니라 조정에 있어.”
허칠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하지만 회왕은 어쨌거나 백성을 대량 학살하였으니 그는 반드시 제공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잘못을 시인해야 합니다.”
회경은 비관적으로 탄식했다.
“왕 재상과 위 공이 어떤 수를 내보이는지 보자고.”
허칠안이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화제를 돌렸다.
“마마께서는 일찍이 운록서원에서 학문을 탐구하실 때 《대주습유》라고 하는 책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회경은 찬찬히 기억을 더듬더니 고개를 저었다.
“들어본 적 없네.”
* * *
이날 문관들은 가슴에 의분이 가득 찬 상태였지만 여전히 황궁에 난입할 수도 원경제를 만날 수도 없었다. 그들은 황혼 후 각자 흩어졌지만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내일 다시 오기로 약속했다. 만약 원경제가 해명하지 않으면 조정 전체가 마비될 터였다.
이날도 관리 사회에서는 역시나 다른 목소리가 나왔다.
누군가 근심하고 걱정하며 문제를 제기했다.
“진북왕이 성안의 백성을 대량 학살한 일을 모든 이가 다 아는데 조정의 위엄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세상 백성들은 아마 황실과 조정에 더할 나위 없이 실망했을 겁니다.”
진북왕은 폐하의 친동생으로 버젓한 친왕이었기에 평범한 왕이 아니었다.
동시에 그는 대봉의 군신이었으므로 백성들의 마음속에 북경 수호자였다. 이런 사람이 자신의 사욕을 위해 백성을 대량 학살하다니! 이 일이 가져온 후유증은 백성이 조정에게 신뢰를 잃은 데다 황실은 체면이 땅에 떨어지고, 민심을 전부 잃었다는 것이었다.
‘진북왕은 이미 처형당했다’라는 한마디로 정말 백성들 마음속의 상처를 말끔히 씻어낼 수 있겠는가?
이는 탐관오리를 벌하는 것과는 별개였다.
지난 20여 년 동안, 진북왕은 위용 넘치고 위대한 이미지였다. 그는 군신이자 북경 수호자인 1대 친왕이었다.
누가 감히 그런 그를 탐관오리와 비교할 수 있는가? 탐관오리를 죽이는 일은 조정과 황실의 위엄을 드러낼 뿐이었다.
하지만 만약 황실이 이렇게 잔인하고 포악한 행위를 저질렀다면, 백성들이 탐관오리를 벌할 때와 같이 손뼉을 치며 쾌재를 부를까? 아니다. 백성들의 신념은 무너질 것이며 그들은 황실과 조정에 관한 신뢰를 잃을 것이다.
우리가 찬양하고 받들어 모셨던 진북왕이 알고 보니 이런 인물이었다니.
백성들은 아마 더 과격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같은 날 동궁 태자는 황혼 후 침궁에서 자객의 습격을 받았다.
그날 밤 궁문을 폐쇄하고 금군이 온 황실을 수색하여 자객을 찾았으나 수확이 없었다.
이튿날 경성 네 개의 문이 폐쇄되었다. 재상 왕정문과 위연은 경성 오위와 부아 포졸, 야경꾼을 소집하여 온성을 수색하여 자객을 찾았다.
그들이 가가호호 수색하면서, 경성 전체가 난장판이 되었다.
* * *
“태자가 이 일과 무슨 관계지? 어째서 그는 아무런 까닭 없이 자객의 습격을 받은 거지?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게임의 일환인가? 만약 후자라면, 너무 끔찍하지 않나.”
허칠안은 이른 아침 이 소식을 들은 즉시 위연을 만나러 갔다. 하지만 위연은 그를 만나 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허칠안은 발길을 돌려 역참으로 갔다. 그는 정흥회와 논의할 작정이었다.
“정 대인은 외출하셔서 역참에 계시지 않습니다.”
이한이 쇠뿔로 된 활을 맨 채 허칠안을 맞이하며 방으로 들어와 나지막이 말했다.
“최근 관리 사회에 다른 목소리가 더러 나오더군요. 뭐라더라, 진북왕의 백성 대량 학살 사건은 아주 까다롭다며 조정의 위신과 각지의 민심이 얽혀 있으니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이죠. 정 대인께서 아주 화가 나 오늘 아침에 나가셨습니다. 아마 국자감에 설교하러 가신 듯합니다.”
‘그들은 전부 늙은 황제의 해군이라고…….’
허칠안은 개탄하면서 원경제에게 다소 탄복했다. 그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권모술수를 부렸으니 황위에 적합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머리가 아둔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이한과 함께 말을 타고 국자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