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8화. 삼기(三氣) 원경제 (2)
원경제는 돌연히 소식을 전해 듣자 오히려 무표정한 얼굴로 멍하니 사절단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그는 다소 떨리는 손을 들어 상소문을 향해 뻗었다.
한참 뒤, 원경제는 상소문을 다 읽은 뒤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북왕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거지 같은 황제, 연기 진짜 쩌네……. 그와 위 공이 한 무대에 같이 출연해서 최우수 남주를 놓고 승부를 겨뤄도 되겠어…….’
허칠안은 비아냥거리는 방식으로 원경제를 비웃었다.
원경제가 성안의 백성을 도살한 일을 어찌 모를 리 있겠는가. 심지어 그는 배후에서 계략을 짠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진북왕이 여전히 북경에서 즐겁고 자유롭게 사는 줄 알고 일부러 그렇게 물었을 뿐이었다.
“폐하!”
수석 수사관인 허칠안이 대열에서 나왔다. 그는 자신이 이 칼을 직접 찔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개탄하며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폐하, 안심하십시오. 진북왕은 사람 구실을 못 했기에 천인이 함께 벌하여 지금 이미 처형당했습니다. 사절단이 그의 시체를 경성으로 운송하여 돌아왔고, 지금은 궁 밖에 있습니다. 이놈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폐하께서 결정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우르릉 쾅쾅!
원경제는 귓가에 우렁찬 천둥소리가 치는 듯했다. 그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핏기가 싹 가셨다.
그는 넋이 나간 채로 허칠안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조금씩 핏발이 서는 게 마치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는 이번에 정말 쉰 목소리로 말했다.
“자, 자네, 뭐라고 했는가……. 뭐라고 얘기하는 건가?”
허칠안이 큰 소리로 말했다.
“폐하, 진북왕의 시체는 갈기갈기 찢긴 채 궁 밖에 있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아주 철저히 죽었습니다.”
두둥……. 원경제는 나무 막대기로 이마를 한 대 맞은 듯 순간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뒤로 휘청거리더니, 눈앞에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넘어졌다.
“폐하!”
늙은 태감은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나아가 원경제를 부축함으로써 황제의 마지막 존엄을 붙잡았다.
“비켜라!”
원경제는 나지막이 고함을 치더니 갑자기 늙은 태감을 밀치고 비틀거리며 어서방을 미친 듯이 뛰쳐나갔다. 그의 뒷모습은 다급하기 그지없었고, 그의 낯빛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그는 더 이상 일국의 황제다운 위엄과 정기를 유지할 수 없었다.
“얼른, 얼른 따라가거라. 폐하를 보호하라, 폐하를 보호하라…….”
늙은 태감의 비명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허칠안은 고개를 숙인 채 입가에 차디찬 웃음을 지었다.
* * *
원경제는 어서방을 뛰쳐나갔다. 체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미친 듯이 질주했다. 바람에 그의 긴 수염이 휘날렸고 눈은 빨개졌다. 그는 황제가 아니라 피난 가는 가엾은 사람처럼 보였다.
궁문이 점점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원경제는 사절단을 따라 길을 떠났던 금군을 보았고 금군이 어깨에 멘 관을 보았다.
이 순간, 그는 도리어 멈춰 섰다.
늙은 태감은 환관과 시위들을 데리고 드디어 원경제를 따라잡았다. 그는 무거운 짐을 벗은 듯했다.
그들 역시 발걸음을 늦추었고 묵묵히 원경제 뒤에 섰다. 그들 중에서는 감히 소리를 낼 자가 없었다.
잠시 후, 원경제는 다시 발을 들어 천천히 금군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궁문으로 다가가 관 옆까지 걸어갔다.
“내려놓아라!”
늙은 황제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관을 가벼이 내려놓았다.
원경제는 조용히 서서 관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었다. 한참 뒤, 그는 손을 뻗어 관 뚜껑을 눌렀다. 원경제는 손이 관 뚜껑에 닿는 순간 이마의 핏줄이 튀어나왔다.
왜냐하면 관이 아주 얇았고 뚜껑이 가벼웠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경성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니 이 관에는 상징적으로 진북왕의 체면을 살려 주는 의미도 있었다.
그의 친동생인데 이런 관에 눕혀야만 했는가?
원경제는 관 뚜껑이 천천히 열린 뒤 안의 모습을 보더니 갑자기 다급해졌다.
진북왕의 시체는 생기 없이 바싹 말라서 마치 여러 해 동안 풍화된 미라 같았다. 그의 손과 발, 머리는 몸뚱이와 분리되어 있었다.
현장에 있던 금군과 우림위가 잇따라 무릎을 꿇었다. 일어서서 황제의 슬픔을 목도하는 일은 불경죄였다.
하지만 언제나 억척스러운 자는 몇몇 있었다. 예를 들어 따라 나온 허칠안과 사절단 사람이 그랬다.
허칠안은 두말하지 않고, 맹호가 착지하는 식으로 무릎을 꿇어 황제를 향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그는 나지막한 어조로 말했다.
“폐하께서는 반드시 용체를 지키셔야 합니다. 너무 슬퍼하시면 안 됩니다. 너무 감정이 치우치면 장수하실 수 없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원경제는 숨을 깊이 들이쉬어 그에 대한 증오를 이제 막 좀 덜어냈는데 이 자식이 하는 말이 들렸다.
“초주의 백성들이 폐하께서 그들을 위해 이렇게 슬퍼하는 걸 안다면 구천에서도 위안이 될 겁니다.”
원경제는 얼굴이 갑자기 굳더니 표독스럽게 허칠안을 노려보았다.
허칠안은 이때 이미 고개를 숙였기에 원경제가 은근슬쩍 ‘닥쳐’의 의미를 내포한 사나운 눈빛을 보내는 걸 보지 못했다. 그는 계속해서 소리 높여 말했다.
“진북왕이 초주성 38만 백성을 도살하였으니 백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가 죽었는데 죄명을 명확하게 하지 않았으니 시체를 효시할 건지 아니면 채찍질할 건지 폐하께서 결정해주십시오. 신은 아무런 이의가 없습니다.”
성을 지키는 우림위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관에 누운 사람이 대단한 명성을 지닌 진북왕이자 대봉 제일의 무사인 폐하 친동생인 걸 그때서야 알았다.
‘이렇게 실력이 뛰어난 무사가 몰락했다니?’
더 믿기 어려운 건 그 진북왕이 초주성의 38만 백성을 도살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소식을 앞에 두고 자신의 감정을 잘 추스를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왈가왈부하는 소리가 순식간에 터져 나왔다. 원경제가 자리에 있었으나 우림위에게 입을 다물라고 할 수는 없었다.
원경제는 손을 들고 먼 곳을 가리키며 핏기 없는 입술로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꺼져라!”
허칠안은 모른 척 말을 이어갔다.
“폐하께서는 언제 세상에 알릴 계획이십니까?”
“허칠안!”
원경제는 갑자기 추태를 부리며 포효하였고, 화가 나 온몸을 떨었다. 그는 가슴이 터질 듯 으르렁거렸다.
“짐이 정말 자네를 죽이지 못할 거라 여기는가? 짐이 지금 너를 죽이겠다, 지금 너를 죽이겠어……!”
그는 자세를 취하며 옆에 있는 금군의 패도를 뽑아 들었다.
“폐하, 용체를 보존하십시오. 소직은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허칠안은 목적을 이미 달성했다고 판단한 다음 눈치 빠르게 빠져나갔다.
“꺼져, 모두 꺼져라!”
원경제는 고함을 질렀다.
정 포정사는 정면으로 맞서고 싶었지만, 류 어사가 소매를 잡아당겨 읍을 올리며 흩어졌다.
사절단 사람들은 각자 흩어졌다. 사적으로 많은 교류를 하지 않았지만 해야 할 말과 상의해야 할 일은 진작에 관선에서 이미 결론을 내린 뒤였다.
* * *
허칠안은 한 달여 만에 드디어 야경꾼 관아로 돌아왔다. 그는 명확한 목적성을 가지고 호기루 밑에 왔다. 그리고 그는 시위의 통전을 거쳐 계단을 올라 7층에 이르렀다.
위연은 하늘빛 구름무늬 수놓은 청의를 입고 있었고, 청록색 비녀로 긴 머리를 간단하게 묶고 있었다. 소탈하면서도 편한 이미지는 그의 수려한 이목구비와 세상의 온갖 풍파가 담긴 두 눈과 어울렸다.
그에게서 중년 미남다운 매력이 확 풍겨왔다.
위연은 혼자서 양손으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왼손으로는 검은 돌을 만지작거리고, 오른손에는 흰 돌을 집은 채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돌아왔는가.”
허칠안은 ‘네’ 하고 소리내더니 예를 갖추지 않고 소리 없이 탁자에 앉았다.
“진북왕이 죽었습니다!”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으면 죽은 거지.”
위연은 바둑판을 주시하면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허칠안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네 우선 좀 기다리게. 이 판을 다 둔 뒤 얘기를 나누자고.”
허칠안은 갑자기 손을 뻗어 바둑판 위를 쓸어버렸다.
와르르……. 흰 돌, 검은 돌이 바닥에 흩어져 사방으로 튀었다.
위연은 화가 나서 손을 들어 그를 때리려다가 다시 살짝 내려놓은 뒤 콧방귀를 뀌었다.
“자네를 때려봤자 내 손만 아프겠지. 차를 우려오게.”
허칠안이 차를 다 우리자 그는 찻잔을 받쳐 들고 호호 불더니 마시지 않고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어조로 말했다.
“묻고 싶은 말이 있는가?”
허칠안 역시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위 공께서는 진북왕이 성안의 백성을 도살한 곳이 초주성임을 진작에 알고 계셨죠?”
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족과 오랑캐 두 족속이 갑자기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검으로 초주성을 가리켰다. 아마도 위 공이 발설한 정보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허칠안은 점점 더 확신했기에 다른 질문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위 공께서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소직이 아는 바로는 오랑캐의 산수(散修) 술사, 요족과 오랑캐 두 족속 그리고 만요국 잔당이 결탁했음에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추측한 것이네!”
위연이 웃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지. 법술로 사람은 세속을 초월한 힘을 가질 수 있지만, 지나치게 법술에 의존하면 결국에는 도리어 전체를 볼 수 없는 꼴이 되네.”
이 말은 참으로 허 색마의 예측을 벗어난 대답이었다. 그는 눈살을 확 찌푸렸다.
“위 공의 말뜻은 진북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초주성임을 짐작해내셨다는 겁니까? 하지만 요족과 오랑캐 두 종족 역시 진북왕을 잘 아는데요.”
위연은 문득 냉소를 지었다.
“내가 알아낸 게 진북왕이라고 누가 자네에게 얘기했는가.”
‘진북왕이 아니라면, 위 공이 알아낸 건 원경제라는 말이 된다…….’
허칠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위연의 설명을 인정했다.
그가 추측해낸 사실에 따르면, 진북왕이 백성을 대량 학살할 때 원경제의 지시를 받은 게 아니라고 해도 최소한 그 일은 형제 둘의 음모이긴 했다. 그렇다면 초주성의 백성을 도살한 건 원경제의 생각일지도 몰랐다.
‘원경제가 한 이 모든 일이 정말 진북왕이 2품으로 승직하는 걸 돕기 위함일 뿐인가? 설령 그가 진북왕을 더할 나위 없이 신임하기에 그가 2품으로 승직하길 바란다고 해도 기껏해야 진북왕의 백성 대량 학살을 묵인하는 정도일 텐데. 그래야만 원경제의 계략과 속셈에 부합하고, 제왕의 마음 씀씀이에 부합한다…….’
허칠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그랬군요. 폐하께서 다른 목적이 있는 거 아닙니까?”
위연이 침묵하더니 이내 말했다.
“다음 질문.”
이 순간, 잘못 본 건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허칠안은 위연이 멍해지는 모습을 보았다.
‘원경제에게 정말 다른 목적이 있나? 위 공이 아는데 나한테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미세 표정 심리학에 정통한 허칠안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삼황현의 첩자 채아가 제게 준 정보는 거짓입니까?”
그는 돌아가서 채아를 찾았으나, 기생 어미가 말하길 그녀는 한 남자에게 속신당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가 그 일을 당한 건 허칠안이 떠난 그다음날이라고 했다.
“구실을 찾아 자네를 따돌리려 했을 뿐이었네. 초주성은 너무 위험해서 자네가 사지로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었어.”
위연은 찻잔을 받친 채 여전히 마시지 않았다.
“다음 질문은 초주성 정보를 오랑캐에게 누설했는지 아닌지 내게 묻고 싶은 거 아닌가?”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위연은 비웃음의 입꼬리를 올렸다.
“폐하께서는 이미 진국검을 영진산하 사당에서 암암리에 빼내 속히 초주로 보냈네. 형제 둘은 성안의 백성을 도살하여 혈단을 정제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만약 나중에 장소가 발각되면 길리지고와 촉구를 참살하여 훗날을 도모할 계획이었네. 내친김에 성안의 백성을 도살했다는 죄명을 오랑캐와 요족에게 뒤집어씌우려 했지. 어쨌든 대봉의 백성들은 이 설명을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 오랑캐가 변방을 약탈하고, 식량과 인구를 빼앗아간다는 소문은 몇백 년 동안 끊인 적이 없었잖나.
진북왕은 충분히 많은 생명의 정수를 축적하기 위해 그리고 왕비의 영온을 빼앗아 승직하기 위해 초주성의 백성 학살도 불사했네. 기왕 이렇게 풀린 마당이니, 그대로 내분을 일으킨 거지. 길리지고와 촉구 중에 한 놈이 몰락하기만 하면 북경의 부담이 줄어들 것이고, 백성들은 오랫동안 편안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을 게야. 만약 진북왕이 몰락한다면, 그건 바로 그에게 가장 큰 응징이지. 그리고 나는 이 김에 북경의 병력을 인수하여 관리하면서 추수 후에 동북 무신교를 칠 토대를 마련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