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7화. 공정(共情)
이묘진은 운해 위를 일각 동안 비행하다가 방향을 꺾어 다시 일각을 날았다. 그녀는 마침내 발끝을 눌러 두 사람을 데리고 운해를 뚫은 다음 다시 인간 세상으로 돌아왔다.
“방금 그자는 진북왕의 밀정인가?”
그녀가 전음으로 말했다.
“천자(天字)급 밀정입니다.”
조진이 전음으로 대답했다.
“이 정도 수련 경지면 틀림없이 천자급 밀정입니다. 허 은라 말씀이 맞았습니다. 역시나 저희는 뒤를 밟혔습니다.”
그는 감개무량하면서도 탄복하는 표정을 지었다.
“두 분이 계셔서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방금 저는 틀림없이 죽었을 겁니다.”
그는 비연 여협객과 허 은라의 대단함을 본 만큼, 뒤따를 행동에 점점 자신감이 붙었다.
그들 둘이 돕길 원한다면, 틀림없이 이 일을 경성에 전할 수 있을 테고, 조정에서 진북왕에게 죄를 묻게 할 수 있을 터였다.
* * *
반 시진 후, 이묘진은 조진의 안내에 따라 산골짜기 바깥에 낙하했다. 허칠안은 바닥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적의에 찬 눈빛이 자신을 바짝 따라붙었다는 걸 눈치챘다.
이는 연신경 무사의 직감으로, 주변에 적의에 찬 시선과 생각을 포착할 수 있었다.
‘습격하는 장면을 피드백하지 않았다는 건 상대가 한동안은 나설 생각이 없다는 걸 의미한다…….’
허칠안은 아무렇지 않게 옆으로 고개를 돌려 조진을 쳐다보았다.
후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더니 아울맨처럼 울부짖었다.
몇 초 후, 산골짜기에서 같은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둘의 주파수가 일치했다.
또 한참 후, 체구가 크고 훤칠한 형체가 산골짜기 밀림에서 걸어 나왔다. 허리에 긴 칼을 차고 쇠뿔로 만든 강궁을 메고 있었다. 전형적인 북경 무사의 표준이었다.
“조 형, 드디어 왔는가.”
온 사람은 구레나룻 사나이로 키는 7척(尺)에 터질 듯한 근육이 옷을 떠받치고 있었다. 거친 용모에는 북경 사람의 진한 외모 특징이 묻어났다.
그는 먼 곳에 선 채 더 다가오지 않고, 허칠안과 이묘진을 살피며 물었다.
“그들은 누군가?”
조진이 설명했다.
“이분은 비연 여협객 이묘진이자 천종 성녀네. 이분에 관해서라면, 헤헤, 그는 명성이 자자한 은라 허칠안이네. 두 분, 저자가 바로 제 의형제 이한(李瀚)입니다. 6품 무사이지이요.”
쇠뿔 활을 멘 훤칠한 체구의 사나이는 아주 조심스럽게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여러분께서는 자신의 신분을 어떻게 증명하실 겁니까?”
이묘진이 향낭을 두드리자 푸른 연기가 하늘하늘 피어올랐고, 허공에서 움직이며 이따금 귀신 울음소리를 냈다.
“이 귀신을 다루는 방법을 아는 존재는 무신교 외에 도문뿐이지요.”
쇠뿔 활을 멘 훤칠한 체구의 사나이는 즉시 허칠안을 향해 읍을 올렸다.
“저희는 수색망을 피해 다니느라 반드시 신중해야 합니다. 귀하께서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자신이 허 은라임을 어떻게 증명하실 건지요?”
허칠안은 신분을 상징하는 요패를 꺼내 말없이 내던졌다.
“이걸 정흥회에게 전해 주면 그가 자연스레 내 신분을 알 수 있을 거요.”
강호 필부가 꼭 야경꾼 요패를 알아볼 수 있다고는 할 수는 없었지만, 명색이 한 주(洲)포정사인 정흥회가 그에게 낯선 존재일 리는 없었다.
훤칠한 체구의 사나이는 요패를 받아 잠시 침음하더니 말했다.
“두 분,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는 즉시 산골짜기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 * *
약 일각이 흐른 뒤, 허칠안은 횃불의 빛이 자기 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았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맞이하러 나왔다. 앞장선 자는 수척한 노인으로, 염소수염을 기르는 50대 초반이었다. 그의 첫인상에서는 고지식하고 위엄 있으며 윗사람답게 엄숙한 기질이 엿보였다.
이 자 뒤로는 강호 인사 여섯 명이 따르고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은 허칠안에게 아주 큰 위협을 주었다. 그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며, 짙은 눈두덩이를 지니고 있었다. 마치 과도하게 욕심을 부리다가 탈탈 털린 몸 같았다.
나머지 다섯 명 중에는 조진의 의형제 이한과 남자 셋, 여인 하나가 있었다.
허칠안이 모든 이들을 살필 때, 상대방 역시 그와 이묘진을 관찰했다. 모든 이들은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 곁눈질로 사람을 쳐다보는 이 젊은 남자가 좀 오만하다고 생각했다.
수척한 노인이 허칠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읍을 올렸다.
“정말 허 은라입니까?”
“그렇네!”
허칠안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바닥으로 볼을 받치고 가볍게 문지르자 본 모습으로 돌아왔다.
“정말 허 은라군요.”
이한은 기뻐하며 웃었다.
현장에 있던 모든 이가 마치 허칠안의 초상화를 본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허 은라다. 어쩐지 목을 기울인 채 곁눈질로 사람을 쳐다본다더니. 이 오만하고 방자한 기세는 보통 사람이 이를 수 있는 게 아니지.’
“본관은 초주 포정사 정흥회입니다.”
수척한 노인이 읍을 올렸다.
“여기는 말할 곳이 아니니 안으로 드시지요.”
* * *
허칠안과 이묘진은 그들을 따라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골짜기의 넓고 깊은 천연 동굴은 산 중턱까지 바로 뚫려 있었다.
조진은 동굴 입구에 있는 잔가지를 옮겨와 간단하게 위장했다.
동굴 안에는 모닥불이 타고 있었다. 건초로 간단한 ‘침상’을 깔아놓았고, 바닥에는 뼈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이밖에 이곳에는 솥과 비축된 식량도 있었다.
‘성에서 도망친 후에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군…….’
허칠안은 동굴을 훑은 다음 정흥회의 손짓에 따라 모닥불 옆에 앉았다.
“저들 모두 제 저택의 객경들입니다. 원래 저희가 도망쳐 나올 때는 2스무 명 언저리였는데 지금은 여섯 명밖에 남지 않았지요.”
정흥회가 그들을 소개했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그 남자는 신도백리(申屠百里)라고 불렸다. 5품 화경 고수로 4품 둘이 고공에서 떨어진 후에 그는 이 재난 대오에서 최강자가 되었다.
나머지 세 남자 중에 통통한 사나이는 위유룡(魏遊龍)이라고 했다. 수련 경지는 6품으로 꾀죄죄한 자색 장포를 입고 있었고 무기는 대도였다.
긴 창을 쓰는 자는 당우신(唐友愼)이라고 했다. 그는 왼쪽 뺨에 칼자국이 하나 있었고, 사람을 볼 때의 눈빛이 마치 칼처럼 날카로웠다. 허칠안은 마찬가지로 매의 눈처럼 날카롭기로 유명한 강율중이 떠올랐다.
정흥회의 소개에 따르면, 당우신은 군인 출신으로 상급자에게 미움을 사 파면되었다. 그는 후에 정흥회의 부름을 받으면서 저택의 객경이 되었다.
장검을 등에 멘 마지막 남자는 수려한 이목구비의 진현(陳賢)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외모의 젊은 부인은 그의 아내로, 부부 둘이 마찬가지로 검을 다뤘다.
거기에 조진의 의형제 이한을 더하면 딱 6명이었다.
허칠안은 모든 사람을 훑어본 뒤 이묘진을 쳐다보았다. 이묘진은 마음속으로 깨닫고 향낭 위의 붉은 끈을 열어 푸른 연기 한 가닥을 내보냈다.
푸른 연기는 허공에서 얼굴이 흐릿한 사나이로 변했다. 그가 중얼거렸다.
“혈도 삼천리, 조정에서는 군대를 파견하여 토벌해 주십시오…….”
그는 이 말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위유룡은 대도를 짚은 채 잔혼을 주시하면서 비통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는 전유의(錢有義)라고 합니다. 그해 저와 함께 강호를 떠돌던 형제이지요. 저희는 일찍이 화물 호송원을 했었는데 향신(*鄕紳: 퇴직한 관리로 그 지방에서 학문과 덕망이 높은 자)을 죽이고 나중에 저는 정 대인 휘하에서 힘을 쓰고, 그는 계속해서 강호를 떠돌아다녔지요.
초주의 백성을 대량 학살한 후, 정 대인을 포함한 저희 여섯은 이미 진북왕의 밀정에게 지명 수배당해 먼 길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제가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바로 저자입니다. 그는 여전히 그해 제 형제입니다. 친구를 위해 위험을 무릅쓸 수 있는 형제가 되고 싶었는데…….”
그는 여기까지 말을 마치자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살진 얼굴을 애써 문질렀다.
동료들은 고개를 살짝 숙였고, 분위기가 다소 무거워졌다.
정흥회가 탄식했다.
“저희는 강호 호걸 여러 명을 찾아 도와 달라는 서신을 보냈습니다. 경성에 있는 그해 오랜 벗에게 가져가 진북왕의 만행을 까발리고자 했지요. 하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왜 초주 관리 사회에서 진북왕을 폭로하지 않았습니까?”
허칠안이 물었다.
“소용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만 다치게 할 뿐이지요. 소식이 일단 퍼져나가면 암살할 진북왕 밀정을 불러들이는 꼴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초주성에서 지금까지 멀쩡하게 잘 사는데…… 누가 믿겠습니까? 진북왕 밀정의 추격만 불러올 뿐입니다.”
정흥회는 고개를 저었다. 눈빛에는 당혹과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는 밀정에게 암살당할까 봐서가 아니라, 초주성의 현황 때문에 두려웠다.
‘사실 오랑캐와 요족 모두 진북왕이 백성을 학살한 장소를 찾고 있다고. 애석하게도 그쪽은 이런 차원의 투쟁을 알지 못해. 소식이 퍼져나가기만 한다면, 조정에서 사절단을 파견해 사건을 조사하러 올 필요가 전혀 없거든.’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정 포정사의 설명을 받아들였다.
“여러분은 조정에서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한 사실을 알겠지요.”
허칠안이 그를 떠보았다.
“저희는 조진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가 정기적으로 서신을 보내오니까요. 하지만 저희는 멸구당할까 봐 두려워 사절단을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더군요. 진북왕이 도시 백성을 전부 죽이는 짓조차 하는데 하물며 사절단은요?”
쇠뿔 활을 멘 이한이 울분을 토했다.
“제가 바로 수석 수사관입니다.”
허칠안이 자신의 신분을 강조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희색을 드러냈다. 경성은 초주에서 만 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들은 허 은라의 명성을 익히 잘 알았다.
허 은라는 기이한 사건을 해결한 데다가 불문 두법 사건으로 명성을 크게 떨쳤다. 허 은라는 초주에 있지 않았지만, 초주에 그에 대한 전설은 있었다.
정흥회는 일어서서 의관을 단정히 하고 읍을 올렸다.
“허 은라께서 초주 백성을 위해 책임지고 해결해 주십시오.”
허칠안은 대답 대신 반문했다.
“정 대인께서는 초주 현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대인 말씀에 따르면 초주는 이미 백성이 대량 학살당했는데, 또 어찌 지금은 태평성대인 듯한 모습입니까?”
정흥회는 굳은 얼굴로 풀이 죽어 말했다.
“본관 역시 소름이 끼치고, 의혹이 풀리지 않습니다.”
신도백리 등도 역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허칠안은 이묘진을 쳐다보더니 전음으로 말했다.
“내가 망기술로 보았는데 거짓말하지 않았소. 허나 이는 현실과 상반되잖소. 망기술 외에 거짓말을 감별할 방법이 또 있소?”
저속한 무사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럴싸한 도사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묘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전음으로 대답했다.
“공정이라는 법술이 있는데 상대방의 영혼과 잠시 융합하여 기억을 서로 교환할 수 있네. 자네가 들어본 적 있는지 모르겠군.”
‘공정?’
허칠안은 어리둥절하다가 저도 모르게 그날 저택을 구매할 때가 떠올랐다. 당시 그는 저채미의 도움을 받아 우물 속의 여자 귀신과 공정하여 제당 병부상서가 무신교와 결탁한 경위를 보았더랬다.
당시에 그는 1인칭 시점으로, 그 주술사에 의해 수없이 들락거렸다.
비록 진짜 감각은 없지만 1인칭 영화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엄청난 트라우마를 조성했다.
‘이건 안 돼. 내 몸 전체가 비밀인데 일단 공정하면 진북왕 밀정이 찾아오기도 전에 나는 그들을 죽여 멸구해야 할 거야…….’
허칠안이 전음으로 말했다.
“일방적으로 공정할 방법은 없소? 나는 내 기억을 다른 사람이 엿보지 않았으면 하오.”
이묘진은 웃더니 자신감 넘치게 전음했다.
“당연히 가능하지.”
허칠안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그날 백성을 도살하는 장면을 자신에게 보여 달라고 했다.
“정 대인, 저희가 그날 백성을 도살하는 광경을 좀 보려 하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허칠안은 말을 마치고 이묘진을 쳐다보았다.
천종 성녀가 덧붙였다.
“눈을 감고 그날 대량 학살할 때의 세부 사항을 떠올려 보십시오.”
정흥회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피비린내 나고 잔인하여 시시때때로 그를 놀래켜 깨어나게 하는 그날 밤을 떠올렸다.
이묘진은 소매 속에서 부적 세 장을 꺼내 각각 자신과 허칠안 그리고 정흥회 세 사람의 이마에 붙였다. 뒤이어 그녀는 허칠안의 어깨를 누르고 몸을 훌쩍 날렸다.
허칠안은 자신이 뛰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가 고개를 숙여 보니 놀랍게도 자신과 이묘진이 분명히 제자리에 남아 있었다.
‘원신이 가출했나?’
그가 자세히 물을 겨를도 없이 정흥회 이마의 부적에서 거대한 흡입력이 생기더니 소용돌이로 변했고, 그와 이묘진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