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타경-480화 (477/712)

480화. 사방에서 움직이다 (3)

허칠안은 정흥회의 일을 간단하게 구술했다.

왕비가 중얼거렸다.

“나는 비록 그를 좋아하지 않고, 그들 형제 둘이 나를 거래하는 상품으로 삼는 건 더 혐오해. 하지만 나는 내심 탄복했었어. 그는 대봉 무도의 일인자로 재능과 지략이 뛰어나고 대봉 백성을 위해 변방을 수십 년간 수호했는데…….

내가 틀렸어. 그는 이기적인 자야. 그가 변방을 수호한 건 백성을 위한 게 아니라 그저 대봉은 그들 집이니 외부인의 약탈을 허락하지 않은 것뿐이었어. 마찬가지로 그들의 눈에 백성은 상품이야. 거래할 수 있고 희생할 수 있고 그가 필요로 할 때 아무런 망설임 없이 희생할 수 있는 상품.”

그녀는 진작에 진북왕이 백성을 도살했음을 알았다. 그저 허칠안이 대량 학살 과정을 거론하자 순간 감정을 제어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진북왕의 만행을 너그러이 용서할 수 없었고, 호국공 궐영수는 더욱이 갈기갈기 찢어 죽여야 했다. 하지만 그는 3품 무사이지 대봉의 친왕인데 누가 그에게 죄를 물을 수 있단 말인가?

누가 또 그에게 죄를 인정하고 처형받으라 할 수 있겠는가?

이때 그녀는 허칠안이 하는 말을 들었다.

“저는 며칠 떠나야 하니 본분을 지키며 객잔에 머무르십시오. 아무 데도 가면 안 됩니다.”

허칠안은 이렇게 말을 하면서 지서 파편을 책상 위에 두었다.

“저 대신 며칠 보관해 주십시오.”

일단 신수 승려가 주먹과 발을 펼치면, 옷을 포함한 몸에 지닌 모든 물품이 유실될 위험이 있었다.

지서 파편은 중대한 사안이었기에 그는 본래 왕비가 이를 보길 원치 않았다. 가장 좋은 계획은 이묘진에게 맡기는 것이었지만, 왕비가 아직 안에서 자고 있었다. 그녀는 물품이 아니니 계속 지서 안에 있을 수는 없었다.

대봉 제일 미인이 식량이 떨어져 죽지 않게끔 하려면 그는 이런 하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왕비는 멍청한 낭자라 어떠한 지식도 없었다. 그녀에게 지서 파편은 그저 손으로 만든 투박한 거울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왕비는 옥석경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 어디로 갈 건가?”

이 순간, 허칠안의 머릿속에 지푸라기처럼 쓰러지는 백성이 스쳤고, 가슴이 칼에 찔린 서생이 스쳤다. 또한 아이를 안은 채 도망치다가 죽임을 당한 모친과 아이가 스쳤고, 창에 치켜 올라간 아이가 스쳤으며 바닥에 박혀 죽은 정 이공자가 스쳤다…….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진북왕을 징벌하러 갈 겁니다. 그는 그 정혈을 얻을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그와 호국공 궐영수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겁니다.”

허칠안은 차분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기쁨과 분노가 보이지 않았으며 그의 눈빛은 더할 나위 없이 확고했다.

“저는 초주로 갈 겁니다.”

왕비는 그의 눈을 보면서 자신이 이 남자를 저지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소리를 낮추었다.

“자네 돌아와야 해. 내게 약속하게.”

“알겠습니다.”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서서 문 앞으로 걸어갔다.

“허칠안.”

그녀가 그를 큰 소리로 불렀다. 그녀가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황급히 일어난 탓에 의자가 뒤집혔다. 그녀는 몇 걸음 쫓아 나오더니 용기 내어 말했다.

“소년의 의협심이 오도웅(五都雄)과 만났네. 간담이 서늘해지고 털이 곧추서네. 서서 이야기를 나누며 생사를 같이하네. 천금과도 같은 약속 꼭 지키세.”

‘천금과도 같은 약속을 꼭 지켜야 하니, 반드시 돌아와야 해.’

* * *

태천산(馱天山)에서 호각 연주 소리가 ‘우우’하고 울렸다.

청안부 정예 기마병 이만 명이 산기슭 평원에 집결했다. 그들은 머리에 뿔이 나고 비늘 조각으로 뒤덮인 군마를 탄 채 곡도를 휘둘렀다.

호각 소리와 함께 우뚝 솟은 궁전을 멀리 바라보았다.

쿵, 쿵, 쿵…….

무거운 발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왔다. 두 장(丈) 높이의 푸른색 거인이 궁전을 디디며 나오는데 발걸음을 뗄 때마다 경미한 지진이 일어났다. 그가 손에 보통 사람은 사용할 수 없는 거대한 검 한 자루를 끌고 다니는 바람에 지면에 깊은 고랑이 생겼다.

청안부 기마병들은 묵묵히 그들의 우두머리를 주시했다. 적막한 현장에 무거운 발소리만 가득했다.

푸른색 거인은 두껍고 무거운 검을 치켜올려 나지막이 포효했다.

“초주성이다.”

“초주성이다.”

“초주성이다.”

청안부 기마병들은 곡도를 치켜올리고 휘두르면서 울부짖었다.

* * *

북방의 어느 검은 산, 운무가 감도는 산골짜기.

얼굴이 모호한 백의 술사는 벼랑 가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내려다보았다. 산골짜기에는 일 년 내내 흩어지지 않는 짙은 안개가 감돌았으며, 작은 풀조차도 자라지 못하는 불모지에 생명은 자취를 감추었다.

“촉구(燭九).”

백의 술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짙은 안개가 갑자기 들끓기 시작했다. 마치 여인이 베일을 휘두르는 듯했다.

겹겹이 쌓인 짙은 안개 사이로 검은 형체가 재빠르게 스쳐와 백의 술사 앞에 멈췄다.

짙은 안개가 걷히자 거대한 뱀이 한 마리 나타났다. 뱀은 몸 전체가 시뻘겋고 비늘이 없으며 이마에는 꽉 감은 외눈이 있었다.

높이 세운 몸은 산봉우리처럼 높았다. 그 앞에 있는 백의 술사는 개미처럼 보잘것없었다.

전설 속 상고 시대에 북방의 극한 지역을 지배하는 신마가 있었다. 그 신마는 외눈에 비늘이 없고 시뻘겠으며, 눈을 뜨면 낮이고 눈을 감으면 밤이었다고 한다.

북방 요족의 우두머리 촉구가 바로 그 신마의 후예였다.

“초주성이군.”

백의 술사가 웃으며 말했다.

거대한 뱀은 이마의 세로 눈을 번쩍 떴다. 금빛 한 줄기가 하늘 높이 뻗어 나가자, 그 기색을 수십 리 밖에서도 볼 수 있었다.

* * *

깎아지를 듯한 벼랑 위, 뿌리가 휘어진 오래된 소나무 아래에서 인품과 재능이 당대 제일인 어여쁜 여인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소매가 흘러내리면서 뽀얀 팔이 드러났다.

공중에서 선회하던 검은 매가 아래로 돌진하여 여인의 팔뚝 위에 내려앉더니 입에서 사람의 언어를 내뱉었다.

“그자가 소식을 전해왔어. 초주성에 있대.”

흰 치마를 펄럭이는 절세미인이 아름답게 말했다.

“보아하니 그는 정혈을 원할 뿐만 아니라 진북왕의 목숨도 갖고 싶어 하는구나. 모든 요병들에게 초주성으로 진격하라는 내 명령을 전하렴.”

* * *

초주성의 높게 우뚝 솟은 성벽 위, 처마 끝이 치켜 올라간 3층 높이의 거대한 성루가 세워져 있었다. 가장 높은 층에 서면 수십 리 밖까지 바로 볼 수 있었다.

꼭대기 층 대당 안, 한 중년 남자가 칼을 짚은 채 호피가 깔린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백련강으로 주조한 단단한 갑옷을 입었으며 몸에는 선홍색 외투를 걸쳤다. 좁고 길며 매서운 새우 눈에 아주 준수한 이목구비는 원경제와 절반 정도 닮아 있었다.

이 자는 전쟁터에서의 무장의 예기와 황실 가문의 위엄 있는 오만함을 지녔다. 날 때부터 높은 지위를 누리는 권력가라 기개가 범상치 않았다.

그는 대봉 진북왕이었다.

이 친왕의 인생 경력은 전기라고 불릴 만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힘이 아주 세 범을 산 채로 뜯을 정도였지만, 결코 우악스러운 사내는 아니었다. 반대로 회왕은 선천적으로 총명하여 뭇 형제자매보다 훨씬 뛰어났다.

회왕은 살육을 즐기는 성정이라 무도에 매혹되었다. 선황은 일찍이 칠황자는 하늘이 점지한 대봉의 호국 신장(神將)이라고도 했다. 그런 까닭에 황위를 그에게 물려주지 않았다.

회왕 자신 역시 개의치 않았다. 그는 무도 전봉을 차지할 수만 있다면 권력은 자연히 따라오리라고 생각했다. 친왕의 신분은 그저 그가 무도의 정상에 오르는 과정 중의 조력에 불과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이는 미색에 빠졌으며 어떤 이는 금전에, 그리고 어떤 이는 권력에 빠졌다. 또 어떤 이는 수련에 빠졌다.

회왕은 열다섯에 군대를 장악하고, 스무 살에는 경성을 통틀어 적수가 없었다. 그는 스물다섯 살에 북방에 주둔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이미 16년이 되었다.

그가 가장 빛나던 때는 20년 전이었다. 당시 그는 위연을 따라 출정하였는데 부장군을 맡았다. 손에는 진국검(鎭國劍)을 쥐고 남북 오랑캐 고수를 무수히 죽였더랬다.

사서에서는 산해관전역 2등 공신으로 평가받았다.

“보고드립니다!”

검은 장포의 밀정이 고개를 숙인 채 대당으로 성큼성큼 들어오더니 두 무릎을 꿇었다. 손에는 밀서 한 겹을 받친 채였다.

진북왕이 손을 내밀자 밀서가 저절로 손바닥으로 날아왔다. 그는 밀서를 펼치고 차례대로 읽었다.

첫 번째 밀서는 고발서였다. 밀정들을 온 힘을 다하여 변방을 마구잡이로 수색했으나 여전히 왕비와 그녀를 납치해 간 4품 오랑캐 우두머리의 종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두 번째 밀서는 대량 학살 중 도망친 정 포정사에 관한 내용이었다. 서신에는 비연 여협객 이묘진이 정 포정사와 접선하는 데 성공했으나, 천자 밀정이 가로막는 과정에서 불문 고수에게 저지당해 불행하게도 이묘진이 도망쳤다고 적혀 있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밀서는 군정이었다. 청안부의 이만 기마병이 병력을 총동원하였는데 군수품을 휴대하지 않고, 화급(火急)하게 행군하여 초주성을 향해 돌진하는 중이라고 했다.

북방 요족의 우두머리 촉구는 휘하의 요족을 이끌고 남하하는데 초주성을 목표로 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들은 도중에 백성을 약탈하지도 다른 도시를 공격하려 하지도 않은 채 아주 높은 목적성을 가지고 초주성으로 돌진했다. 또한 초주성은 본래 변방과 가까우므로, 황혼 전이면 청안부 기마병과 촉룡(燭龍) 휘하의 요족이 성 밑까지 쳐들어올 것이라 했다.

진북왕 손의 밀서가 가루로 변했고, 밀정을 물렸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서서 아무도 없이 넓디넓은 대당을 바라보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그들에게 발각되었군.”

“이는 예상했던 일입니다. 모남치의 기이함을 아는 자가 적잖이 있습니다. 무수한 눈이 그대를 주시하고 있고, 그대의 수련 경지가 정진하여 그녀의 영온을 쟁취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설령 요 몇 년간 때를 기다렸다고 해도, 그대의 수련 경지를 어림잡을 수 있는 자가 꽤 있습니다. 저희가 초주성을 도살하고 최근 몇 달을 숨긴 것만으로도 이미 성공적인 계략이지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대당 안에 울려 퍼지면서 진북왕에게 대답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있으면 큰 성공을 거두겠나?”

회왕은 평온한 얼굴로 전방을 주시했다.

“일단 전투가 벌어지기까지는 세 시진입니다.”

그 목소리가 가볍게 웃더니 말했다.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평범한 사람의 생명 정수는 그대에게 쓸모없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반드시 그들을 혈단(血丹)으로 정제해야 합니다. 허, 삼십팔만 명이니 당연히 시간과 힘이 소모되지요. 물론, 혼단(魂丹)을 정제해야 하는 게 아니라면, 열흘 전에 혈단은 정제할 수 있습니다.”

그 목소리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모남치를 잃으면, 그대가 설령 혈단을 복용한다고 해도 2품으로 승직할 수 없습니다.”

진북왕이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이미 보완 조치를 다 생각하지 않았는가? 안심하게. 자네에게 약속한 일은 식언하지 않을 걸세.”

그 목소리는 허스키한 웃음 소리를 냈다.

“협력하면 쌍방이 모두 이롭고…… 누군가 왔습니다.”

대문 밖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외눈의 호국공 궐영수가 허리에 긴 칼을 차고, 한 손에는 칼자루를 쥔 채 성큼성큼 다가왔다.

“회왕, 여전히 정흥회의 행적이 없습니다.”

궐영수는 나지막이 말했다.

“이 전쟁 후에 내가 2품으로 승직한다면, 그의 생사에 관여할 필요가 없어지네. 내가 만약 실패해도 자네를 보호할 방법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네.”

진북왕이 담담하게 말했다.

호국공 궐영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전쟁에 자신 있으십니까?”

진북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궐영수는 갑자기 웃음을 짓더니 늠름하게 의자에 앉아 웃었다.

“우리 대봉에도 2품이 나타날 때가 됐군요. 요 몇 년간 북방 오랑캐와 요족이 제멋대로 날뛰며 저희를 안중에 두지 않았지요. 이 전쟁을 치른 후, 태천산을 밟아 평평하게 만들고, 촉구의 피부를 벗기고 뼈를 뽑아 장수들에게 탕을 끓여줍시다.”

진북왕의 엄숙한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궐영수는 그가 젊은 시절에 함께 공부했으며, 이후에 함께 군대를 통솔했다. 산해관전역에서 북경까지 그들은 근 20년 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친형제보다도 더 깊은 정을 나누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그가 백성을 대량 학살하는 일을 처리하도록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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