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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타경-495화 (492/712)

495화. 불신

왕비는 침상 옆에 앉아 발을 흔들며 머리를 묶은 그를 보면서 물었다.

“나는 앞으로 어떡하지.”

허칠안은 머리카락을 둘둘 말면서 자신과 상관없다는 어투로 말했다.

“가고 싶은 곳으로 마음껏 가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녀는 허칠안이 자신을 그다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아한다는 점을 알아차리고 좀 울컥했다.

“나한테 은자 십 냥을 더 빌려 주게. 나는 강남 모(慕)가로 돌아가야겠어. 앞으로 돈이 생기면 사람을 부탁해 은자를 돌려주겠네.”

탁!

허칠안은 은자 한 뭉치를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이렇게 거리낌이 없다니…….’

왕비는 입술을 깨물고 뚱한 얼굴로 은자를 거두었다. 그런 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꾀죄죄한 옷 몇 벌을 싸더니 작은 보따리를 어깨에 메고 선포했다.

“나는 가겠네.”

“가세요!”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갑자기 돌아서서 방을 뛰쳐나갔다.

* * *

그녀는 객잔을 뛰쳐나간 후, 혼자서 성 밖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왕래가 빈번한 인파를 뚫고, 번화한 시가와 긴 거리를 지났다. 이 성은 크지 않았기에 그녀는 금방 성문 입구에 도착했다.

하지만 왕비는 널찍한 성문을 바라보면서 덜컥 겁이 났다. 그 성문은 자유로 통하는 문이 아닌 듯했다. 바깥 세계는 너무 위험하고, 사람 마음은 너무 복잡했다.

그녀는 13살 때 가족에 의해 궁으로 들여보내짐으로써 고관의 후한 봉급과 맞바꾸어졌다.

그 뒤 그녀는 겹겹이 둘러싸인 궁궐에서 여러 해 동안 생활했다. 그러다가 다시 원경제가 진북왕에게 그녀를 선물하면서, 그녀는 이제 왕부에 산 지 20년이 되었다.

그동안 그녀는 자유를 얻길 갈망했고, 구속 없는 삶을 갈망했다. 하지만 그녀는 막상 자유를 손쉽게 얻자 갑자기 자신이 근본적으로 바깥에서 생존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마치 새장 안에 갇힌 카나리아처럼 이십여 년간 호사스럽게 생활하다 보니 자유로운 하늘로 날아갈 능력을 상실했다.

그녀는 설령 ‘친정’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부모에 의해 다시 한번 팔릴 뿐이었다. 아니, 그녀가 저택에 돌아가자마자 이튿날 가족들에 의해 다시 황궁으로 돌려보내질 확률이 높았다.

그녀는 망연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한참 뒤 그녀는 더 이상 망연자실하지 않았다. 그저 눈의 반짝임이 조금씩 꺼져갈 뿐이었다.

왕비는 고개를 숙인 채 발끝을 바라보았다. 말라빠진 어깨에 빈약한 뒷모습은 마치 돌아갈 집이 없는 어린 소녀 같았다.

이때, 뒤에서 남자의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머니, 제가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같이 가야겠어요.”

왕비는 고집을 부리며 돌아서지 않았다.

허칠안은 그녀 앞으로 걸어가서 쭈그리고 앉아 말을 하지 않았다.

왕비는 그의 뒷모습을 힘껏 노려보았다. 그녀는 입꼬리를 가볍게 치켜올리더니 두 팔을 벌리고 그의 등위로 냅다 엎어졌다.

허칠안은 성을 나간 뒤, 그녀를 업고서 관도를 따라 미친 듯이 내달렸다. 이 순간 그는 애지중지하는 암말이 조금은 그리웠다.

“나 참 성가시지.”

왕비가 목소리를 낮추고 그의 귓가에 말했다.

그녀가 따뜻한 숨결을 허칠안의 귓불에 뿜어대니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귓불은 허 색마의 성감대였지만 이는 부향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자기 자신을 잘 알기는 하네…….’

허칠안이 물었다.

“지금 아주머니 모습을 원경제가 아나요?”

왕비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는 나한테 외모를 바꾸는 법기가 있다는 걸 아네. 내가 여러 번 몰래 나갔다는 것도 그는 틀림없이 알 테고. 허나 내 모습을 본 적은 없네.”

그녀는 잠깐 생각하더니 덧붙였다.

“왕부의 시위는 내 모습을 본 적이 있어.”

허칠안은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비록 진북왕이 죽었지만, 왕비는 여전히 환영받는 사람이다. 원경제는 분명히 그녀에 대해 간섭할 것이다. 물론 사절단 위아래로는 왕비가 오랑캐에게 납치당했다고 여기고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여종들이 내가 마지막에 그녀들을 찾았다는 걸 안다. 물론, 그녀들은 내가 오랑캐 강자를 물리치고 왕비를 구해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들이 살아남아 순조롭게 경성에 돌아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의문점이다.

물론 내가 왕비를 구해냈다는 걸 증거로 삼을 수는 없지만, 의문점이 있기만 하다면 원경제는 무조건 사람을 파견해 조사할 것이다. 감시할 필요 없이 바로 광명정대하게 조사할 것이다. 따라서 왕비는 나를 따라 저택으로 돌아가면 안 된다. 하지만 밖에서 먹여 살릴 수는 있다. 삼백만의 경성 인구를 가가호호 찾기란 불가능하다. 게다가 내가 왕비를 경성에 데리고 갔다는 걸 가리킬 어떠한 단서도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를 바깥에서 먹여 살리는 것이다. 허부에서 멀지 않지만, 너무 가까워서도 안 된다.’

허칠안은 세부적인 사항을 다 고려한 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주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뒤 그는 어쩔 수 없이 잠시 망연자실했다. 왜 내가 아주머니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지?

나는 언제 그녀에게 중독되었지?

허칠안은 초주성 방향으로 가는 대신, 먼저 정흥회와 회합하여 그를 초주성으로 데리고 갈 작정이었다.

초주성은 지금 파괴되었다. 그는 초주 포정사로 기운 형세를 수습해야 했다. 내친김에 진북왕은 이미 몰락했으니 더는 이리저리 숨어다닐 필요가 없다고 알려 주고자 했다.

그는 도중에 일부러 금련 도사에게 천지회 구성원을 차단해달라고 요구한 뒤 이묘진과 사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가 그녀에게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그는 예상한 대로 천종 성녀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고, 진북왕이 몰락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허칠안은 ‘크게 놀라며’ 불가능하다고 외쳤다. 그는 놀라는 사람이 갖춰야 할 소양을 충분히 드러냈다.

이묘진은 마음속으로 좀 의기양양하면서 그가 바람맞힌 데에 더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런 뒤 허칠안은 그녀에게 ‘지금 급히 오는 중인 허 은라’를 찾는다는 이유로 초주성을 벗어나 산골짜기로 와서 만나자고 했다.

점심 때, 허칠안은 드디어 왕비를 데리고 산골짜기에 도착했다. 그는 그날 정흥회와 작별을 고하고, 근처 현성(縣城)에서 객잔을 찾아 왕비를 안착시켰다. 두 곳은 서로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 * *

산굴 속에서 모닥불이 훨훨 타올랐다. 이한과 조진 두 녀석은 각각 산닭과 야생 토끼 그리고 신선한 물고기 등의 사냥감을 굽고 있었다.

호리호리한 신도백리는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토납했다.

통통한 위유룡은 대도를 닦으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허 은라와 비연 여협객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궐영수와 진북왕은 잔인하고 포악한데. 만약 그들에게 단서가 발각된다면 목숨을 잃을 정도의 화를 불러올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그들이 뜻밖의 사고를 당한다면, 실마리를 좇아 우리를 찾아낼 가능성이 농후하지요.”

군대 출신의 창병 당우신은 예리한 눈빛으로 동굴 입구를 훑은 뒤 다시 시선을 거두고 긴 창을 감싸 안은 채 눈을 감고 정신을 수양했다.

정흥회는 손을 내저었고, 가볍지만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럴 리가. 그들 두 사람이 아무런 소득이 없다고 해도 진북왕과 궐영수의 눈에 띄지 않을 것이네.”

아름다운 외모의 젊은 부인이 물었다.

“정 대인께서는 왜 이렇게 확신하시나요?”

정흥회가 말했다.

“비연 여협객은 강호를 떠돌아다니며 본인과 상관없는 일에 개입하여 이렇게 큰 명성을 얻고 무탈할 수 있었네. 절대 경솔한 사람이 아니지. 허 은라에 관해서라면 이번 큰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쩌면 한낱 운일지도 모르네. 하지만 이 일련의 사건이 그의 능력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네.”

모든 사람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연 여협객이든 허 은라든 다들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주는 뛰어난 인재였다. 일단 일을 맡기면 더할 나위 없이 안심되고, 매일 걱정할 필요 없게 만드는 그런 인물 말이다.

이때 신도백리가 갑자기 눈을 뜨더니 나지막하면서도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가 왔습니다.”

이한과 조진은 무의식적으로 사냥감을 떨어뜨리고, 각자의 무기를 쥔 뒤 사람들과 산굴을 뛰쳐나갔다.

남녀가 한 명씩 짝지어 왔다.

남자답고 소탈한 사내는 기개가 비범했다. 그는 바로 은라 허칠안이었다. 여인에 관해서라면 그들은 그저 한번 보고 등한시했다. 그녀는 걸음걸이에 순서 없이 허칠안 옆을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평범한 자태의 그녀는 빠른 걸음 사이로 약간 숨을 헐떡였다. 그녀는 더없이 평범한 여인이었다.

뒤에 있던 정 포정사는 맞이하며 공수했다.

“허 은라.”

그의 뒤에 있던 무사들은 의아해했다. 허 은라는 그저께 밤에 성실하게 맹세하며 초주성에 가서 사건을 조사하러 간다고 말했더랬다. 그런데 어찌 그들이 그가 오늘 돌아올 거라고 짐작할 수 있었겠는가?

여기는 초주성에서 수 백 리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이 사이에 왔다갔다 하기에는 부족했다.

허칠안은 군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제가 소식을 접했습니다. 진북왕은 이미 초주성에서 몰락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데리고 가려고 왔습니다.”

청천벽력이었다!

정 포정사는 안색이 갑자기 굳더니 눈을 천천히 뜨고 입을 서서히 벌렸다. 허칠안은 알고 보니 이게 놀란 사람의 진정한 소양이라는 걸 깨달았다.

모든 협객은 소리 없이 서로 응시하였다. 서로의 눈빛에서 ‘불신’ 두 글자가 비쳤다.

“받, 받은 정보에 오류가 있는 건 아닌지…….”

정 포정사는 복잡한 표정으로 몇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는 자신이 들은 소식이 사실이길 바라면서, 한편으로는 허칠안이 들은 정보가 잘못된 소식이라고 굳게 믿었다.

신도백리 등은 달리 말을 얹지는 않았지만, 포정사 대인의 말이 일리 있다고는 생각했다.

‘틀림없거든. 진북왕은 바로 내가 직접 죽였거든…….’

허칠안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진짜예요.”

쿵쿵, 쿵쿵……. 정 포정사는 격렬하게 미쳐 날뛰는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었다.

“비연 여협객이 곧 올 겁니다. 그녀가 사건의 경위를 알고 있어요.”

허칠안은 책임을 내던졌다.

사람들은 뒤이어 산굴로 돌아가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기다렸다.

왕비는 얌전히 허칠안 옆에 앉아 닭 다리를 야금야금 뜯었다. 대봉 제일의 미인은 보잘것없는 행인 갑(甲) 연기에 열심히 임했다.

그녀는 오는 길에 허칠안의 입을 통해 정흥회의 신분이 무엇인지 들었고, 그의 가족이 백성 대량 학살로 죽었다는 걸 알았다.

비록 그녀는 진북왕에게 달리 감정이 없었지만, 어쨌거나 명분상 부부였으므로 정 대인에게 양심의 가책은 약간 느꼈다.

* * *

반 시진 후, 이묘진은 산골짜기에 도착했다. 그녀는 비검에서 내려와 산골짜기로 하늘하늘 떨어졌다.

그녀는 진작에 동굴 입구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평범한 자태의 왕비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비연 여협객, 허 은라가 말하길, 말하길……. 진북왕이 초주성에서 몰락했다고요?”

정 포정사는 빠른 걸음으로 몇 걸음 나아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묘진은 확신에 찬 답을 주었다.

“네. 그의 시체는 아직 초주성에 있습니다.”

몇 초 후, 안에서 고통에 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허칠안은 탄식했고, 뒤이어 귓가에 이묘진의 전음이 울려 퍼졌다.

“그녀는 누군가?”

“운 나쁜 사람이오. 마침 그대에게 부탁할 일이 있소. 혈도 삼천리 사건은 이미 막을 내렸으니 뒷일은 그대가 걱정할 필요 없소. 그대가 나 대신 그녀를 데리고 경성으로 돌아갈 수 있겠소? 이목을 끌지 않아야 함을 명심하시오. 먼저 객잔을 찾아 쉬면서 내가 경성으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는 게 가장 좋겠소.”

허칠안은 전음으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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