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7화. 사람이 도리를 지키지 않으면 하늘이 벌하는 법
진북왕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나지막이 말했다.
“선조 황제부터 무종 황제까지 어느 전봉의 무사가 불로장생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우리 황실 사람이 아니다.”
그는 말하는 사이 몸을 번쩍이더니 진국검 앞에 나타났고, 손을 뻗어 검을 뽑으려 했다.
윙!
옅은 금빛이 순간 폭발하더니 해수 같은 폭풍이 일면서 진북왕을 밀어냈다. 검기가 3품 무사의 신체와 정신에 발사되었고, 불똥이 빽빽하게 튀었다.
진국검은…… 대봉의 기운을 억누른 신병(神兵)이다. 일찍이 진북왕을 따라 산해관전역에 참전하여 무수히 많은 적의 우두머리를 벤 신병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진북왕이 접근하니 이런 과격한 반응을 일으켰다.
먼 곳의 성벽 위 여기저기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이때 성벽 위에는 족히 만 명 넘는 병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먼 곳에서 이 광경을 보았고, 진국검이 진북왕을 싫어하며 그의 접촉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았다.
병사들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무너진 듯했다.
“내가 뭘 본 건가? 나는 마술에 걸린 게 틀림없어. 진북왕을 거부하는 진국검을 보았다니.”
“진북왕…… 그가 정말 백성을 대량 학살했나?”
“진짜일 리 없어, 진짜일 리 없다고.”
무기가 ‘콰당’하고 떨어졌다. 많은 병사들이 고통스러워하며 머리를 감싸 안은 채 입으로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누군가는 자신이 본 모든 걸 믿지 않으며 격한 말투와 사나운 표정으로 곁에 있는 전우에게 질문을 던지고 상대방이 다른 답을 주길 바랐다.
하지만 뜻밖에 전우는 이미 무너졌다.
신념이 무너졌다.
진국검은 대봉의 신병으로, 개국 황제가 물려준 날카로운 무기였다. 군대 인사 눈에 진국검의 위상은 더없이 숭고하게만 보였다.
산해관전역 때, 황제 폐하는 제사 대전을 거행하면서 직접 진국검을 꺼내 진북왕에게 하사했더랬다.
이 역사는 지금까지도 군대에서 흥미진진하게 전해지며 진북왕의 많은 후광 중 일부분이 되었다.
이런 만큼 진국검이 진북왕을 거절하는 장면은 병사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격을 주었다.
성벽 아래의 병사들은 그렇게 멀리까지 볼 수는 없었다. 머리 꼭대기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울리기 시작한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쳐다봤다. 그런 뒤 그들은 환호가 아니라 무너지며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본 것 역시 전우의 웃는 얼굴이 아니라 무너진 얼굴이었다.
이건…….
그 뒤에 이어질 결과는 아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진국검은 선택을 했다. 그리고 이 선택은 그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는 고공의 그 신비로운 술사가 한 말이 전부 진짜라는 의미였다. 진국검이 진북왕을 버린 이유는, 그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봉 백성을 대량 학살하였으나, 그와 진국검은 한마음 한뜻이 아니었다.
“사람이 도리를 행하지 않으면 하늘이 벌하는 법. 진북왕, 오늘이 바로 네가 죽는 날이다.”
허칠안은 급하강하며 끝없는 분노를 휩쓸고 하늘까지 닿은 마염을 끌어당겼다.
슉…….
진국검이 저절로 날아올라 자신을 허칠안의 손에 넘겼다. 그는 격렬하게 날뛰었다. 위풍당당한 그의 모습은 마치 신인 듯 보이기도 했으며 악마인 듯 보이기도 했다. 사실 그는 그저 성우(聲優)일 뿐이었건만.
진국검이 눈을 자극하는 금빛을 내뿜으며 진북왕을 서슴없이 내리쳤다.
대봉 제일 무사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는 진국검의 칼끝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손에 쥔 긴 칼로 반격했다.
쿵!
화포 백 발이 폭발하는 것처럼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모든 걸 휩쓸었다. 아주 손쉽게 집이 무너지면서 폐허가 된 주변을 모조리 날려 버렸다.
성벽에서 내려다보던 병사들은 잔잔한 물결처럼 원형 파도가 퍼져나가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무릇 접촉한 물체는 전부 가루가 되었다.
이 광경은 천재지변이라고 형용할 수밖에 없었다.
진북왕이 손에 쥔 긴 칼이 가루가 되었다. 이건 사천감에서 정제한 최고급 법기로, 철을 진흙처럼 깎아 더할 나위 없이 단단했다. 설령 3품급 전투라고 해도 날카롭다는 특징을 살려 적을 벨 수 있었다.
하지만 진국검 아래에서는 약하기 그지없었다.
적색의 거대한 구렁이는 이 기회를 틈타 이마의 세로 눈을 굴려 오광을 내뿜었다. 구렁이는 번개보다 맹렬하고, 생각보다 빠르게 슉 하고 진북왕의 몸을 내리쳤다.
진북왕은 피할 길 없이 몸이 경직되고 관절이 뻣뻣해졌다. 그는 눈 뜬 채로 동검이 떨어지는 걸 쳐다보았다.
“죽어라!”
먼 곳에 있던 주술사가 갑자기 손을 뻗어 허칠안을 조준하더니 힘껏 움켜쥐었다.
주살술.
마염이 휘감고 있는 불멸의 몸이 타격을 입은 듯 어느 정도 상처를 입었다. 그가 검으로 베는 동작 역시 중단되었다.
진북왕은 이 기회를 틈타 나섰다. 순간 아주 빽빽하게 백 개 이상의 주먹을 날렸다.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 백 개 이상의 주먹에서 한 가지 소리만 날 뿐이었다. 퍽!
허칠안은 발사된 포탄처럼 날아갔고, 가슴이 움푹 내려앉았으나 순식간에 원래대로 회복했다.
아홉 개 여우 꼬리가 마치 온 하늘을 가리는 장막처럼 허칠안 뒤의 고공에서 펼쳐졌다. 형세가 기울어진 허칠안을 막아주기 위함이었다.
방금 고공에서 움직임을 멈추자 아래쪽에서 바람 소리가 쉭쉭 났다. 마치 석유 분수의 검은 점액이 솟구치는 듯 모든 걸 부식시키고 모든 걸 오염시키는 형세로 허칠안에게 쏟아졌다.
쿵쿵쿵……. 푸른색 거인이 광분하며 갑자기 뛰어오르더니 매가 토끼를 덮치는 자세로 검은 연꽃으로 달려들었다.
손에 쥔 거대한 검은, 눈을 자극하는 뙤약볕이 되어 힘껏 내리쬐었다.
검은 연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검기 사이로 무너져 하늘하늘한 검은 연기가 되더니 먼 곳에서 다시 응집했다.
이 검의 위력으로 초주성 지면이 수리 밖까지 갈라졌다. 너무 깊어 바닥이 보이지 않는 균열이 생겼다.
“나는 다른 이가 주먹을 써서 나를 때리는 걸 싫어하네.”
이번에는 신수 자신의 목소리였다.
검은색 마력의 몸뚱어리 뒤에는 그다지 진실하지 않은 새까만 팔이 12개 자라나 있었다. 근육이 단단하고, 모든 팔마다 주먹을 꽉 쥔 상태였다.
12개의 주먹이 동시에 떨어지자 그 기세가 잔영처럼 빨랐다.
모든 주먹이 대지 위에 수 장(丈) 길이의 권인(拳印)을 만들어냈다.
진북왕은 번개처럼 빨랐다. 때로는 돌격하기도 하고 때로는 꺾기도 하면서 무사의 본능적인 직감에 따라 주먹을 하나씩 피했다.
성안에서 양측의 격렬한 혼란이 벌어졌다. 사람 수가 균형이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더는 일대일로 맞붙지 않았고, 서로 협력하는 데 더 치중했다.
각 체계의 법술이 복잡하게 얽힌 채로 서로 교전하였다. 그러느라 초주성 전체에 거의 성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집은 폐허가 되고, 폐허는 깊은 구덩이가 되었다. 하류가 길을 바꾸고 연못이 평평하게 메워졌다.
산해관전역 이후, 구주는 20년간 태평했다. 이런 정도의 난투극은 처음 발생한 사건이었다.
거의 전봉에 선 고수들에게 있어, 인류의 성지는 한 차례 전투를 치르면 초토화되는 것이었다.
이때 길리지고가 ‘자기 측’ 세 사람이 상대를 꼼짝 못 하게 하는 틈을 타 혈단 앞까지 도약하였다. 대량의 생명 정수가 담긴 단약을 주웠다.
“우리 대봉 백성들의 생명 정수가 응집된 혈단인데 너 같은 오랑캐도 자격이 있느냐?”
허칠안은 가장 먼저 돌진하여 푸른색 거인의 팔을 베었다. 음침한 백골이 드러났고, 푸른색 거인은 고통스러워하며 울부짖었다.
붉은색에 푸른색이 섞인 선혈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보기만 해도 몸서리쳐질 지경이었다.
이 검은 하마터면 3품 무사의 팔을 베어 자를 뻔했을 정도로 그 위력이 대단했다.
‘유가 성인의 조각칼이 먼 경성, 서원에 봉인되어 있다니 아쉽다. 아니었으면 열 대를 칠 수 있었는데…….’
허칠안은 속으로 안타까워했다.
혈단이 하늘로 날아오르더니 아홉 개의 여우 꼬리가 휩쓸어 갔다. 거대한 구렁이는 붉은 몸뚱어리에 그대로 달려들어 온 하늘을 가렸다. 마치 혈단을 한입에 집어삼키려는 듯했다.
진북왕, 지종 도수의 분식, 주술사가 잇따라 나서서 혈단을 쟁취하고자 했다.
철컥…….
갖은 방법으로 승부를 겨루던 중, 혈단이 그 자리에서 갈라지더니 일곱 개의 작은 조각으로 균등하게 갈라졌다.
촉구와 길리지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혈단을 삼켰다. 두 사람 몸의 상처가 전부 회복되었고, 기운이 점차 커지더니 신체와 정신 그리고 기기가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었다.
일이 이쯤 되자 주술사는 혈기를 삼킴으로써 자신의 상태를 유지해 후속 전투에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진북왕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이마에 핏줄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분노를 표출하고자 했다.
이건 본래 그의 기회였다. 그가 고생하며 모든 걸 꾀했는데 결국 다른 놈들이 한몫씩 차지하였다.
이 순간, 왕비는 물론 혈단조차 없어졌다.
진정으로 제 꾀에 제가 넘어간 셈이었다.
진북왕은 혈단 조각을 입속으로 내던진 뒤 잘게 씹어 삼켰다. 물고 있으니 씹는 근육이 돌출되었다. 마치 혈단을 먹는 게 아니라 허칠안을 먹는 듯했다.
“대, 대사님……. 이것들은, 이것들 모두 우리 대봉 백성의 정혈이라고요.”
허칠안은 속으로 신수와 소통하였다. 혈단을 복용하는 데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내게 비책이 있네. 불멸의 몸을 연소하여 힘을 한순간에 전봉으로 이르게 할 수 있지. 하지만 방대한 정혈을 연료로 삼아야 하네. 자네를 도와 이 전투를 앞당겨 끝내 주지.”
허칠안은 마음이 움직였다.
“대사님 생전의 전봉으로요?”
신수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아닐세. 하지만 그들을 상대하는 데에는 충분하지……. 그리고 나는 죽지 않았다고.”
허칠안은 손안의 혈단을 바라보면서 머릿속에 한 마디가 스쳤다.
<용을 죽이던 소년이 결국은 악마가 된다.>
신수는 잠자코 있는 그를 보더니 더는 망설이지 않고 혈단 조각을 삼켰다.
“아주 강대한 힘이구나. 역시 38만 명을 제련해서 만든 혈단답다. 쯧쯧, 진북왕, 차라리 혈단 정제 비법을 내게 알려 주지 그랬느냐. 우리 같이 백성을 대량 학살하여 함께 2품으로 승직하는 건 어떠한가?”
길리지고는 몸을 활짝 펴고, 몸속에 녹아드는 방대한 에너지를 느끼며 유쾌한 마음으로 전봉에 도달했다.
“정말이다!”
촉구는 입에서 사람의 언어를 내뱉으며 조롱했다.
“우리 둘은 이런 혈단을 정제하지 못할 것이다. 기껏해야 백성을 마구잡이로 삼켜 보양하는 것뿐이니 이런 효과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진북왕 너는 혼자서 몰래 성 전체를 도살하는 게 가능하잖나. 더 많으면 감정에게 죽임당할 것이다. 차라리 우리 셋이 손을 잡고 두 번째, 세 번째 혈단을 정제하는 게 어떻겠는가.”
촉구가 말을 하면서 뱀의 몸뚱이를 비틀었다. 마치 몸이 근질근질하니 견디기 어려워 탈피하려는 듯했다.
고품 주술사가 냉소를 지었다.
“승자가 누구일지는 아직 모르지.”
흰 치마의 여인이 허칠안을 쳐다보더니 깔깔깔 웃었다.
“본 국주는 너희와 좀 더 놀아줄게.”
지종 도수는 말을 많이 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혈단은 쓰임새가 크지 않았기에, 그는 이것을 삼키지 않고 숨겼다. 그저 분신으로서 그는 자신이 원하는 걸 이미 얻었다.
백성을 대량 학살한 악(惡)!
어찌 되었든 이익을 봤으니 그들과 한 판 더 싸우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각측은 혈단을 삼킨 후, 기운을 폭발시키면서 자신만만한 기색을 드러냈다.
전봉을 뛰어넘자 진국검에 대한 두려움마저도 훨씬 덜해졌다.
진북왕은 갑옷과 투구를 찢어 구릿빛 신체를 드러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본왕 역시 이번 생에 전봉에 돌파하였다. 혈단을 균등하게 나누어 너희의 목적 역시 달성했구나. 촉구, 길리지고. 손을 잡기보다는 먼저 이 자식을 제거하는 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