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9화. 이묘진의 전서
밀정은 역참을 나섰다. 그녀는 이 참장을 따라 성을 나가지 않고, 홀로 원주소(*지방 군영)에 갔다. 그녀는 어느 천막 안에서 쉬다가 밤이 됐을 때 갑자기 눈을 떠서는, 천막을 젖히고 들어오는 누군가를 보았다.
안으로 들어온 사람 역시 검은 장포를 두르고 아래턱만 보이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담청색의 짧은 턱수염이 그의 입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가 쉰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막 강주성에서 돌아와 두 지점을 찾았는데 한 곳은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었고, 다른 한 곳은 뚜렷한 전투 흔적이 없지만 금목부 우주가 남긴 거미줄이 있었네……. 자네 쪽은?”
밀정 역시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사절단을 통해 알아낸 정보와 일치하네. 북방 요족과 오랑캐가 4품 네 명을 파견했어. 각각 사요 홍릉, 교부 탕산군 그리고 흑수부 찰이목하인데 금목수 우두머리 천랑은 없었네. 허칠안과 양연이 4품 셋과 뒤엉켜 있는 사이를 틈타 저상룡이 시위에게 왕비마마와 여종을 데리고 같이 철수하라고 시켰네. 또한, 사절단 사람들은 왕비의 특수함을 모르고 양연은 왕비의 행방을 모르네.”
남자 밀정이 ‘음’하고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이렇게 보니 천랑에게 어리석게 당했군. 저상룡은 십중팔구 절망적이겠어. 왕비마마는…….”
천막 안의 분위기가 엄숙해졌다.
“잠깐, 방금 저상룡이 시위에게 여종과 왕비마마를 데리고 함께 도망가라고 시켰다고 했나?”
남자 밀정이 갑자기 물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왕비마마와 도망쳤고, 시위는 여종과 도망쳤네.”
밀정이 말했다.
“허, 그는 우유부단하고 모질지 못한 자가 결코 아닌데.”
남자 밀정은 비웃는 듯 조롱하는 듯 한 마디 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일이 명확하군. 그가 데리고 간 왕비는 가짜고, 진짜 왕비는 여종 사이에 섞여 있었겠지. 현명하면서도 미련한 방법이야. 그가 시선을 헷갈리게 한 건 현명하지만, 미련한 건 그의 이런 행동으로 어찌 천랑 무리를 속일 수 있단 말인가. 위기의 순간에 여종들을 데리고 도망쳤다면 진짜 왕비가 여종들 틈에 있다는 걸 그들에게 알린 셈이네. 음, 그가 사절단을 극도로 불신하거나 아니면 그 당시 틀림없이 대오가 전멸할 거라고 판단한 게지.”
밀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서서 탕산군과 찰이목하를 저지한 자가 허칠안이더군. 그의 진정한 수련 경지는 아마도 6품일 텐데…….”
그녀는 허칠안의 최근 행적에 관해 얘기하더니 말했다.
“형부 총포두가 한 말에 따르면, 허칠안이 천인 양종의 걸출한 제자를 패배시킬 수 있었던 건 유가의 법술 서적에 기댔기 때문이라더군. 저상룡은 아마 그에게 남은 게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을 거야.”
쉰 목소리의 남자 밀정이 말했다.
“그뿐만이 아니네. 외부 물건은 언젠가 다 써 버릴 때가 있는 법. 게다가 4품 무사는 죽이기 쉽지 않지. 결과적으로는 허칠안의 수단과 양식이 다 떨어졌으니 저상룡이 그들을 버리는 걸 택한 것이야.”
“합리적이네.”
밀정은 탄식하더니 걱정하며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좋은가. 왕비가 북방 오랑캐 손에 들어갔다면 욕볼 텐데.”
남자 밀정이 가볍게 웃었다.
“그렇게 재수없는 상황은 아니네. 우두머리 네 명이 출동하였고, 그들이 연합하여 왕비를 매복 공격했다는 건 오랑캐들도 틀림없이 왕비의 특수한 점을 알고 있다는 거네. 그렇다면 왕비를 가장 얻고 싶은 자가 누구겠나?”
밀정이 문득 깨달은 듯 말했다.
“청안부의 우두머리겠군.”
남자는 마치 고개를 끄덕이는 듯 모자에 감춰둔 머리를 흔들더니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왕비를 데리고 북방으로 돌아가서 영온을 균등하게 나누거나 큰 이점을 승낙받았을 걸세. 어쨌든 청안부의 우두머리가 참여하기 전까지 왕비는 안전해.”
밀정은 그의 의견에 동의했고, 상대를 떠보았다.
“그럼 지금 북방 국경을 봉쇄하고, 강주와 초주 구역에서 전력이 탕산군 4인을 수색 및 체포하고, 왕비마마를 되찾아오면 된다고 회왕 전하께 통지하기만 하면 되는 건가?”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고, 반대하지도 않았다.
“뭐 덧붙일 게 더 있는가?”
“있네! 수석 수사관 허칠안이 경성에 돌아가지 않고 비밀리에 북상하고 있네. 어디로 가는지는 양연이 모른다고 주장했으나 내 생각에 그들에게 틀림없이 특수한 연락 방식이 있는 것 같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남자 밀정이 반문했다.
“허칠안은 혈도 삼천리 사건을 조사하라는 명을 받았네. 그는 회왕 전하의 미움을 사기 두려워할 테고, 더욱이 감시당하는 걸 두려워하겠지. 그러므로 사절단을 구실로 삼아 암암리에 사건을 조사하는 게 옳은 선택이네. 사건 해결의 신이자 주도면밀한 천재이니 이렇게 대응하는 게 정상적이네. 그렇지 않은 게 오히려 불합리하지.”
밀정은 계속해서 말했다.
“게다가 사절단 내부 관계가 원만하지 않아. 삼사 관원과 야경꾼은 서로 마음에 들지 않아 하네. 사절단은 그에게 사실 쓰임새가 크지 않아. 남아봤자 오히려 삼사 관원의 견제를 받을 수도 있어.”
남자는 담청색이 묻어난 아래턱을 쓰다듬더니 손가락 끝으로 단단하고 짧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침음했다.
“이 문관들을 얕보면 안 되네. 어쩌면 연기를 하는 걸지도 모르네.”
“하지만 자네가 만약 허칠안이 오문 밖에서 문무백관을 막아서고, 시를 지어 그들을 풍자했다는 걸 안다면 이렇게 여기지 않을 걸세.”
밀정이 말했다.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덧붙여 말했다.
“위연이 왕비가 북행하는 걸 안다네. 오랑캐 일이 그와 관련된 건 아닌가?”
남자는 비웃었다.
“나에게 묻지 말게. 위연의 속마음은 우리가 꿰뚫어 볼 수 없어. 하지만 방비하지 않으면 안 되지. 음, 허칠안의 초상화를 퍼뜨리자고. 일단 발견하면 엄밀하게 감시해야 해. 사절단 쪽은 양연의 행동을 중점적으로 감시하게. 삼사 문관이라면 두고 보지.”
* * *
이튿날 새벽녘, 왕비는 허칠안의 장포를 덮고 있다가 절벽 동굴에서 깨어났다. 허칠안은 절벽 동굴 앞에 쭈그리고 앉은 채, 어디서 난지 모르는 양푼을 두 손으로 받치고는 얼굴 전체를 대야에 담그고 있었다.
왕비는 여전히 화가 난 상태였기에, 가만히 무릎을 감싸 안고 그가 지랄 떠는 걸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고 있자니 일각이 지났다.
그런 뒤 이 남자는 뒤돌아 살며시 얼굴에 비비고 문지르더니 한참 뒤에야 얼굴을 돌렸다.
“아!”
왕비는 비명을 질렀고, 깜짝 놀란 토끼처럼 뒤로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민첩한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그를 가리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자네, 자네…… 허신년?”
‘귀신을 봤나?’
그녀는 이 남자를 본 적 있었다. 바로 허칠안의 사촌 동생 허신년이었다.
‘하지만 허씨 집안 둘째가 어떻게 이곳에 나타날 수 있지?’
“별일도 아닌 걸로 호들갑 떨기는…….”
허칠안은 득의양양하게 콧방귀를 두 번 뀌더니 말했다.
“이건 제 변겁 특기입니다. 수련 경지가 아무리 높은 무사라도 제 역용을 알아차릴 수 없지요.”
그는 말을 하는 사이, 양푼 속의 약수물을 부어 버렸다.
“자네, 자네 집안 사촌 동생으로 변해 뭘 하려고?”
왕비는 익숙한 목소리를 듣자 순간 마음이 놓였고, 석연치 않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여인은 정말 머리가 안 돌아가는구나. 아마 혼자 회왕부에서 거들먹거리는 게 습관 된 거겠지. 숙모처럼 그녀와 집안싸움을 하려는 사람도 없을 테고……,’
허칠안은 언짢아하며 말했다.
“바보예요? 허칠안의 얼굴을 하고 성에 들어갈 수 있겠어요? 이건 가장 기본적인 반(反)정찰 의식이잖아요.”
‘반 뭐라고?’
왕비는 역시 알아듣지 못하고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나 배고파.”
“죽 다 끓었습니다. 밖에서 방금 잡은 산닭 한 마리가 있으니 가서 다듬고 깨끗하게 씻은 뒤 구우셔요.”
허칠안이 분부했다.
“오!”
왕비는 얌전히 나갔다.
그동안 그녀는 사냥감을 다듬고 굽는 법을 배웠다. 전체적인 과정은 당연히 허칠안이 요구한 대로였다. 왕비 역시 그에게 무시당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그의 신세를 지고 있으니 굽신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왕비도 심보가 나쁜 사람이었다. 그녀는 지금껏 정면으로 허칠안을 들이받는 대신 살그머니 복수하곤 했다.
예를 들면 그녀는 그가 목욕하는 틈을 타 그의 옷을 숨겨놓고는, 그가 물속에서 무능함에 격분하게 했다.
또 예를 들면 잎에 묻은 새똥을 사냥감에 묻히고 구운 뒤 그에게 먹이는 식이었다.
최근에 그녀는 다 구운 사냥감에 침을 묻혀야겠다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 대신 그녀가 매번 지불하는 대가도 있었다. 바로 밤에 그가 하는 귀신 이야기를 듣도록 강요당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저녁에 잠을 잘 엄두가 나지 않았고, 놀라서 하마터면 울 뻔했다. 아니면 온종일 먹을 밥이 없이 오랜 시간 산을 넘고 물을 건너야 했다.
저녁에는 자다가 입에서 침이 흘러내렸다.
한참 뒤에 닭이 다 구워졌다. 왕비는 꽤 오랫동안 침을 뱉은 다음 음흉하게 웃더니 구워진 닭을 옆에 두고는 돌아서서 절벽 동굴을 향해 소리쳤다.
“닭 다 구웠네. 나는 죽을 먹을게.”
허칠안은 고기를 먹고, 왕비는 죽을 먹었다. 이는 두 사람이 최근에 배양해낸 구두 협정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서로 상처를 준 뒤의 후유증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허칠안은 매우 화가 났다. 그는 그녀가 고기를 먹는 게 기분이 나빴고, 왕비 역시 허칠안이 고기를 못 먹게 해서 기분이 상했다. 하여 아주 힘껏 앙갚음했다.
악순환이었다.
허신년의 얼굴을 한 허칠안이 절벽 동굴에서 걸어 나와 모닥불 옆에 앉더니 말했다.
“저희 오늘 황혼 전에 삼황현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왕비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이는 고생스러운 여정이 드디어 끝났다는 의미였다.
허칠안은 그녀를 쳐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이 닭은 마마께 잡아 드린 거예요.”
왕비는 안색이 갑자기 굳어졌다.
“왜요? 먹고 싶지 않으셔요? 아니면 또 닭에 새똥을 묻혔다고 하시든가요.”
허칠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질문했다.
“자, 자네 작작 하게. 저속한 마음으로 고상한 사람의 생각을 헤아리다니.”
왕비는 닭을 쥐고 그의 앞에 두더니 센 척하면서 말했다.
“자네가 직접 보면 되잖나. 어디에 새똥이 있다는 거야.”
“그럼 마마께서 드시지요.”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
왕비는 입을 벌리더니 연약하게 말했다.
“나, 나는 입맛이 없네. 비린내 나는 음식은 먹고 싶지 않아.”
“얼른 드세요. 음식을 낭비하면 안 되지요. 그러면 저 화낼 겁니다.”
허칠안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구겨졌다.
이때 허칠안의 가슴에서 진동이 전해졌다. 오랜만에 지서 단체 채팅방에서 누군가 전서를 보냈다.
그는 죽을 받치고 일어나서 절벽 동굴로 돌아갔다. 그는 걸으면서 말했다.
“얼른 다 드세요. 다 먹지 않으면 왕비마마를 이곳에 내버리고 호랑이 밥으로 줄 거예요.”
왕비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 *
허칠안은 절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지서 파편을 응시하면서 죽을 한 모금 먹었다. 옥석경에 작은 글자가 한 줄 떠올랐다.
[이: 금련 도사님, 사람들을 차단해 주십시오.]
얼마 후, 이묘진의 전서가 다시 왔다.
[이: 허칠안, 북경에 도착했는가?]
허칠안은 그릇을 내려놓고, 붓 대신 손가락으로 메시지를 입력했다.
[삼: 오늘 북경에 도착할 수 있소. 무슨 정보를 알아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