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화. 백마와 은색 창의 이묘진
대봉 백성은 북쪽 야만인을 북방 오랑캐라고 칭했고, 남쪽 야만인은 남강 오랑캐라고 형용했다. 오히려 북방 요족이 대봉 백성 입에 오르내리는 빈도가 북쪽 야만인에 훨씬 못 미쳤다.
이는 초주 변방과 인접한 토지는 대부분이 북방 오랑캐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북방 요족의 영역과 동북 무신교는 큰 면적이 인접해 있었다.
이렇기에 동북 무신교와 북방 요족은 철천지원수로 언제나 전쟁을 벌이곤 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지역 환경을 바탕으로, 북방 요족와 북쪽 오랑캐는 가장 친밀한 동맹국이 되었고 때로는 양측이 혼인 관계를 맺기도 한다.
북방 오랑캐에는 아홉 개의 부락이 있고, 모든 부락마다 적어도 4품 고수가 세 명씩 있다. 대봉의 억대 인구에 비하면, 북쪽 오랑캐의 인구는 불쌍할 정도로 적었다.
허나 명색이 신마 혈통인 그들은 개인 전투력 면으로는 보통 인족을 압도하는 절대적인 우세를 갖고 있었다.
백 명 규모의 오랑캐 유격병과 천 명 규모의 대봉 유격병이 만약 밖에서 맞닥뜨린다면, 전군 전멸은 틀림없이 화포와 상노의 지원을 받지 못한 대봉 유격병일 것이다.
초주 국경을 넘으면, 북쪽의 경치는 단숨에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 영역은 회백색 혹은 까만색의 산맥과 녹색 식생이 부족한 척박한 토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황량함은 북방의 유일한 기조였다.
물론 이곳에도 호수와 초원이 있고 초목이 무성한 녹지와 푸른 산이 있었다. 이런 곳은 대부분 오랑캐 부락과 그 분파가 차지하여 번식했다.
청안부는 북서쪽 태천(馱天)이라고 불리는 산맥 아래에 위치했다. 전설에 따르면 태천산은 청안부 선조가 고공에서 떨어진 후 변화한 것이라고 했다.
산속에는 산물이 풍부했고 과일, 약초, 금수는 세려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청안부의 성산(聖山)이었다.
청안부의 건축 양식은 북방과 대봉의 특색이 뒤섞여 있었다. 끊이지 않는 드넓은 천막 안에 마찬가지로 끊이지 않는 드넓은 황토집, 나무집 심지어 전당이 뒤섞여 있었다.
후자는 청안부가 대봉에서 약탈해 온 노예들이 지은 것이었다.
* * *
황혼.
“후, 후…….”
천둥소리 같은 코 고는 소리가 청안부 전체에 퍼졌다. 온몸이 푸른색인 족인들은 습관이 되어 소와 양을 내쫓거나 산에 들어가 사냥하거나 음주가무를 즐기며 각자 바빴다.
코 고는 소리만으로도 수십 리 밖까지 전해질 수 있다니. 이건 무슨 괴물이란 말인가?
코 고는 소리는 청안 부락의 우두머리 길리지고(吉利知古)로부터 비롯되었다.
3품 전봉의 고수이자 북방 오랑캐의 제일 강자인 이자는 진북왕과 격전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결과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사후에 양측 척후병이 전투 지점을 찾았고, 전쟁터가 수백 리까지 이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수백 리 안은 어질러지고, 생명이 자취를 감추었더랬다.
쌍칼을 멘 청안부 오랑캐 하나가 말을 타고 빠른 속도로 천막과 집을 스치고, 산기슭으로 곧장 이어지는 큰길로 갔다.
길의 끝에는 대봉 양식이 짙게 묻어나는 궁전이 있었다.
쌍칼을 멘 오랑캐는 영패(令牌)를 꺼내고 관문을 통과하여 건물군으로 들어가 가장 화려하고 높이 솟은 궁전으로 직행했다.
“족장, 족장…….”
오랑캐는 궁전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깥 정원에 서서 오랑캐 언어로 크게 소리쳤다.
“그르렁, 후…….”
코 고는 소리가 갑자기 멈추고, 두 장(丈) 높이의 궁전 대문이 저절로 활짝 열렸다.
쌍칼을 멘 오랑캐는 발을 들어 들어갔다. 궁전 내 장식 스타일은 대범하다고 할 만했다. 열여섯 개의 굵고 단단한 돌기둥이 열 장(丈) 높이의 거대한 둥근 지붕을 떠받쳤다.
선홍색의 양탄자가 대전 깊숙한 곳에서부터 궁전 입구까지 뻗어 있었다. 양탄자 양쪽에는 사람 높이만 한 횃불이 서서 활활 타올랐다.
대전의 끝에는 거대한 돌의자가 하나 있었고, 돌의자 위에는 두 장(丈) 높이의 푸른색 거인이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의 거대한 몸뚱어리는 어떠한 털도 머리털도 없이 표면에 청색 각질 갑옷이 촘촘하게 겹겹이 덮여 있었다. 이마에는 하늘로 휘어진 뾰족한 뿔이 하나 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기운을 거두지 않았지만, 밖으로 내보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렇기에 쌍칼을 멘 오랑캐는 이미 전전긍긍하며 두 다리를 끊임없이 떨었다.
오랑캐 고수는 지금껏 용의주도하게 기운을 거두지 않았고, 그들은 자신의 강대함을 감추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궁전 내에는 길리지고 한 사람만이 있었고, 시위와 여종은 존재하지 않았다.
돌의자 옆에는 문짝보다 더 넓은 검 한 자루가 기대어져 있었다. 검의 빛깔은 어두운데 얼룩덜룩한 선홍색을 띠고 있었다. 그건 길리지고가 강자를 베고 난 뒤에 남은 선혈이었다.
돌의자 위 거인의 눈동자는 반쯤 감겨 있었다. 우레와도 같은 목소리가 궁전 안에 메아리쳤다.
“왜 나의 깊은 잠을 방해하는 것인가.”
쌍칼을 멘 오랑캐는 바닥에 엎드려 이마를 지면에 누르고, 오랑캐 언어로 공손하게 말했다.
“족장, 저희가 포로를 한 명 잡았는데 그가 말하길 진북왕이 백성을 도살하고 정혈을 정제한 장소를 안다고 합니다.”
푸른색 거인은 반쯤 감긴 두 눈을 번쩍 떴다. 위엄 있고 무서운 기운이 퍼지면서 궁전 내의 구석구석을 뒤덮었다.
* * *
변방에서 멀지 않은 거리의 북산군(北山郡), 성밖 관도 위에 마차 대열이 천천히 다가왔다.
앞장선 자는 경갑(經甲)을 입고, 머리를 높이 올려 묶고, 은색 창을 든 여인이었다.
그녀는 그림과도 같은 미모를 지녔지만, 보통 여인과 같은 부드러움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두 눈이 맑고 깨끗하며 이목구비가 선명하여, 예쁘다는 말로 그녀를 형용하는 것보다는 멋지다고 말하는 편이 나았다.
이 시대에 이렇게 멋지고 늠름한 자태의 여인은 극히 드물었다.
백마와 은색 창의 이묘진은 예전에 하던 일을 다시 시작했다.
비연 여협객이 다시 강호에 나타났다.
마차 행렬은 전부 패도와 창을 든 강호 인사였다. 그들은 비연 여협객의 명성을 들은 뒤 자발적으로 조직하고 따르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오랑캐 유격병을 사냥하러 외출하는 건 이번이 세 번째였다. 세상에서 으뜸가는 비연 여협객의 공로에 덕을 입어 그들은 이번에도 큰 성과를 거두고 돌아왔다. 오랑캐 유격병을 120명 죽이고, 50필의 군마를 포로로 잡았다. 68개의 곡도와 오랑캐 기마병이 약탈한 여인과 식량을 되찾아왔다.
양측이 교전 중에 본 손해는 군마, 곡도 그리고 여인과 식량 전반에 걸쳐 모두 그 정도가 달랐다.
성을 지키는 병사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조망했다가 백마 위의 자태가 늠름하고 이목구비가 정교한 비연 여협객을 보았다. 그는 갑자기 존경하는 기색을 보이며 성벽 위의 수비를 부르면서 손에는 긴 창을 든 채 그녀를 맞이했다.
“협객께서 돌아오셨습니까? 아이고, 이번에 또 이렇게 많은 오랑캐를 죽이셨군요. 얼른, 협객 대인을 관아로 호송하여 상을 받으십시오!”
성을 지키는 병사들은 놀라움과 기쁨을 금치 못했다. 그들인 비연 여협객이 강호 호걸의 모범이고 추종할 가치가 있는 거물이라는 생각만 했다.
양옆 병사들이 앞에서 길을 안내하며 이묘진 일행을 성안으로 호송했다. 성안의 백성들은 백마 위의 비연 여협객을 보고, 운송되어 오는 오랑캐 시체를 보자 길 양쪽에 늘어서서 열렬하게 환영했다.
그들은 ‘비연 여협객’의 이름을 높이 외쳤다.
이묘진 뒤에 있는 강호 인사들은 가슴을 꼿꼿하게 펴고 영광으로 생각했다.
대략 열흘 전, 비연 여협객이 갑자기 북산군에 왔다. 그녀는 하늘을 대신하여 정의를 행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식량 가격을 올리는 악덕 상인을 엄벌에 처했다. 그리고 약탈해간 군량과 마초 수백 섬을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는 빈민, 거지에게 나누어 주었다.
악덕 상인 배후에는 뒷받침해 주는 관리 사회의 우두머리가 있었다. 물론 이대로 손을 놓지 않고 군대를 파견해 체포하려 했다. 하지만 비연 여협객이 차례대로 물리쳤다.
그리고 나중의 일은 시정 백성들은 몰랐다. 그저 그 사건 후, 비연 여협객은 산군에서 강호 인사를 끌어들여 오랑캐 유격병을 전문적으로 사냥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관아를 찾아가 상을 받고, 상금을 식량으로 바꾸어 성밖에 죽 천막을 세워 밥을 먹지 못하는 유랑민과 거지에게 은덕을 베풀었다.
한순간, 비연 여협객의 선행이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지고 흥미진진하게 거론되었다.
심지어 다른 군현의 유민이 맨발로 수십 리를 걸어와 산을 넘고 고개를 넘어 북산군에 이르러 죽 받기만을 기다리기도 했다.
* * *
시주를 마친 후, 이묘진은 잠시 머무는 객잔으로 돌아와 소소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하여 몸에 묻은 피비린내를 씻어냈다.
그녀는 탁자 옆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침음했다.
그날 전서를 마치고 이묘진은 허칠안의 의견에 따라 그럴싸하게 출장하여 곳곳에서 의로운 일을 행했다. 지금 북경에서는 제법 명성을 얻은 셈이었다.
‘데뷔’하는 시간에 한계가 있었기에 애당초 운주 전체에 명성이 널리 퍼졌던 것처럼 이룰 수는 없었다.
꼬박 열흘이 지나자 그녀를 찾아오는 강호 인사들이 셀 수 없이 많아졌다. 어떤 이는 명성을 위해, 어떤 이는 이익을 위해, 어떤 이는 순수하게 오랑캐에 반격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녀를 찾았다.
이묘진은 천종의 심법(心法)을 이용해 간단하게 이들을 분리했다. 마음 씀씀이가 바르지 못한 자들은 제거했다. 남은 자들은 대부분이 명성과 이익과 백성을 위하는 강호 협객이었다.
그녀가 보기에는 선행하기를 원하기만 한다면, 명성을 위하든 이익을 위하든 다 괜찮았다.
하지만 이묘진이 진정으로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았다.
“주인님, 그 자식은 새로운 진전이 없나요? 그는 사건 해결의 신 아닌가요? 방법이 없어진 건 아닐 거예요.”
소소는 차를 받치고 탁자 위에 두었다.
소소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신경을 많이 쓰는 주인을 보자 좀 마음이 아팠다.
“이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이묘진은 지서 소환을 통해 이미 허칠안으로부터 ‘혈도 삼천리’ 사건의 진상을 들었다.
“요 며칠 나는 줄곧 생각하고 있다. 만약 초주에서 정말 혈도 삼천리라는 큰일이 발생했다면, 관아가 숨기려고 해도 강호 인사와 시정 백성의 입을 막을 수는 없을 거야.”
이묘진은 양눈썹을 잔뜩 찡그렸다.
“하지만 아무리 알아봐도 아는 사람이 없다니.”
소소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경국지색의 더없이 아름다운 얼굴에 좀처럼 하지 않는 사색을 드러내더니 갑자기 예쁜 눈을 반짝이고는 기뻐하며 말했다.
“저 생각났어요, 저 생각났어요.”
이묘진은 의심하는 태도를 고수했다.
“네가 또 뭘 알았는데?”
소소는 쪽파같이 고운 손으로 머리카락을 비틀고, 매력적으로 눈을 깜박이더니 해죽이 웃었다.
“생각해 보세요. 만약 정말 혈도 삼천리라는 큰일이 발생했는데 아는 사람이 없다면, 당사자들의 기억이 지워진 게 아닐까요? 마치 제가 그 당시 부친이 왜 죄를 얻고 참수형을 당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요.”
이묘진은 이 말을 듣더니 코웃음을 쳤다.
“이런 대규모 살육은 설령 기억을 지운다고 해도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야. 오랑캐 첩자가 찾지 못하겠니? 너는 정말이지…….”
그녀는 갑자기 멍해졌다. 그렇게 눈빛이 조금씩 풀어지더니 사람 전체가 멍해졌다.
소소가 황급히 물었다.
“주인님, 뭐가 생각나신 거예요?”
이묘진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하지만 네 생각이 꼭 단서라는 법은 없어. 만약 정말 이렇게 큰일이 발생했는데 모든 사람의 눈을 숨길 수 있다라……. 어느 체계의 몇 품 강자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지?”
우선 그녀는 무사를 배제했다. 이건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이어 그녀의 머릿속에 두 글자가 떠올랐다. 술사!
허칠안이 일찍이 말한 적 있었다. 고품 술사는 천기를 차단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들을 차단하여 자신을 투명인간으로 만든다고……. 이묘진은 머리에 전기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