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9화. 사방에서 움직이다 (2)
양측은 싸우면서 달렸고, 어느새 성문 앞에 도착했다.
전방에는 수백 명의 무장병이 일찍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성벽 위에는 더 많은 병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도지휘사, 호국공 궐영수는 말 등에 높이 앉아 성을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
“정 대인, 도망가지 못하네. 성벽 위에는 정예병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진북왕이 정성껏 배양한 천자급 고수도 있네. 아무도 도망칠 수 없어.”
‘도망가지 못한다. 성문을 닫고, 또 대군과 고수가 높은 곳에서 굽어보며 방어하니 오랑캐 대군이라도 공격해서 뚫을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다…….’
허칠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이런 상황에 직면하자 더할 나위 없이 애가 타고 마음을 졸였다. 그는 이성적으로 스스로에게 말했다. 정씨 집안 사람들은 도망가지 못한다고…….
정 포정사는 말고삐를 조이며 소리쳤다.
“궐영수, 너는 도대체 무얼 하고 싶은 것이냐! 꼭 반란을 일으켜야 하는가!”
궐영수가 섬뜩한 웃음을 지었다.
“너희 같은 개미들을 죽이는데 무슨 반란을 일으킬 것까지 있느냐?”
그는 한쪽 눈에서 잔인한 눈빛을 내뿜었다. 그는 잔혹하고 냉담했다. 그가 긴 창을 치켜올리더니 소리쳤다.
“돌격!”
궁지에 몰린 쥐가 되었다. 상황이 순식간에 위급해졌다. 시위들은 온 힘을 다해 정 포정사와 식구를 보호했으나, 생사를 오가는 상황인 만큼 그들 스스로조차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기력이 없는 보통 사람들까지 이렇게 많이 보살필 수 있단 말인가!
한 차례 돌격 후, 마차가 전복되고 안식구들은 마구 휘두른 칼에 죽었다. 궐영수는 긴 창을 내밀어 정흥회의 손자를 치켜올리더니 광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정 대인, 자네는 청렴하고 공정한 관리라고 허풍 떨더군. 난 속지 않아. 재작년에 회왕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고, 군전(軍田) 사건을 엄격하게 조사하더니 군전을 점유했다는 이유로 나의 유능한 부하 셋을 죽였지. 하지만 오늘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는가? 내가 자네의 자손을 죽이는 건 예의상 주고받는 것이니 잘 받게.”
그는 손을 뿌리쳐 아이의 시체를 정 포정사에게 내던졌지만 이는 구실에 불과했다. 정흥회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받으러 가는 소홀한 틈에 궐영수가 긴 창을 내던졌다.
긴 창은 몸을 관통해 사람을 땅에 꽂았다.
하지만 죽은 사람은 정흥회가 아니라, 칠칠치 못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부잣집 공자님이었다.
정 이공자,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 부잣집 공자는 창백한 얼굴을 들고 흐느껴 울었다.
“아버지, 저 너무 아파요. 저, 저 너무 아파요…….”
그는 여전히 쓸모없는 부잣집 공자였다. 진작에 혼사를 치러 독립하였음에도 여전히 부친에게 울며불며 하소연하곤 했다.
하지만 쓸모없는 폐물은 목숨을 아끼고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위급한 순간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부친을 밀쳐서 제 몸으로 긴 창을 막았다.
그는 부친을 무서워했다. 또 그는 부친이 하자는 대로 무조건 순종했다. 그의 마음속에 부친은 아마도 머리 위의 하늘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존재였으리라.
허칠안은 갑자기 눈물이 흘러 시야가 흐려지는 걸 감지했다. 그는 눈시울이 뜨거워지자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눈물을 닦고 싶었으나 뒤늦게 자신은 그저 방관자임이 떠올랐다. 지금 진정으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정흥회였다.
공정은 여기서 끝이 나고, 화면은 산산조각 났다. 허칠안의 눈에 비친, 마지막 정지 화면은 궐영수의 흉악한 웃는 얼굴이었다.
* * *
그는 갑작스레 깨어나 눈을 떴다. 귓가에는 정흥회가 대성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 포정사는 가족이 참혹하게 죽은 장면을 이렇게 선명하게 떠올리니 가슴이 무너졌다. 공정은 이미 끝이 났다.
격렬하게 울부짖던 소리가 구슬픈 울음소리로 바뀌었고, 아주 오랜 뒤 정흥회는 소매로 꼼꼼하게 눈물을 닦았다. 두 눈을 붉힌 채 공수했다.
“본관이 추태를 부렸습니다.”
“죄송합니다.”
허칠안은 읍을 올려 답례하고 긴 숨을 내뱉었다.
“그 후에는요?”
강궁을 멘 이한이 나지막이 말했다.
“저희는 4품 두 명을 희생한 후에야 성 밖으로 빠져나갔습니다. 그런 뒤 줄곧 이리저리 숨어다녔지요. 은밀히 의협심 있는 인사와 연락하여 진북왕의 음모를 폭로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정흥회 외에 그의 가족들 모두 초주성에서 죽었구나…….’
허칠안은 사람들을 훑어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저 나가서 잠시 혼자 있겠습니다.”
이곳은 공기가 이상하게 무거웠다. 모닥불에서 나오는 이산화탄소가 사람을 아주 불편하게 했다. 허칠안은 좀 가슴이 답답했다.
그는 사람들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돌아서서 동굴 입구로 걸어갔다. 가리고 있던 나뭇가지를 밀치고 걸어 나갔다.
그는 산골짜기에 서서 다소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자 그때서야 가슴의 답답함이 공기와 무관함을 알았다. 메워도 메워도 끝이 없고, 공기를 내뱉기 어려웠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가벼우면서도 나직한 발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초주성으로 가겠네.”
이묘진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큰 증오는 소리가 없었다. 그녀의 차분한 얼굴에서는 기쁨과 분노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확고함이 가득했다.
“초주성을 보러 가야겠소. 분노는 이성을 무너뜨릴 뿐이오. 가기 전에 우리 생각을 좀 가다듬고 혈도 삼천리 사건을 다시 쭉 살펴봐야겠소.”
허칠안이 나뭇가지를 꺾어 입에 물었다.
“진북왕이 백성을 도살한 건 정혈을 정제하여 2품에 충격을 가하기 위함이오. 하지만 정혈 정제는 시간이 필요하오. 따라서 그는 초주성 대량 학살을 택하여 등잔 밑의 어두운 사고와 관성으로 모든 사람을 속인 것이오. 내가 전에 진북왕의 밀정을 죽이고 영혼을 소환해 상황을 물은 적이 있소. 그 밀정은 진북왕이 백성을 도살한 지점을 전혀 모르더군. 하지만 정 포정사의 기억을 보면 학살에 가담한 병사와 밀정이 아주 많소.”
이묘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네 말뜻은 그 병사와 밀정의 기억이 고쳐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건가.”
허칠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 있소. 그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한 지 전혀 모르오. 어찌 됐든 전부 무사가 할 수 있는 짓은 아니오. 따라서 진북왕에게는 조력자가 있소. 다른 체계의 최강자가 그를 돕고 있는 것이오. 그 강자는 심지어 초주성을 ‘원래 모습’으로 되돌릴 능력이 있소. 하지만 어느 체계인지 확실하지는 않소. 북경에 많은 오랑캐가 투입되어 이 일을 조사하고 있으니 진북왕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오. 그가 정혈 정제를 중지하거나 믿는 구석이있어 두려움을 모르는 게지. 이렇게 보니 우리의 실력으로는 뜻한 바를 이루기 어렵겠소. 이 장군, 그대가 소식을 전해 줘야겠소. 오랑캐와 요족에게 전해 주시오.”
이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검을 부려 비행할 수 있기에 소식을 전하는 데 아주 적합했다.
허칠안은 그녀의 시선을 마주 바라보았다.
“내가 여기에서 정 대인을 보호하겠소. 그대가 돌아오면 함께 초주성으로 갑시다.”
이묘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드시 나를 기다려야 하네.”
“질질 끌지 말고 얼른 가시오.”
“알겠네.”
이묘진은 비검을 불러와 재빠르게 검 등으로 뛰어올랐고, 공중에 뜬 채로 섰다.
허칠안은 동굴로 돌아왔다. 정 포정사 등이 잇따라 쳐다보았고,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정 대인, 여러분, 여기에서 제 소식을 기다리십시오.”
정 포정사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 황급히 물었다.
“무얼 하러 가려는 겁니까?”
“사건을 조사하러 초주에 다녀오겠습니다.”
크게 나무랄 게 없기에 정 포정사 등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허칠안은 그들을 훑어보더니 말했다.
“소생은 협객 여러분이 정 대인을 보호하며 늘 곁에 있음에 탄복했습니다. 세상에 여러분 같은 호걸이 있기에 삶이 재미있다고 생각되며 동경하게 만들지요. 저는 여러분께 약속드리겠습니다. 반드시 살인자를 엄벌에 처해 초주 백성에게 정의를 돌려드리겠습니다.”
정흥회는 일어서서 공수했다.
“그렇다면 본관은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이한 등도 공수하였다.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 * *
새벽녘, 허칠안은 작은 현성(縣城)에 도착하여 현지에서 가장 좋은 객잔을 찾았다.
은자를 지불하고 심부름꾼에게 물을 한 통 달라고 했다. 허칠안이 방문을 잠그고 지서 파편을 꺼내어 손을 흔들자 깊이 잠든 왕비가 부드러운 침상 위로 굴러떨어졌다.
“일어나세요…….”
허칠안은 그녀의 얼굴을 툭툭 쳤다. 그는 문득 자신이 이 여인에게 미혼탕을 들이부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즉시 기기를 보내 그녀를 강제로 깨웠다.
왕비는 웅얼거리며 눈을 떴다. 풀렸던 눈동자가 서서히 초점 거리를 회복했다. 그녀는 망연히 허칠안을 쳐다보았고 약 몇 초 후, 갑자기 표정이 굳더니 토끼처럼 침대 밑으로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자세히 살피면서 고개를 돌려 사방을 둘러본 뒤 소리쳤다.
“너, 너, 너, 나한테 뭘 한 거지?!”
그녀가 눈을 크고 동그랗게 부릅뜨고, 험상궂은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겉으로는 얼핏 강하게 보였으나 실제로는 나약한 기색이 엿보였다.
허칠안은 그녀를 보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는 마음이 저도 모르게 부드러워져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마마께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잠을 재웠을 뿐이에요.”
“못 믿겠어. 네가 나를 기절시키고 분명히 내게 나쁜 짓을 했을 거야.”
그녀는 화를 냈다.
‘너도 어쨌거나 젊은 부인의 나이가 됐는데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나…….’
허칠안은 속으로 비아냥거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저 잠시 나갈 테니 직접 확인해 보세요.”
이윽고 그가 문 앞에서 잠시 기다리자, 안에서 젊은 부인인 왕비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씨?”
허칠안은 문을 밀고 들어갔다.
* * *
왕비는 화장대에 앉아 머리를 빗고, 옆으로 돌아앉아 곁눈질로 그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별일 없는데 왜 나를 때려서 기절시켰지?”
그녀는 계속해서 거울 속의 자신을 주시하며 머리 빗는 일에 전념했다.
그녀는 마음속의 분노가 많이 가라앉아 보였다.
허칠안은 나무통을 들고 양푼에 물을 따랐다. 그리고 붉은색 물약 병에 옮겨 부었다. 그는 얼굴 전체를 파묻고 끊임없이 문지르고, 또 끊임없이 문질렀다.
대략 일각 후, 허칠안은 얼굴 피부가 뜨거워졌다. 그가 다시 얼굴을 들었을 때는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이 자식 끝장나게 잘생겼어. 고천락(*古天樂: 중국의 미남배우)이 부끄러울 정도야. 당대에 극히 드문 미남이지…….’
허칠안은 이렇게 여겼더랬다.
그는 왕비를 밀치고 거울 속의 낯익은 얼굴을 바라보며 갑자기 넋을 잃고 말았다.
잠시 뒤, 그는 중얼거렸다.
“오랜만입니다…….”
왕비는 그를 자세히 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역용한 자는 누구인가? 평범하기 그지없는 모습이 잠복하기에는 아주 적합하지.”
그녀는 말을 마친 뒤, 허칠안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곁눈질하는 모습을 보았다.
‘뭐가 잘생긴 건지는 아는 거니?’
허칠안은 왕비를 쳐다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저는 사건 조사하러 갑니다. 마마를 데리고 가기에 편치 않아 이런 하책을 내놓습니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진북왕이 도살한 건 초주성입니다.”
탁!
나무 빗이 바닥에 떨어졌다. 왕비는 정신을 차리고 놀람과 비통함이 뒤섞인 얼굴로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초, 초주성?”
누구든지 이 소식을 들으면 믿을 수 없었을 터였다.
왕비도 예외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