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3화. 진국검 (1)
형체가 운해 위 백의를 펄럭이며 구름 끝에 서서 아래쪽의 초주성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흐릿했고, 그 모습은 마치 주변의 구름과 하나로 합쳐진 듯했다.
그곳에 서서 움직이지 않으면 사람들은 간과하기 쉬웠다. 그의 존재감과 용모는 일치했다. 모호하고 드러나지 않는 게 마치 이 세계에 없는 듯했다.
“백성을 대량 학살한 뒤 망령을 육체 안에 도로 봉인해 비법으로 육체의 생기를 유지하였다. 그러고 나서 초주성 전체를 단로(丹爐)로 삼고, 백성의 정혈과 영혼을 재료로 삼았다. 대단(大丹)을 정제하기 전에는 모든 것이 평소와 같다. 무신교 술사가 천기를 교란하고, 성안의 대진이 운명을 유지한다. 훌륭한 기만술이고, 훌륭한 영혜경(靈慧境) 주술사다.”
성 전체가 마치 단로와 같았다. 38만 명의 정혈을 머금은 ‘영단(靈丹)’은 정제하는 데 꼬박 한 달이 걸렸고, 마침내 성공을 향해 치달았다.
술사는 단(丹) 정제의 전문가였으니, 이렇게 보기 드문 대단을 한 달 동안 정제한다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술사는 본래 꾀를 도모하는 데 능했기에, 성안의 이상함을 보는 순간 즉시 인과 관계를 깨달았다.
진북왕과 무신교가 결탁하였고, 무신교는 그를 도와 암암리에 정혈을 정제하였다.
진북왕의 목적은 명확했다. 그는 정혈을 삼키고 수련 경지를 3품 대원만으로 끌어올린 뒤, 왕비의 영온을 쟁취해 2품으로 승직할 작정이었으리라. 그렇다면 무신교가 도모하는 건 무엇인가?
“촉구다…….”
백의 술사는 문득 모든 걸 깨달았다.
대봉과 무신교는 역사적으로 맺힌 원한이 있었지만, 동북 각국이 인족 위주인 데다가 산물도 풍부하여 사냥이나 경작을 할 수도 있었다.
비록 그들은 인구 증가 추세를 감안하여 침략을 추진하고자 하는 야망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리려는 경향 역시 있었다.
대봉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헛되이 전쟁을 시작하려 하지는 않았다. 변방의 마찰은 끊이지 않았지만 대규모의 전쟁은 없었다.
반면 동북 영토와 인접한 북방 요족은 아주 강한 침략성과 인족을 삼키는 취미가 있었기에. 변방을 자주 침입했고 도시와 마을도 침략했다.
“진북왕이 2품으로 승직하는 걸 도운 뒤 동맹을 맺고 쌍방 연합군이 북상하여 촉구를 죽인다. 하지만 지금 그가 직접 왔군…….”
백의 술사는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다. 이 진법은 무신교의 소행이 아니야.”
* * *
흰 치마의 여인은 손을 뻗어 혈단을 향해 내밀었다. 그녀가 승리의 열매를 따려던 그때 갑자기 이변이 생겼다.
수십 리 범위를 뒤덮은 검은 연꽃이 아래쪽에서 한 송이 떠오르더니 서서히 피어났다. 연꽃에서는 검은색의 진득진득한 액체가 흘렀고, 꽃잎마다 각기 타락과 악을 상징했다.
흰 치마의 여인은 몸이 굳었다. 손가락 끝이 먹색으로 물들더니 재빠르게 번져나갔다. 하얗고 뽀얀 팔뚝이 칠흑같이 보기 흉한 색으로 물들더니 그녀의 두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붉어졌다.
그녀는 삽시간에 산뜻한 선녀에서 보기 흉하고 사악한 마녀로 변했다.
흰 치마 여인 뒤로 더부룩하고 거대한 여우 꼬리가 나왔다. 이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여우 꼬리가 나타날 때마다 칠흑이 조금씩 벗겨졌다. 꼬리 아홉 개가 나타난 뒤 그녀는 모든 타락을 체내에서 제거했다.
여우 꼬리 아홉 개는 마치 공작새가 날개를 편 것처럼 그녀의 뒤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검은 연꽃 중앙에는 끈적끈적한 검은색 액체가 모여 사람 형체를 형성하였다. 이 형체는 칠흑 점액으로 이루어졌는데 두 눈에는 검특한 기색이 비치고 악의와 타락으로 충만했다.
흰 치마의 여인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칠흑같은 사람 형체를 주시하면서 의아해했다.
“네가 지종 도수 금련?”
칠흑 같은 사람 형체가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흑련(黑蓮)이다.”
흰 치마의 여인은 쯧쯧거렸다.
“생각지도 못하게 결국 사도에 빠졌군.”
흑련은 냉소를 지었다.
“선행을 베풀어봤자 선의의 보답이 없는 이유는, 이 세상에 어둠이 영원불멸하고 인생은 본디 악하기 때문이지. 나는 그저 천시(天時)에 순응하여 나타났을 뿐이야.”
구름 끝에 선 흰 치마의 여인은 천천히 아홉 개의 여우 꼬리를 흔들며 입가에 가벼운 웃음을 숨겼다.
“천종 도수가 만약 네 말을 듣는다면, 아마 너와 먼저 도리를 논할 것이다.”
흑련은 콧방귀를 뀌었다.
“나는 이미 세상에서 가장 큰 악을 취했다. 마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조만간 도문을 통일할 날이 올 것이다. 유아독존.”
흰 치마의 여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일개 분신 주제에 감히 큰소리를 치다니.”
그녀가 여우 꼬리를 치켜세우고 내리치자 순식간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 초주성 전체가 가늘게 떨리고 집이 흔들렸다.
연꽃 중앙의 검은 사람 형체가 손을 들면서 상대방을 나무랐다.
“여우 꼬리로 감히 이렇게 광기를 부리다니.”
연잎에서 오광이 솟구쳐 나왔다. 모든 걸 부식시키고 모든 걸 타락시키는 힘이 뿜어져 나와 하늘을 거슬러 올라가 흰 치마의 여인을 저지했다.
두 힘이 공중에서 서로 공격하며 충돌했다.
충격파가 광풍으로 변해 인근 집을 밀어내고, 벽돌과 나무 조각을 공중으로 휘감아 사방 십 리를 초토화했다.
두 정상급 고수의 대결은 천재지변 같은 광경을 연출했다.
* * *
객잔 안에서 왕비는 창가의 화장대에 앉아 멍하니 넋을 잃고 있었다.
그 자식은 새벽에 떠났건만 지금은 이미 황혼이었다. 그녀가 방금 객잔 안의 심부름꾼에게 물으니. 이곳은 빈주(賓州)로 초주 중심에 위치한 곳이라고 했다.
초주성에서는 삼백여 리 떨어져 있었다. 왕비는 자신의 총명함과 지혜로움으로 허칠안이 대략 사나흘 뒤에야 초주성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지금쯤 아직 길 위에 있겠지만 그녀는 이미 걱정되기 시작했다.
“회왕은 3품으로 대봉 무사 눈에는 전봉이야. 허칠안은 절대 위세를 부리면 안 된다고. 만일 그가 죽으면 나는…….”
왕비는 갑자기 어리둥절해서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에게 강조했다.
“앞으로 나는 정말 의지할 곳이 없어지잖아. 필경 나는 그저 연약한 여인이라고. 가지고 있는 은자도 없는데 그가 죽으면 나는 어떡해? 맞아, 바로 이거야. 나는 나의 미래를 걱정하는 거라고.”
마지막으로 그녀는 가볍게 탄식했다.
“진북왕을 응징해야 하지만, 돌아오는 걸 잊어서는 안 돼.”
* * *
이묘진이 비검을 부려 산골짜기에 강림했다.
그녀는 본래 이 기회에 오랑캐 기마병 몇 놈을 잡아 소식을 퍼뜨리고 싶었다. 그들이 부락으로 돌아가 보고하면, 간단하면서도 거칠게 정보 유출 임무를 완수한다.
하지만 그녀는 변방에 가까워지자 청안부의 기마병이 대거 남하하여 기세등등하게 초주성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경악했다.
그리고 그녀 본인은 하마터면 청안부 우두머리에게 발각될 뻔했다. 어쩌면 이미 들켰지만, 그저 상대가 거들떠보기 귀찮았을 뿐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신중한 태도로 계속해서 북쪽으로 비행하다가 수십 리 떨어진 관도 위에 적색의 거대한 구렁이를 보았다. 산속에서 기어 다니는 모습이 마치 적색 길 같았다.
이묘진은 이 광경을 보고는 무의식적으로 추리했다. 그녀는 일각이란 시간을 들여 일련의 물음표를 추리해 냈고, 몹시 초조해하며 허칠안에게 보고 들은 걸 보고하러 서둘러 돌아왔다.
동굴 안에 있던 신도백리와 이한 등은 인기척을 듣고 경계하는 얼굴로 달려 나갔다. 그들은 이묘진을 본 후에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했다.
이묘진은 그들을 훑어보더니 동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허 은라는?”
정 포정사가 동굴에서 걸어 나왔다.
“허 은라가 말하길 초주성에 사건을 조사하러 갈 것이니 저희에게 더 기다리라고 하더군요.”
“…….”
이묘진은 입을 벌렸고, 표정이 굳어졌다.
대략 3초 정도 후, 그녀는 이를 악물더니 사람들이 반응하기 전에 검을 부리며 떠났다.
‘못된 놈, 못된 놈, 못된 놈…….’
그녀는 이를 더욱 악물었다. 마음속에 까닭 없이 억울함과 두려움이 솟구쳤다. 그녀가 억울한 이유는, 그가 또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녀는 비록 한 남자로 인해 억울하긴 했지만 이런 심리 상태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미주알고주알 따질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가 두려운 이유는 운주 때의 장면을 다시 보게 될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온몸에 화살이 잔뜩 꽂히고, 칼을 짚은 채 시체 더미 위에 서 있는 그 모습은 지금까지도 천종 성녀의 마음속에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사건 조사면 사건 조사지, 충동적으로 어리석은 짓을 하면 안 됐다. 그녀는 허칠안의 성격을 알기에 그가 그때처럼 될까 봐 두려웠다.
* * *
땅!
진북왕은 단칼에 길리지고의 거대한 검을 밀쳐내고는 더 이상 전투에 연연하지 않은 채 허공을 갈라 성안으로 다시 돌진하여, 한층 더 실해지고 매혹적인 기운을 내뿜는 혈단으로 달려들었다.
그의 단단한 갑옷이 금빛에 녹아내리면서 피부가 온통 빨개져 불에 그을린 흔적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결코 3품 무사의 전진하는 발걸음을 막을 수 없었다.
진북왕이 손바닥을 펼치고 빨아들이는 동작을 취하자 혈단이 그를 향해 날아갔다.
흰 치마의 여인이 손바닥을 내밀자 뒤틀린 기기가 거대한 손바닥에 맺혔고, 그대로 측면에서 혈단을 잡아 저지하려고 했다.
검은 사람 형체는 두 손을 결인(結印)하여 불결하고 사악한 탁류를 만들어냈다. 썩어 문드러지고 반투명한 손바닥이 그 기기를 없앴다.
“후…….”
진북왕이 곧 혈단을 얻으려는 찰나, 거대한 검이 빙빙 돌며 날아왔다. 목표는 진북왕이 아니라 성인 주먹 크기만한 혈단이었다.
펑!
혈단은 지표에 꽂혔으나 여전히 은은한 핏빛을 내뿜었다. 파괴되지 않았다.
집보다도 키가 큰 푸른색 거인이 천천히 걸어와 손을 뻗어 거대한 검을 다시 소환하여 손바닥에 쥐었다.
* * *
북쪽에서 적색의 거대한 구렁이가 성벽을 기어올랐다. 성벽의 마도를 따라 재빠르게 움직이자 돌출된 성가퀴가 종잇장처럼 잘게 부서졌다. 그 몸뚱어리 아래의 벽체가 쉴 새 없이 붕괴하여 언제든 무너져 내릴 듯했다.
초주성의 호성 진법이 깨졌다.
이는 예상했던 일이었다. 본래도 진법이 3품 강자를 끝까지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지종 도수, 만요국의 새로운 국주, 대봉 진북왕, 무신교의 신비로운 고수, 오랑캐 3품 강자, 적색의 요족 구렁이……. 모든 고수가 초주성에 모여드니 무서운 기운이 감돌고, 성안의 생존한 강호 인사들이 전전긍긍하며 두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알고 보니 조력자가 있었군.”
푸른색 거인 길리지고는 구리 방울 같은 큰 눈으로 적진을 훑어보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그 주술사는 보아 하니 고작 3품이더군. 군대를 동원하고 장수를 파견하니 따라올 자가 없네. 서로 맞붙어 싸우다 보니 내가 한 손으로 때리기에는 역부족이야. 이 지종 도수는 불결한 힘을 등에 업어 우려할 게 없네. 마치 똥통 속 구더기처럼 혐오스럽긴 해도 우리에게 아주 큰 위협을 주지는 못해.”
입 냄새가 진동하는 촉구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술사의 정혈은 계륵이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아. 동북 무신교와 우리 요족은 원한이 있으니 이 3품 주술사는 내가 처리하지. 길리지고, 지종은 수법이 괴상하고, 게다가 이 자는 사도에 빠졌으니 더욱 성가실 거야. 자네가 상대편 진북왕에게 가 국주더러 지종 요도를 상대하라고 하게.”
신비로운 술사는 촉구의 오만방자한 말투를 비웃더니 천천히 말했다.
“오늘은 단(丹)을 정제하기에 적합하고, 전쟁하기에 적합하고, 촉구를 베기에 적합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