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화. 삼황현 (2)
“북경 사람들은 손님 접대를 참 좋아하는군…….”
왕비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들 집을 보게. 너무 가난하여 아무것도 없잖나. 짐작건대 그들은 끼니마다 죽을 먹을걸. 흰 쌀밥은 돈 없어서 먹지 못할 거야.”
‘경성에 오래 머물다 보니 하마터면 민생의 고통이 뭔지 잊을 뻔했네…….’
허칠안은 속으로 개탄하며 입으로 말했다.
“아주 정상적인 일 아닌가요? 마마는 그들이 끼니마다 생선과 고기를 먹길 바라세요?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 훌륭하죠.”
왕비는 입을 오므리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자네 은자를 가지고 있나?”
‘당연히 있지. 내 전 재산이 지서 파편 속에 있는데…….’
허칠안은 그녀의 말뜻을 이해했다.
“제게 은자를 빌리고 싶으신 거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요?”
허칠안이 물었다.
왕비는 좀 침음하더니 말했다.
“백 냥으로 하겠네. 너무 많이 주어도 안 돼. 우리의 신분이 탄로 날 거야.”
“…….”
허칠안은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얼마요?”
“너, 너무 많이 주는 건가? 그, 그럼 오십 냥.”
그녀는 예쁘고 큰 눈을 깜박였다.
‘재산 탕진하는 여편네 같으니라고…….’
허칠안은 속으로 그녀에게 욕을 하고 나지막이 말했다.
“은자 한 전(錢)이요.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은혜를 입었는데 갑절로 갚아야 하는 거 아니야?’
왕비는 의아해하며 그를 쳐다보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에게 갚을 테니 그렇게 인색하게 굴지 말게.”
허칠안은 탄식했다.
“저희의 이렇게 궁상맞은 모습으로는 은자 한 전(錢)도 이미 많습니다. 더 많이 주는 건 무리입니다. 진북왕의 사람이나 북방의 첩자가 이곳을 찾아내어 되는대로 묻기만 해도 저희는 들통날 겁니다.”
그리고 은자 한 전(錢)은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이 가난한 집이 며칠 동안 고기 반찬을 먹기에 충분했다.
왕비는 고개를 끄덕였고, 허칠안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허칠안의 주도면밀한 점을 매우 인정하는 바였다.
뒤이어 그녀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삼황현에 도착하면 나는 목욕할 걸세. 나도 내 몸에서 나는 시큼한 냄새를 더는 못 참겠어.”
허칠안은 그녀를 상대하지 않고 정원에 있는 의자에 앉아 쪽빛 하늘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밥을 먹으니 요거트를 먹고 싶군.”
* * *
그는 조르륵조르륵 죽을 다 먹고 집주인 남자를 불러 말했다.
“고맙소. 내가…… 친척을 보러 성에 들어가느라 딱히 가지고 있는 게 없소만…….”
허칠안은 부스러기 은전 한 알을 더듬어 꺼내더니 남자에게 건넸다.
“작은 성의오.”
“이, 이건…….”
남자는 놀라서 넋이 나갔다. 그는 동전을 본 적은 있지만, 은자를 본 일은 극히 드물었다.
두 사람은 한바탕 엎치락뒤치락했다. 왕비는 옆에 서서 허칠안이 진지하게 남자와 도리를 논하는 걸 보면서 속으로 까닭 모를 기쁨에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인간미가 있는 남자였다. 여색을 좀 밝히기는 하지만, 속에 속셈만 가득하고, 잔인하게 살육을 일삼는 거물들보다 훨씬 나았다.
두 사람이 떠난 후 남자는 두 손에 부스러기 은전을 받치고, 흥분한 얼굴로 안채에 돌아와 보물을 과시하는 듯 가족들에게 보여주었다.
“그, 그들이 은자를 주고 갔어.”
남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
노인은 떨리는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일 아버지더러 네게 고기를 사주라고 하마.”
이 가난한 집안의 구성원들의 얼굴에 진심으로 감격한 기쁨이 서렸다.
* * *
“자네 방금 어째서 내 신분을 소개하지 않았나.”
왕비는 관도를 걸어가면서 씩씩거렸다.
“뭐라고요?”
허칠안은 아직 반응이 오지 않았다.
왕비가 쿵쿵쿵 쫓아와 눈을 부릅떴다.
“친척을 보러 성에 들어간다면서 나를 빼먹었잖아. 흥!”
허칠안은 생각났다. 확실히 그런 일이 있었으나 그는 반문했다.
“그럼 제가 마마를 어떻게 소개해야 적합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안사람이라고 말하기엔 마마의 모습이 지금의 준수한 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누이라고 말하기엔 지나치게 억지스럽지요. 딱 봐도 친남매가 아니잖아요. 여종이라고 말하기에는 저희의 궁상맞은 모습에 적합하지 않아요.”
“그럼 나를 자네 고모라고 말하면 되잖아.”
왕비는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꺼지세요! 왜 증조모라고 하지는 않으시나요?”
허칠안은 불쾌해하며 말했다.
* * *
황혼 전, 그들은 상황현에 도착했다. 하지만 바로 성에 들어가지 않고 성 밖 차양막 안에서 냉차를 한 잔 마셨다. 삼황현에 도착했으니 진짜 북경에 이른 셈이었다.
삼황현에 도착했고, 허칠안은 야경꾼 첩자를 만나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삼황현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 성안 인구는 십만이 채 되지 않았다. 성에 들어갈 때 두 사람은 관에서 허가한 통행증을 내보이라는 요구를 받았다.
왕비는 순간 긴장하여 옆에서 졸아붙어 있었다. 그녀는 본인에게 통행증이 없어 조사를 넘어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어떡하지, 이번에 성에 들어가지 못하겠는데…….’
그녀는 순간 가슴이 조여왔다. 이는 그녀가 장거리 여정을 계속해야 한다는 의미였고, 허칠안이 사건을 조사하지 못한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녀는 한순간에 앞길이 까마득해졌다.
“있소, 있소.”
허칠안은 활짝 웃으며 관아 증서를 꺼내 공손히 건넸다.
성을 지키는 병사가 증서를 훑어보더니 허칠안에게 돌려주었다.
“들어가게.”
* * *
왕비는 고개를 숙인 채 종종걸음으로 허칠안 곁을 따라갔다. 성문이 점점 멀어지자 그녀는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 통행증이 어디서 난 겐가.”
“마마께서 주무실 때 나가서 훔쳤습니다. 길을 막아서고 행인을 약탈하여 돌아왔지요.”
허칠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정말 대단하다…….’
왕비는 눈썹을 구부렸고, 허칠안이 탄식하는 소리를 들었다.
“상황이 낙관적이진 않습니다. 마마 바깥분께서 저 혼자 북상한 걸 알았습니다.”
“?”
왕비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스쳤다. 거짓말이겠지. 그들은 북상하는 내내 남몰래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는데 회왕의 사람이 허칠안이 북상한 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게다가 허칠안은 어떻게 알았지?
그녀는 똑똑한 사람이었지만 이건 도무지 추측해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저와 왕비마마가 함께 있는지는 몰라서 다행입니다.”
허칠안이 또 말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왕비는 입을 오므렸고, 옆으로 고개를 돌린 채 아름다운 눈동자로 뚫어지게 바라보며 겸손하게 가르침을 청했다.
그녀는 허칠안이 해주는 사건 해결 이야기를 듣는 걸 아주 좋아했다. 흥미진진하고 재미난 대목을 들을 때면 탁자를 치며 훌륭하다고 외쳤다. 물론, 왕비는 이런 취미를 여태껏 허칠안에게 알린 적이 없었다.
“방금 차를 마실 때 관찰해보니 성을 지키는 병사가 홀로 다니는 성인 남자에게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더군요. 통행증을 검사할 뿐만 아니라 얼굴도 만졌습니다.”
허칠안이 말했다.
“얼굴을 만지다니?”
왕비는 어리둥절하다가 비로소 반응을 보였고 살살 목소리를 낮추었다.
“역용했는지 검사하는 건가?”
‘멍청한 편은 아니네…….’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마마를 찾는 게 아닙니다. 오랑캐에게 납치당한 자가 절대로 혼자 행동할 리가 없으니까요.”
‘어쩐지 갑자기 차양막 안에서 차를 마시면서 잠시 쉬자고 제안하더라니…….’
왕비는 문득 모든 걸 깨달았다.
게다가 삼황현 같은 지역은 강주와 인접해 있으므로 통상적으로 말하자면 오랑캐의 목표가 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엄격하게 심문하는 일 자체가 합리적이지 않다.
“게다가 이 일을 통해서 혈도 삼천리는 결코 빈말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선 이렇게 신중하게 대할 리가 없지요.”
허칠안이 냉소를 지었다.
속에 꿍꿍이가 없다면, 전설 속의 사건 해결 고수이자 범죄 사건에 신과 같은 위력을 떨치는 허 은라를 이렇게 꺼릴 리가 없었다.
* * *
두 사람은 성에서 객잔을 찾아 고급 방을 달라고 했다. 문을 닫자마자 밖에서 고분고분하게 순종하던 왕비가 이성을 잃고 화를 냈다.
“자네 화본에 쓴 그 호색가들처럼 나에게 못된 짓을 하고 싶은 건가? 일부러 방을 하나만 잡다니.”
‘네가 본 화본 이름이 뭐니? 한 부 빌려주고 얘기해…….’
허칠안이 그녀를 비웃었다.
“마마께서 팔가락지를 벗겠다면, 본관이 기꺼이 왕비마마와 함께 춘야(春夜)를 보내드리지요. 허나 마마 지금의 모습은…….”
그는 창가의 화장대를 가리키더니 놀렸다.
“우선 거울을 좀 보세요.”
왕비는 화가 나 이를 부득부득 갈며 그를 힘껏 쏘아보더니 냉소를 지으며 허칠안을 비난했다.
“좋네. 그럼 오늘 밤 자네는 바닥에서 자고 나는 침상에서 자지. 나를 건드린다면 자네는 짐승이야. 됐네. 나 목욕할 것이니 나가주게.”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있다 보니 그녀는 사실 예전처럼 허칠안을 방비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그가 자신을 건드리지 않을 확률이 크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억센 성격, 그리고 관성적으로 그와 다투던 습관이 남아 있었기에 허칠안 이 자식과 사이좋게 지내기가 어려웠다.
“오늘 밤에 저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 일찍 주무시지요.”
허칠안은 손을 내젓더니 돌아서서 입구로 걸어갔다.
“어디 가려고?”
왕비는 낯빛이 좀 변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 자식은 확실히 그녀에게 오랜 시간 안정감을 주었다. 그가 갑자기 떠난다고 하니 그녀는 좀 적응이 안 되고, 자신이 없었다.
“삼황현에 왔으니 삼황계(三黃鷄)가 있는지 좀 찾아보고 싶어서요.”
허칠안이 대답했다.
왕비는 듣더니 갑자기 싱글벙글했다.
“나도 가겠네. 나도 먹고 싶어.”
돌연 허칠안이 불쾌해했다.
“저는 기생집에 갈 거예요!”
“……나 참.”
침상에 앉은 왕비는 삐쳐서 몸을 옆으로 돌린 채 고개를 돌려 그에게 뒤통수를 보였다.
* * *
객잔 맞은편 길거리 뒷골목, 허칠안은 객잔을 응시하며 반 시진을 감시했다. 의심스러운 인물의 추적도, 몰래 빠져나가는 왕비도 보지 못했다.
“도망가지 않는다고? 이 왕비 머리에 문제 있나?”
허칠안은 이 결과가 매우 의외였다. 그가 보기에 지금은 한 번 올까 말까 하는 도망칠 기회였다.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왕비는 드넓은 바다에서 뛰어놀고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 있었다.
그녀는 왕비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더는 ‘약재’가 될까 봐 걱정하고 두려워할 필요 없었다.
‘그녀는 왕비라는 신분이 가져다주는 부귀영화를 버리고 싶지 않은 건가? 악, 요 며칠간 함께 지내다 보니 그녀는 사실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아이에 더 가깝던 것 같았어. 도도하고 제멋대로고. 뭐, 부귀영화가 목숨만큼 중요할 수 있나? 그녀가 평소에 회왕을 언급하는 어조를 보면, 명목상 부군한테 감정이 없던데……. 음, 때로는 밤에 멍하니 있으면서 소극적이고 비관적인 태도를 보이곤 했지……. 반항할 수 없는 운명에 절망했나? 정말 비참한 여인이군.’
허칠안은 밤 경치에 길을 나서 성안을 한참 동안 돌고 돌다가 결국에는 ‘아음루(雅音樓)’라는 이름의 기루 입구에서 멈췄다.
예전에 말했듯이 기루의 끝 글자를 통해 그 규모를 판단할 수 있었다. 1, 2등급의 기루는 ‘원(院), 관(館), 각(閣)’ 위주였다.
3등급 기루는 ‘루(樓), 반(班), 점(店)’을 이름으로 한 곳이 많았다.
‘아음루’는 중하급의 기루지만 삼황현 같은 작은 현(縣)에서는 아마 가장 큰 규모의 기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