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7화. 진범 (2)
“너희 청안부만 이 일을 아는 건가?”
허칠안이 다시 질문했다.
“그렇다.”
오랑캐가 대답했다.
‘이거 이상한데……. 청안부의 우두머리는 또 이 일을 어떻게 알지?’
허칠안은 잠시 침음하더니 말했다.
“그대들은 부락에서 술사를 본 적 있는가?”
“본 적 있다.”
오랑캐가 멍하니 대답했다.
‘음, 그렇다면 청안부는 혈도 삼천리의 모든 내막을 알고 있고, 이건 전부 신비로운 술사 일당이 그들에게 알려준 것이다.
이로써 두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하나, 신비로운 술사 일당이 청안부의 우두머리를 돕고 있으며, 진북왕의 복을 빼앗아 2품으로 승직하는 일을 지지하는 상태라는 것.
둘, 신비로운 술사 일당이 대봉의 기운을 빼앗고, 오랑캐 우두머리를 도와 조당에 침투하여 대봉 국력을 잠식하려 한다는 것. 불 보듯 뻔하다.’
허칠안은 계속해서 질문하지 않고 나지막이 말했다.
“웅크리고 앉아 눈을 가리십시오.”
왕비는 능숙한 협조로 즉시 웅크리고 앉아 눈을 가렸다.
허칠안은 지서 파편을 꺼내 검은 장포의 밀정과 오랑캐 셋의 시체를 옥석경에 거두어들인 뒤 음낭을 열어 그들의 영혼을 거두었다.
“가시죠!”
그는 왕비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녀를 등진 채로 말했다.
“올라타세요.”
이번에 왕비는 망설이지 않고 두 손을 벌려 허칠안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이 순간 자신이 이 남자와의 어느 정도의 스킨십을 더 이상 거부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정말 이상했다.
왕비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음풍이 한차례 불어오더니 진실하지 않은 혼체(魂體)들이 몽환적인 물거품처럼 바람에 찢겨 흩어졌다.
그녀는 갑자기 가슴을 쿡쿡 쑤시는 슬픔이 밀려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진북왕이라는 칭호가 어울리지 않아.”
“입 다물고 저를 꽉 껴안으세요.”
“응.”
그녀는 팔을 바짝 죄어 얌전하게 허칠안에게 엎드렸다.
쿵! 지면이 흔들리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허칠안은 예리한 화살처럼 솟구쳐 황야 사이로 사라졌다.
* * *
정오, 삼황현에서 백 리 밖, 서쪽 방향.
왕비는 개울가에 앉아 그다지 숙녀 같지 않게 닭다리 하나를 물어뜯고 있었다. 그녀는 먹으면서 멍하니 넋을 놓은 허칠안을 바라보았다. 여태까지 도도했던 그녀가 보기 드문 온유한 말투로 물었다.
“자네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인가?”
허칠안은 그녀를 보면서 웃더니 모닥불을 쑤시면서 말했다.
“사실 제가 마마를 데리고 북상하는 건 마마를 이용하여 진북왕을 협박하고 싶어서입니다. 그가 큰 손해를 볼까 봐 나쁜 짓을 못 하게 하려는 거지요. 초심은 나빴습니다.”
그녀는 입을 오므리고 섭섭해했다.
“알고 있네.”
그녀도 바보는 아니었다. 이 남자가 사건을 조사하러 북상하는데 자신을 곁에 데리고 다니면서 바라는 게 뭔지 머리를 좀 굴리면 짐작할 수 있었다.
허칠안은 의아해했다.
“엇? 화나지 않아요? 마마의 평소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데요.”
왕비는 고개를 저으며 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예쁘게 생겼네. 9살 되던 해에 부모님을 따라 옥불사(玉佛寺)에 가서 향을 피웠는데 사찰 주지 스님이 나를 보더니 시를 지으셨어. 음, 자네도 아마 그 시를 알 거야. 그때부터 이름을 날리게 되었고, 부모님은 내가 사리에 밝고 거문고·바둑·서예·서화에 정통한 규수가 되길 바라 점점 더 열심히 나를 키우셨어.
13살 때는 지나치게 아름다워 가족들이 감당해야 할 부담이 점점 더 커졌네. 직접 찾아와 혼사를 청하는 고관대작을 상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어떠한 혈연관계가 없는 족인들조차 나를 보는 눈빛이 이상했지. 부모님과 어르신들이 나를 잘 보호한 건 그들이 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진귀한 상품에 어떠한 흠집도 없길 바라서였지.
마침내 그해 황제께서 사람을 집으로 파견하여 내게 입궁하라고 하셨네. 부모님과 어르신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눈시울을 붉히더군. 그래, 그들이 고생해서 가꾼 상품이 드디어 가장 비싼 가격에 팔린 거니깐.”
“나는 입궁한 뒤에 황제를 딱 한 번 뵈었고, 그 후로는 푸대접을 받았네. 나중에 알게 되었지. 그때 황제께서는 이미 도를 닦기 시작하여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걸. 나한테는 좋은 일이었어. 황궁 안에서 잘 먹고 잘살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리며 더러운 남자들에게 비위를 맞추느라 억울해할 필요도 없었지.
산해관전역 후, 나는 또 회왕에게 보내져 그의 정비(正妃)가 되었어. 회왕부에서 산 지 어느덧 스무 해가 지났군. 그들 형제 둘이 뭘 노리는지 나는 훤히 알고 있다고. 하지만 내가 무슨 방법이 있겠나. 나는 그저 연약한 여인일 뿐인데.
시위가 지키고 여종이 감시하는 건 고사하고, 그들은 심지어 아무런 구속 없이 내가 뛰쳐나가도록 내버려 두더군.
내가 회왕부에서 외성 문으로 달려가다가는 목숨이 반은 없어질 게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상품이었기에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바쳐졌네. 어느 날 가치가 없어지면 낡은 신발처럼 버려질 거야.”
모닥불 옆, 그녀는 무릎을 감싸 안은 채 유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굴에는 희비가 드러나지 않았다.
“그래서 자네가 나를 흥정거리로 삼고, 상품으로 삼아도 탓하지 않을 거야. 그 형제 둘이 비하면 자네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 그건 너무 비참하잖아…….’
허칠안의 마음속에 연민의 정이 솟구쳤다. 이는 아름다운 미모와 관계없었다. 이 연민의 정은 종리에게 품는 것과 같았다.
완전히 동정에서 비롯된 감정이었다.
그는 왕비를 보면서 질문했다.
“정말 탓하지 않습니까?”
왕비는 이번에는 아주 성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탓할 걸세. 방금 자네가 나를 팔아넘기려는 줄 알고, 화가 나 죽을 뻔했어.”
허칠안은 웃었다.
“여인은 꼭 이렇다니까요. 말과 마음이 달라요.”
그녀도 웃더니 계속해서 물었다.
“자네는 진북왕의 일을 어떻게 처리할 작정인가? 이 일은 그의 짓이고, 그렇다면 군정을 허위 보고한 것보다 그 성질이 훨씬 더 엄중하네. 자네가 기어이 그와 맞서겠다면 결과가 좋지 않을 수도 있어.”
산바람이 스치자 모닥불이 흔들렸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 한참이 흐른 뒤 허칠안이 천천히 말했다.
“혈도 삼천리가 벌어진 장소를 찾아 그를 저지하고 벌할 것입니다. 만약 가능하다면 그를 죽일 거고요.”
왕비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 * *
삼황현, 아음루.
똑똑…….
부드러운 평상 위에 몸을 기대고 심심풀이로 읽는 책을 보던 채아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뒤이어 기생 어머니의 웃는 소리가 들렸다.
“채아, 조 나리께서 오셨으니 잘 접대하렴.”
채아는 책을 거두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응했다.
“알겠습니다, 어머니.”
부잣집 노인 차림의 중년이 방문을 밀고 들어왔다. 그는 얼굴에 음란한 웃음을 띠었다.
그는 문턱을 넘은 뒤 몸을 돌려 문을 닫았다. 그는 돌아섰을 때에는 얼굴의 웃음을 거둔 뒤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을 한 채였다.
중년 남자가 채아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서구군의 정보를 그에게 알려 주었는가?”
채아가 예를 갖추고 공손하게 말했다.
“네, 그는 의심하지 않더군요.”
중년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탁자에 앉았다. 그는 차를 한 잔 따르더니 여유롭게 말했다.
“허나 그의 기민함으로는 사후에 틀림없이 이상함을 깨달을 것이야. 하지만 그때 일은 이미 끝이 나겠지.”
채아는 말을 하지 않았다.
중년 남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요 며칠 나는 북상해야 하네. 자네도 한동안은 삼황현을 떠나있게. 만약 내가 도중에 죽으면 자네도 다시는 돌아와서는 안 돼.”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청의시종.”
채아는 고개를 숙였다.
“백사무해.”
* * *
왕비는 점심 식사를 마친 뒤 냇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이마를 비스듬히 한 채 꼼꼼하게 머리를 빗었다.
그녀의 몸매가 물속에 흐릿하게 보였다. 하지만 흐릿하기에 오히려 어렴풋한 아름다움이 엿보였다. 왕비만이 지닌 아름다움이었다.
그녀는 촉촉한 눈망울을 움직여 시냇물 건너편 나무 그늘에 가부좌를 틀고 좌선하는 허칠안을 힐끗 보았다. 그녀의 마음속에 불가사의한 감정이 솟구쳤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그와 여러 해 동안 알고 지낸 옛 친구 같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녀가 처음에는 그를 싫어했다는 점이었다. 그는 향낭을 줍고도 돌려주지 않았고, 돈주머니를 줍고도 돌려주지 않더니 그녀의 발등까지 찍었더랬다…….
왕비는 방금 걱정거리를 털어내고 나니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그녀는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아주 오래전에 이미 단념했기 때문이다.
단념하지 않고선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벌레를 보면 비명을 지르고, 침상 휘장이 흔들리는 걸 보면 이불 속으로 움츠러드는 겁 많은 여인인데 한 나라의 군주 및 친왕과 정말 겨룰 수 있겠는가?
현재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앞으로 어떤 운명을 맞이할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겠으나 회왕부에 있는 것보다 더 안정감이 들었다.
“에휴, 나는 정말 화의 근원이야.”
왕비는 개탄했다.
예쁜 여자들은 전부 교만하다. 하물며 대봉 제일의 미인이지 않은가.
허칠안은 나무 그늘에 좌선하고 관상하면서 속으로는 신수 승려와 소통했다. 4품 고수 넷의 정혈을 빼앗은 뒤 신수 승려의 wifi가 훨씬 안정되어 그는 몇 번 소리치기만 해도 연결할 수 있었다.
“대사님, 진북왕의 계책을 이미 아시겠지요.”
허칠안은 쓸데없는 말 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나는 계속 바깥 세계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네. 사실 나는 여태껏 자발적으로 바깥 세계의 일에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어.”
신수 승려가 몇 초 침묵하더니 말했다.
‘엥? 이 대답에서는 전혀 고수의 패기가 엿보이지 않는데…….’
허칠안은 혈도 삼천리 정보를 신수에게 알리고 떠보며 말했다.
“대사님, 진북왕이 3품 대원만에 충격을 가하는 정혈에 관심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의문이 있는데 진북왕이 왕비의 영온을 필요로 하면서 또 혈도 삼천리를 벌였다는 건 그가 필요한 정혈과 왕비의 영온을 합쳐야 비로소 승직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허칠안은 감히 도박을 걸었다. 신수 승려는 틀림없이 관심을 보이며 정혈 자양제가 스쳐 지나가도록 방임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가 감히 벌하겠다고 큰소리치며 나아가 진북왕을 죽이겠다는 배짱을 내보인 셈이었다.
그에게 돌아온 대답은 침묵이었다…….
“대사님, 대사님?”
허칠안은 마음속으로 수차례 소리쳤고, 그때서야 신수 승려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방금 생각을 좀 하고 있었네.”
‘나는 또 신호가 끊긴 줄 알았다고…….’
허칠안은 여세를 몰아 물었다.
“무슨 일인지요?”
신수는 대답하지 않고, 당당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왜 무사 체계가 걷기 어려운 줄 아는가? 각 체계와 다르게 무사는 이기적인 체계네. 모든 걸 빼앗아 자신의 힘을 강화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고, 신체와 영혼, 원신을 만드는 데 전념할 수 있지. 대봉의 진북왕이 백성을 대량 학살하여 생명의 정화를 빼앗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네. 그저…….”
‘이건 신수 승려가 정혈을 삼켜 자신을 보완하는 행동과 들어맞는군…….’
허칠안이 캐물었다.
“그저 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