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화. 용솟음치는 암류 (1)
왕 재상은 모든 관원을 향해 공수하더니 늙은 태감을 따라 궁으로 들어가 어서방 편청 안까지 이르렀다.
늙은 태감은 환관에게 차를 내오라 분부하고 공손하게 말했다.
“재상 대인께서는 잠시 기다리시지요.”
그는 말을 마치고 떠났다.
왕 재상은 혼자서 의자에 앉았다. 그대로 한번 기다리니 반 시진이 흘렀다.
그 역시 급하지 않았기에 일단은 묵묵히 기다렸다. 붉은 장포, 높은 모자, 희끗희끗한 귀밑머리.
그의 표정은 평온했다. 기쁨과 슬픔이 드러나지 않지만, 때때로 보이는 아련한 눈빛은 이 노인의 감정이 보이는 것만큼 좋지 않다는 걸 깨닫게 했다.
마침내 발소리가 들려왔다.
왕 재상의 다소 탁한 눈이 약간 반짝였다. 그는 입구를 쳐다보았다.
늙은 태감이 망포 차림으로 팔오금에 먼지떨이를 낀 채 혼자 들어오더니 애석해했다.
“재상 대인, 폐하께서 슬픔을 견디기 어려워 대인을 만나지 않으시겠답니다.”
왕 재상 눈에 비친 빛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늙은 태감은 탄식하더니 말했다.
“폐하께서는 냉정해질 시간이 필요하십니다. 대인께서도 알다시피 회왕은 그의 친동생입니다. 폐하께서는 어릴 적부터 회왕과 감정이 아주 돈독하셨지요. 지금 별안간 가셨으니…….”
왕 재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공수하더니 어서방 편청을 떠났다.
왕 재상은 계단을 내려갈 때 참지 못하고 돌아서서 어서방을 향해 깊이 읍을 올렸다.
그런 뒤 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성큼성큼 떠났다.
* * *
늙은 태감은 왕 재상이 떠나는 걸 보자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듯 탁한 숨을 내뱉었다. 그는 왕정문의 눈빛이 좀 두려웠다. 그 눈에는 짙은 실망감이 서려 있었다.
그는 어서방을 지나쳐 침전으로 들어가 허리를 숙였다.
“폐하, 재상 대인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원경제는 눈을 뜨지 않고 ‘응’ 하고 소리 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정신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궁문에 모인 자들이 누구더냐.”
늙은 태감은 나지막이 말했다.
“올 사람들은 전부 왔습니다.”
원경제는 콧방귀를 뀌었다.
“짐은 이 개자식들이 평소에 서로 물어뜯는데 절반은 연기하고 있다는 걸 다 안다. 가증스럽고 괘씸한 놈들, 죽일 놈들!”
그는 잠시 분노를 표출한 뒤 평온을 되찾고 물었다.
“좌도어사 원웅이 왔는가?”
늙은 태감은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못 본 듯합니다.”
원경제는 다시 눈을 감고 한참을 침묵하였다. 늙은 태감은 일이 이렇게 지나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원경제의 말이 들렸다.
“오늘 오지 않은 자를 기록하거라. 앞으로 며칠간 계속 그리하라.”
“네!”
* * *
황혼이 되자 허칠안은 금홍색 석양 볕 아래에서 암말을 끌었고, 허신년은 그의 말을 끌고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포정사 정흥회와 5품 무사 신도백리가 동행하였다.
“정 대인, 대인께서는 역참에 머무십니까?”
허칠안이 걱정을 내포한 어조로 물었다.
정흥회의 관직이라면 내성 역참에 머무를 게 틀림없었다. 치안 조건이 좋고 또 신도백리 등의 사람들이 곁에서 호위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지금 그들의 적은 원경제이기에 어떤 일들은 어쩔 수 없이 방어해야 했다. 5품 화경 무사는 경성에서 정말 위협적이지 않았다.
“형님, 안심하십시오. 지금 진북왕이 성안의 백성을 도살한 사건으로 폐하를 최전선으로 몰았으며 정 대인 역시 최전선으로 몰렸습니다. 설령 폐하일지라도 이 시기에 지혜롭지 않은 행동을 하여 모두의 분노를 사지 않을 겁니다. 대세에는 완강히 저항할 수 없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허신년이 말했다.
정 포정사는 의아해하며 그를 쳐다보았고, 원한이 깊은 얼굴에는 한 가닥 찬사가 더해졌다.
“허 은라, 그대의 사촌 동생은 눈빛이 횃불 같고, 하는 말이 아주 옳습니다. 영예와 치욕에도 놀라지 않는 태도를 보아하니 장차 틀림없이 전도가 유망할 겁니다.”
허신년은 담담하게 웃었다.
‘아니, 그는 그저 오만과 허세에 습관이 들었을 뿐이야. 사실 내심 감당하는 능력은 그저 그래. 게다가 자주 사회적으로 매장당하지. 산이 무너지는 앞에서 아무런 내색하지 않을 대국수는 전혀 아니라고…….’
허칠안이 속으로 빈정댔다.
정 포정사는 허 색마의 속마음을 모른 채 추억을 더듬었다.
“그를 보니 위 공이 젊었을 때의 풍채가 떠오르는군.”
‘아니에요, 정 대인. 이 말을 위 공이 동의합니까……?’
허칠안은 억지로 입꼬리를 잡아당겼고, 끝끝내 침묵을 유지하였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정 포정사가 말했다.
“역참에 야경꾼 무리가 투숙하러 왔습니다. 이해하셨지요?”
‘위 공은 이미 방비했군. 정 대인의 안전을 고려하는 그가 있으니 나는 걱정하지 말아야겠군…….’
허칠안은 한시름 놓았다.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정 포정사는 공수하더니 신도백리를 데리고 떠났다.
허칠안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초주에서 경성까지 고작 열흘이었는데 정흥회의 뒷모습은 이미 등이 좀 굽었다. 마치 무슨 물건이 그의 어깨를 짓눌러 허리를 곧게 펼 수 없는 듯했다.
‘에휴…….’
그는 속으로 탄식했고, 암말의 등 쪽 곡선을 어루만지더니 몸을 뒤집어 올라탔다.
형제 둘은 말이 ‘다그닥다그닥’ 달리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집 쪽으로 향했다.
“정 대인은 가여운 사람이야. 원경 19년의 진사라네. 류 어사의 말을 들으니 부친이 일찍이 돌아가시고, 홀어머니가 온갖 고생을 하며 그를 키웠대. 어렵사리 그를 국자감에 보내어 진사에 급제했는데 결과적으로 본인께서는 여러 해 동안 고생하며 몸을 쥐어짜서 금의환향하는 아들을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더군.”
암말이 천천히 가는 사이, 허칠안이 말했다.
“그런 뒤 판에 박은 듯 융통성 없이 규율을 엄격하게 지키니 전임 재상의 미움을 사 초주로 내쫓겼대. 그는 초주에서 18년을 경영했으니 인생의 절반이 그곳에 남아 있지. 결국에는 하룻밤 사이에 흙먼지가 되었지만.”
허신년은 한참을 침묵했다. 그는 마음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울분을 다 토해낸 뒤 개탄했다.
“18년 동안의 혹독한 시련과 인생 절반의 대업이 이렇게 허망하다니.”
“이 얘기는 하지 말자고.”
허칠안은 극도로 울적한 마음을 벗어던지기 위해서인 듯, 점잖지 못한 웃는 얼굴을 내보였다.
“신년, 왕씨 집안 아가씨와 어디까지 진도 나갔니? 그…… 음, 네 모든 지식을 그녀에게 전수했니?”
허신년은 부드러운 얼굴을 붉히더니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진도를 나갔다는 말은 참 저속합니다. 제가 왕 소저에게 호감이 있는 건 인정합니다. 그녀는 교양 있고, 박학다식하며, 언사가 우아하고 저와 고금에 대해 논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재능 있는 여자는 회경공주마마 외에 여태껏 본 적이 없습니다. 그녀에게 마음이 좀 움직인 게 뭐가 이상한가요?”
‘아우야, 우리 형제 둘의 품위는 같단다. 나 역시 회경 같은 재녀(才女)를 좋아한다고. 아, 그녀 외에도 나는 임안 같은 푼수랑 채미 같은 먹보, 이묘진 같은 여협객, 종리 같은 애처로운 여인도 좋아해…….’
“사실 저는 줄곧 망설였습니다.”
허신년이 어쩔 수 없이 말했다.
“왕정문은 위연의 정적이니 사모 소저를 제게 시집보낼 거란 보장이 없지요. 그리고 저 역시 아직 그녀에게 장가들지 결정하지 않았고요.”
허칠안은 더 이상 입만 나불거리지 않고 침음하더니 말했다.
“이 문제는 우리 이미 한두 번 논의한 게 아니잖니. 너와 나 사이는 반드시 갈라져야 해. 너는 네 밝은 앞날을 향해 가고, 나는 나만의 외나무다리를 걷는 거야. 허, 위 공이 바로 외나무다리 아니니. 나는 네 근심을 알아. 왕정문이 나와 맞서라고 압박하여 집안싸움이 날까 봐 두려운 게지? 이 점에 관해서 큰형이 네게 한 가지 방법을 알려줄게.”
허신년이 겸손하게 가르침을 청했다.
“형님, 말씀하세요.”
허칠안이 작게 말했다.
“아내를 등에 업고 네 신분을 높여.”
“형님, 이게 무슨 뜻이에요?”
“네가 왕 재상의 딸에게 장가드는 건 상대적으로 인질이 생긴 셈이다. 왕정문이 이 적녀를 개의치 않지 않는 이상 말이야. 그게 아니면 너희 관계가 아무리 나빠도 그는 진짜로 정을 끊지 못할 거야. 이 정도를 잘 파악하면 너는 확고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어. 게다가 너는 전적으로 왕씨 집안에 의지할 필요 없어. 그저 허씨 집안에 여러 갈래의 길을 열어줄 뿐이야.”
“일리 있군요.”
허신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칠안은 그가 어느 정도 깨달은 걸 보자, 웃더니 전방을 주시하며 속으로 자신이 밖에서 부양하는 그 첩을 떠올렸다.
‘며칠 동안 보지 못했네. 내가 뜻밖에 그녀를 키우다니……. 대봉 제일 미인의 매력은 좀 이상한 것 같다. 낙옥형처럼 매력적이진 않은데 은연중에 감화되었나?’
그는 그녀가 도대체 어떤 내력을 지녔는지 정말 알고 싶었다.
‘음, 우선 첩을 여사친한테 맡겼으니 진북왕 사건이 끝을 맺으면 그녀를 만나러 가자. 그전에는 조심하고 신중할 필요가 있어. 종리 역시 우선은 데리러 가지 말고 사천감에 둬야겠다. 내가 요 며칠은 분명히 빈번하게 외출할 테니 그녀를 데리고 다니기엔 불편하다. 임안과 회경 역시 우선은 만나지 말자. 한동안 나는 틀림없이 궁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이 일은 황실과 관련 있다. 나 역시 연루된 셈이니 그녀를 만나고 싶지 않다.’
그가 끊임없이 궁리하는 사이 갑자기 허신년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형님, 모든 지식을 그녀에게 전수한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그는 처음에 교양 없는 저속한 큰형이 어휘 선택을 잘못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는 생각할수록 어딘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참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허칠안은 잠깐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남자가 한 여인을 사랑하는지 아닌지는 그가 모든 지식을 그녀에게 전수하길 원하는지 아닌지 보는 거란다.”
‘이런 표현법이 있다고?’
허신년이 말했다.
“그 여인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지 아닌지는요? 어떻게 알아챌 수 있지요?”
큰형은 연기경을 돌파한 후, 도화살이 끊이지 않았다. 언제나 절세미인과 함께 어울려 사랑을 속삭이는 영역에 있을 수 있었다. 허신년은 큰형을 꽤 인정하는 편이었다.
‘왕사모가 도대체 너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건지 아닌지 묻고 싶었지?’
허칠안은 아주 오랫동안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 여인이 그 지식에 보답하길 원하는지 아닌지 봐야지.”
‘큰형은 무슨 이상한 말을 하는 거야…….’
허신년은 그의 속내를 깨닫지 못하고, 가는 길 내내 그 의미를 연구하느라 바빴다.
* * *
“큰 오라버니…….”
그들이 저택에 들어서서 내청에 이르자 마침 저녁 식사시간이 되었다.
허영음은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큰 오라버니가 돌아오는 걸 보자 밥조차 먹지 않고 짧은 다리를 내디뎌 기쁨으로 맞이했다. 그런 뒤 그녀는 허칠안의 품에 머리를 들이받았다.
허칠안은 제 몸이 휘청거리자 다소 놀랐다.
‘보름 동안 보지 못한 사이에 콩알이의 기력이 이 정도까지 성장했다고?’
“요즘에 네 어머니의 화를 돋우지는 않았니?”
허칠안은 품에 콩알이를 안고서 내청으로 걸어갔다.
“엇? 제가 어머니를 자주 화나게 하나요?”
허영음은 의아해하며 반문했다.
자신은 분명히 이렇게 얌전한 아이인데 어머니는 항상 그녀 한평생 어찌 된 일인지 허영음을 낳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큰 오라버니, 둘째 오라버니 그리고 언니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허영음은 지금까지도 사촌 오빠와 친오빠의 차이를 확실하게 구별하지 못해서 줄곧 큰 오라버니 역시 어머니가 낳았다고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