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8화. 사방에서 움직이다 (1)
황혼, 새빨간 석양.
허칠안 앞에는 아주 풍성한 요리가 보였고, 탁자에는 부드러운 기질의 노부인이 앉아 있었다. 한 젊은이와 아름다운 여인 그리고 나이가 각기 다른 아이 둘이 있었다.
‘그들은 정흥회의 가족이다……. 나는 지금 정흥회를 1인칭 시점으로 하여 그의 기억을 회상하고 있다…….’
허칠안은 한 번 공정해 본 적이 있기에 즉시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정흥회가 아들을 꾸짖는 걸 조용히 들었다.
정흥회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다. 장남은 벼슬길에 올랐는데 정흥회의 가르침 덕에 명성이 아주 좋았고 앞길이 창창했다.
둘째 아들은 부잣집 공자로 온종일 매와 개와 씨름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또 정흥회는 가정 교육이 엄격했기에 이 둘째 아들은 남을 기만하는 행위를 하지는 못했고, 부잣집 공자 노릇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폐물이었다.
오늘 정 이공자는 기생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군관과 마찰을 빚어 한 차례 호되게 두들겨 맞았다.
정흥회는 둘째 아들을 큰 소리로 꾸짖으며 험한 말을 내뱉었다.
정 이공자는 굴하지 않고 억울해했다.
“아버지, 저는 그저 기생집에 갔을 뿐입니다. 제가 말썽을 부린 게 아니라 그 필부가 자진해서 시비를 걸었다고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그래, 기생집에 놀러 가는 게 뭔 잘못이라고?’
허칠안은 정 이공자를 위해 불평을 늘어놓았다.
“아버님, 저 친정에 다녀오고 싶어요. 다음 달이면 저희 아버지 환갑이시거든요.”
이때 며느리가 입을 열었다.
정흥회가 아직 입을 떼기도 전에 둘째 아들이 연거푸 손사래를 쳤다.
“미쳤어? 요 근래 밖에 오랑캐가 흉흉하고, 초주성은 또 변방에서 이렇게 가까운데 함부로 성을 나섰다가 도중에 오랑캐 유격병을 만나면 어떡하려고?”
그는 얼굴에 두려운 기색을 보이며 사활을 모르는 아내를 꾸짖었다.
정흥회가 화를 냈다.
“죽음이 두려워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놈 같으니라고. 내가 어찌 이런 폐물을 낳았을꼬!”
허칠안은 정흥회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공정 상태에서 아들이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한 데에 정흥회가 분노하고 있음을 체득할 수 있었다.
그는 이 둘째 아들에게 실망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둘째 아들이 장점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장남의 머리카락 하나에도 비할 바가 못 된다고 생각했다.
이때 경갑을 입은 사나이가 안방으로 황급히 달려 들어왔다. 그는 쇠뿔 활을 메고 허리에는 긴 칼을 차고 있었다. 바로 이한이었다.
이한은 연거푸 말했다.
“대인, 위소의 군대가 웬일인지 갑자기 성으로 들어와 마구잡이로 백성을 집결시키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정흥회는 깜짝 놀랐고, 다소 망연하게 캐물었다.
“위소 군대가 백성을 집결시킨다니? 어디에 집결시키며 누가 군대를 이끄는 것인가?”
‘백성을 집결시키고 대학살?’
허칠안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정신을 좀 차리자 이한이 하는 말이 들렸다.
“백성이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집결하고 있고, 군대를 이끄는 건 도지휘사, 호국공 궐영수입니다. 그는 지금 아마 남성 쪽에 있을 겁니다.”
정흥회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일어서서 말했다.
“말을 준비하게. 본관이 봐야겠네. 주 선생에게 나와 함께 가자고 통지하게.”
정흥회는 즉시 저택의 ‘객경’을 데리고 말을 타고 남성으로 내달렸다. 아니나 다를까 가는 길에 위소 병사가 백성을 호송한 채 대오를 이룬 모습이 보였다. 그는 병사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알지 못했다.
“멈추게! 너희는 무얼 하려는 것이냐?”
정흥회가 큰 소리로 저지했다.
무장한 병사들은 차갑게 그를 바라보며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정흥회가 다시 소리치며 물었으나 여전히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그는 마음속에 불길한 예감이 솟구쳤다. 그래서 더는 말단 병사들에게 얽매이지 않고, 세차게 말을 채찍질하여 길을 따라 남성 방향으로 미친 듯이 내달렸다.
정흥회는 길가의 병사들을 따라 이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는 새까만 사람 머리를 보았는데 대략 어림잡아도 십여만 명은 족히 돼 보였다.
시정 백성, 상인 심지어 관아의 하급 관리도 있었다. 이들은 남성의 한 황무지에 빽빽하게 집결되어 있었다.
수천 명의 무장병이 그들을 겹겹이 둘러쌌다. 어떤 병사는 강궁을, 어떤 병사는 군노를 메고 있었다.
정흥회는 훑어보다가 말등 위에 높이 앉은 도지휘사 궐영수와 그의 곁에 검은 장포를 두른 십여 명의 밀정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진북왕의 밀정…….’
정흥회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지막이 소리쳤다.
“호국공,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정 포정사, 자네 마침 잘 왔네.”
궐영수는 한쪽 눈으로 차갑게 보더니 말했다.
“정 대인, 오랑캐가 변방을 수차례 침입하여 불태우고 약탈하고 죽였네. 자네는 왜인지 아는가?”
정흥회는 그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백성들을 집결시키는 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궐영수는 손에 쥔 긴 창으로 수십 만의 백성을 가리키며 크게 웃었다.
“당연히 관련 있지. 명색이 대봉 백성으로서 응당 대봉 변방의 안위를 위해 허리를 굽히고 죽을 때까지 힘을 다해야 하는 법. 대봉 국조(國祚)로서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지. 정 포정사는 본 공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기는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만…….”
정흥회가 마침 호통을 치려는데 갑자기 궐영수가 엎드려 말 배를 양쪽 겨드랑이에 끼더니 백성을 향해 돌격하였다.
푹!
그는 긴 창으로 한 백성의 가슴을 찌른 뒤 그대로 높이 치켜들었다. 선혈이 쏟아졌고, 창끝의 남자는 고통스러워하며 몇 차례 몸부림치더니 사지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주위의 백성들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이 피비린내 나는 장면을 보지 못한 더 먼 곳의 백성들은 여전히 망연했다.
정흥회는 노발대발했다.
“궐영수, 감히 백성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다니. 미쳤는가?”
‘대량 학살이 시작되겠군…….’
허칠안은 이미 이어질 스토리를 알고 있었다. 그는 공정을 통해 이때 정흥회의 경악과 분노를 깊이 이해했다.
“정 대인, 화내지 말게. 곧 자네 차례니.”
궐영수는 손을 홱 뿌리쳐 창끝의 시체를 내던지고는 손을 크게 휘둘렀다.
“발사!”
수천 명의 무장병이 동시에 활을 굽혀 집결한 무고한 백성을 겨누었다.
슉슉슉…….
천지를 뒤덮은 화살이 세차게 발사되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메뚜기 떼나 폭우처럼 빽빽해 보였다.
화살 한 개당 한 생명을 앗아갔다. 백성들은 화살을 맞아 땅에 쓰러졌고, 절망의 통곡 소리를 내뱉었다. 생명이 마치 지푸라기 같이 스러졌다. 이 중에는 노인과 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운 좋게 첫 번째 화살 비를 피한 사람들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건 정예 병사의 도살용 칼이었다. 명색이 대봉 병사가 대봉 백성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베어 죽이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죽이지 마세요, 죽이지 마세요!”
백성들은 당황하고 놀란 나머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그들은 왜 대봉의 군대가 자신들을 죽이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변방을 수호하는 장병들이 오랑캐를 죽이러 가지 않고, 도살용 칼을 그들에게 휘두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푹…….
도살용 칼이 떨어지고 사람은 바닥으로 쏟아졌으며 선혈이 튀었다.
병사들은 그들이 용서를 구하거나 무릎을 꿇었을지언정 조금의 연민도 품지 않았다.
“개자식들, 너희들 뭐 하는 짓이냐! 나는 부학(府學)의 서생으로 수재공명(秀才功名)이다. 무고한 백성을 도살하다니, 극악무도하도다……!”
청색 유삼을 입은 지식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용감하게 일어섰다. 그는 백성 앞에 일어서서 큰 소리로 병사들에게 호통을 쳤다.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십장이 ‘쨍’하는 소리와 함께 패도를 뽑아 서생의 가슴을 거칠게 찔렀다.
따뜻한 선혈이 칼끝을 따라 흘렀고, 서생은 그를 주시했다. 기어이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허칠안은 자신의 영혼이 떨리는 것을 감지했다. 그는 이 떨림이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는지 아니면 정흥회 탓인지 몰랐다. 아마 둘 다일 듯했다.
“모든 사람을 죽여라. 산 증인을 남기지 마라.”
궐영수는 긴 창을 치켜올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산 증인을 남기지 말라는 말에는 당연히 현장에 있는 정 포정사도 포함되었다.
밀정 여러 명이 무기를 빼 들고 기세등등하게 정 포정사를 죽이러 왔다.
주 객경은 사타구니 아래로 허리를 굽히고 주먹에 투명한 화염 같은 기기로 불을 붙였다. 공기가 뒤틀리면서 확 한 방을 날렸다.
검은 장포의 밀정이 물러나지 않고 도리어 전진하면서 예리한 발톱처럼 다섯 손가락으로 휙휙 날아오는 권경(拳勁)을 위협했다. 세차게 떼어내자 ‘후’하고 권경이 흩어지면서 돌풍이 되었다.
“대인, 얼른 가십시오!”
주 객경은 남아서 후방을 엄호했고, 나머지 시위는 정흥회를 데리고 도망갔다.
말은 쏜살같이 달렸다. 정흥회는 마지막에 고개를 돌렸는데 병사 수천이 활을 구부려 힘껏 발사하자 화살이 백성의 몸을 관통하는 광경이 보였다. 또 병사들이 패도를 휘둘러 아이를 안은 채 도망치는 모친을 베어 죽이는 모습을 보았다. 궐영수가 말 등 위에 높이 앉아 한쪽 눈으로 이 모든 걸 냉담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생명이 지푸라기 같았다.
‘짐승…….’
허칠안은 자신의 것인지 이묘진 것인지 아니면 정흥회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
길가의 병사들은 그들을 무시했다. 기계적이면서 무감각하게 백성들을 호송하는 업무를 반복했고, 그들을 지정된 장소에 몰아넣었다.
정흥회는 이 백성들이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알았다. 몇 차례 시위에게 원조하라고 명령했으나 시위들은 거절했고, 정흥회를 호송하여 저택으로 돌아왔다.
“나는 저택의 시위들을 집결하러 갈 테니 자네들은 속히 부인과 공자들께 통지하러 가게. 우리는 지금 즉시 성을 떠나 돌진하는 걸세.”
쇠뿔 활을 멘 이한이 소리쳤다.
이내 저택의 시위가 앞마당에 집결했다. 무기와 갑옷 외에 그들은 어떠한 귀중품도 휴대하지 않았다.
“아버지, 아버지……. 무슨 일이에요? 오랑캐가 쳐들어왔나요?”
정 이공자가 안식구를 데리고 달려왔다. 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으며 겁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성 안의 병사들이 군사 정변을 일으켜 백성을 학살하고 있다. 우리 역시 그 안에 속하니 속히 성을 나서자꾸나.”
정흥회는 요점만 간단하게 말했다.
정흥회는 이때까지도 막막했다. 그는 궐영수와 진북왕이 왜 백성을 집결시켜 도살해야 하는지, 무슨 목적에 기인하여 이러한 만행을 저지르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는 관리 사회에 반평생을 몸담은 만큼 진상을 탐구할 때가 아님을 잘 알았다. 현재 계획은 우선 초주성을 떠나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정 이공자는 몸을 휘청거려 하마터면 제대로 서 있지 못할 뻔했다. 그러자 뜻밖에도 그의 아내가 그를 부축해주었다.
정흥회를 포함한 모두는 이미 이공자의 칠칠치 못한 모습에 익숙했다.
안식구와 아이는 시위의 보호를 받으며 마차에 오르고, 나머지는 말에 올라 성문 방향을 향해 미친 듯이 질주했다.
“그들이 쫓아온다.”
쇠뿔 활을 멘 이한이 소리쳤다.
검은 장포의 밀정 여러 명이 추격해왔다. 그들의 질주 속도는 말보다도 훨씬 빨랐다. 이한은 허리를 비틀고 돌아서서 활을 세게 잡아당겼고, ‘뻥’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휙휙 날아갔다.
밀정들은 약자가 아니었기에 화살을 하나씩 피하여 순식간에 돌진해왔다. 그들은 긴 칼을 휘두르며 하늘에서 내려와 마차를 향했다.
“대인을 보호해라.”
자색 장포 차림의 위유룡이 칼을 되받아쳐서 밀정의 칼끝을 막았다. 기기가 요란하게 폭발했고, 마차는 부서지기 직전의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