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5화. 팔가락지
“내 기억에 지서 파편 안에 이묘진의 향낭이 하나 더 있었는데…….”
허칠안이 지서 파편을 꺼내 거울 뒷면을 두드리자 과연 향낭 하나가 떨어져 나왔다.
이 향낭 안에서는 ‘혈도 삼천리’만 읊어대는 잔혼을 관리하던 참이었다.
처음에는 위연이 향낭을 가지고 가 조당에서 진북왕을 고발하고 그 후에 허칠안에게 향낭을 도로 돌려줬다. 그는 천종 성녀에게 돌려주는 걸 깜박하고 줄곧 갖고 있었다.
이 향낭은 이묘진이 직접 만든 작은 법기로서, 영혼을 관리하고 가두어 놓는 효과가 있었다. 누군가에게 제련(祭煉)당한 적 있는 늙은 귀신은 제외하고, 갓 죽은 이런 새로운 귀신은 항냥의 속박을 뚫을 수 없었다.
“물론 지적 장애가 있긴 하지만 이 술사는 나중에 큰 쓸모가 있겠어. 음, 우선 거두자. 그때 가서 이묘진에게 관리하라고 넘겨야지. 버젓한 천종 성녀니 분명히 이 망령의 이성을 회복시킬 수단과 방법이 있을 거야. 그렇잖아. 이게 바로 넓은 인맥의 장점이지. 아니, 이건 성공한 어장남만이 누릴 수 있는 복지라고…….”
허칠안은 술사와 다른 이의 영혼을 함께 향낭에 집어넣고, 그들의 시체를 지서 파편에 집어넣어 현장을 간단하게 처리했다.
이곳에서 지나치게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신수 승려가 깔끔하고 강하게 짓눌렀기에 시체를 처리하기만 하면 됐다.
마지막으로 허칠안은 이 여종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죽이는 편이 낫겠지? 큰일을 하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연연하지 않는 법이야. 그녀들이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북방 고수들을 가로막은 건 알고 있잖아. 하지만 그녀들은 첫째, 사람으로서 못 할 짓을 하지 않았고, 둘째, 날 위협할 일이 없는 무고한 생명들이야…….”
허칠안은 한참을 가늠하더니 결국에는 이 여종들을 풀어주기로 선택했다. 일단 그는 자신의 양심을 무시하고 무고한 사람을 학살하는 폭행을 저지를 수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사람을 죽여 멸구할 만한 동기가 부족했다.
그가 왕비를 계속 꽁꽁 숨겨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게 할 작정이거나, 그가 공공 재물인 왕비의 영혼을 빼앗을 생각이 있지 않은 이상 말이다.
그런 경우라면 사람을 죽여 멸구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을 때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건 자신과 가족들의 안위를 무책임하게 내버리는 격이다. 하지만 허칠안의 성격으로는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의 후속 계획에 왕비는 또 다른 용도가 있다. 아주 중요한 용도다. 따라서 그는 그녀를 줄곧 숨겨두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보니 그에게는 사람을 죽여 멸구할 동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비록 내가 너희를 죽여 멸구하지 않을 테지만, 너희가 너무 이르게 곤경에서 벗어나면 나의 후속 계획에 영향을 미칠 거야. 그러므로…… 여기에서 잘 자고 있다가 깨어난 후에 각자의 길을 가자고.”
* * *
밤바람은 약간 쌀쌀했다. 아주머니는 깊이 잠들었다가 깨어난 순간, 온몸이 편안하고 피로가 싹 가신 듯했다.
그녀는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몸에 피로가 많이 누적되어서 이렇게 푹 수면을 취해야 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시야에 가장 먼저 나타난 건 거대한 용수(*榕樹: 벵골보리수)였다. 나뭇잎이 밤바람에 ‘샥샥’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녀는 나무 밑 습지대 위에 누워 몸에는 장포를 덮은 채였다. 귓가에는 모닥불이 투둑투둑 타는 소리가 들렸고, 불꽃이 적당한 온도를 유지했다.
그녀는 눈빛이 잠시 멍해졌다가 문득 눈동자의 초점을 회복했다. 부유한 생활을 누렸던 이 여인은 그런 뒤에 발딱 일어났다.
그녀의 체력으로 말하자면, 잠재력이 폭발한 셈이었다.
그녀가 가장 먼저 한 건 제 몸을 검사하고, 옷매무새가 단정한지 보는 일이었다. 그때서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두려워하며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녀는 모닥불 옆에 앉아있는 젊은 총각을 보았다.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옥처럼 고왔다.
“일어났어요?”
손으로 토끼 한 마리를 굽는 중이었던 허칠안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
“아주머니 옆에 물주머니가 있으니 목마르면 드셔요. 일각 후에는 토끼 고기를 먹을 수 있어요.”
아주머니는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이 되살아나 빠르게 스쳐 갔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허칠안을 쳐다보았다.
“자네가 나를 구했는가?”
“네!”
허칠안은 막 자신의 공을 과시하고 싶었던 참이었는데, 아주머니가 고개를 저으며 경계하듯 그를 주시하는 모습이 보였다.
“불가능해. 허칠안에게는 그런 실력이 없다고. 자네는 도대체 누구인가? 왜 그로 위장했지? 그는 지금 어찌 되었느냐.”
그녀는 한 손으로 가슴을 감싸면서 한 손으로는 옆자리를 더듬어 무기를 찾아 안정감을 얻고자 했다. 그녀는 결국에는 물주머니를 잡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허칠안’이 감히 다가오려고 하자 그녀는 상대방의 머리를 때렸다.
‘합리적인 의심이야. 머리가 아주 멍청한 건 아니네…….’
허칠안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언짢아하며 말했다.
“우리가 처음으로 만난 곳은 남성 연무대 옆의 주루였습니다. 제가 아주머니의 은자를 주웠더니 아주머니가 씩씩거리며 제게 달라고 했지요. 나중에 제가 던진 돈주머니에 발을 찧었고요. 두 번째 만남 역시 남성 연무대 옆이었습니다. 제가 위험을 무릅쓰고 아주머니를 보호했는데 저를 때리셨죠.”
묵직한 소리와 함께 물주머니가 바닥에 떨어졌다. 아주머니는 넋이 나간 채로 그를 한참 쳐다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말 자네군.”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모닥불 곁의 소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제가 온 힘을 다해 아주머니를 구했어요. 다른 사람은 역부족이었고요.”
허칠안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설명했다.
“그, 그렇군.”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왕, 왕비마마는 죽었는가…….”
허칠안은 그녀를 쳐다보더니 무관심하게 ‘음’하고 소리 내더니 말했다.
“나라와 백성들에게 재앙을 가져오는 이런 여인이 죽는다고 해서 모든 일이 해결되진 않습니다만, 잘 죽었어요. 칭찬할 만합니다.”
그녀는 순간 눈을 번쩍 뜨고 허칠안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무슨 헛소리인가. 무슨 왕비가 나라와 백성들에게 재앙을 가져온다는 말인가. 그녀는 가련한 여인이라고.”
“어디가 가련하지요?”
허칠안이 웃었다.
“흥!”
왕비는 하얀 아래턱을 치켜올리고 고개를 젖힌 채 씩씩거리며 말했다.
“저속한 무사가 왕비마마의 고통을 어찌 알겠나? 자네와 얘기하지 않겠네.”
‘위험에서 벗어나니 도도한 기운이 또 살아났네. 찌질하고 겁 많고 도도하고…….’
허칠안은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고기 굽는 데 열중했다.
아주머니는 처음으로 분수에 만족하며 용수 아래 앉아 허칠안과 거리를 유지했다.
토끼가 구워질수록 고소한 향기가 풍기자 그녀는 침을 삼키면서 슬금슬금 옮겨 모닥불 옆으로 왔다. 그녀는 무릎을 감싸 안은 채 열정적으로 토끼 구이를 주시했다.
마치 먹이를 던져주길 기다리는 고양이 같았다.
허칠안은 누르스름한 토끼를 다 구운 뒤 치킨스톡을 뿌렸고, 양 뒷다리를 뜯어 그녀에게 건넸다.
아주머니는 눈을 빛내더니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받아서 한 입 먹었다.
씁……. 그녀는 아주 뜨거운 고기에 데었지만, 배가 몹시 고파 뱉지도 못하고 작은 입을 벌려 계속 호호 불어댔다.
치킨스톡이 토끼 고기의 비린내를 잡아주고 감칠맛을 냈다. 게다가 허칠안이 바삭바삭하니 먹음직스럽게 구웠다. 그녀는 평소에 비린 음식을 아주 싫어하지만 지금은 뜻밖에도 토끼 다리 두 개를 말끔하게 뜯어먹었다.
그리고 그녀는 용수 아래로 기어가 물주머니를 들고 꿀꺽꿀꺽 물을 마셨다.
그녀는 인생이 더없이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그녀는 밥을 배불리 먹은 뒤 다시 모닥불 곁으로 옮겨가 유달리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이미 거지 같은 지경에 이르렀는데 토끼 고기를 몇 입 먹으니 인생이 행복하단 생각이 드는군.”
‘저 배은망덕한 모습은 마치 현자 타임에 들어간 내 모습과 흡사한걸…….’
허칠안은 그녀의 온몸이 문제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미있는 여인이다.
“잉? 아주머니 이 염주 참 재미있네요.”
허칠안은 그녀의 새하얀 손목으로 시선을 옮기며 무심코 말했다.
그런데 그녀의 꽃다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황급히 소매를 모아 감춘 뒤 말했다.
“값어치 없는 물건일세.”
‘그가 발견하지 못했겠지. 그가 발견하지 못한 게 틀림없어. 누가 평범하기 그지없는 팔가락지를 기억하겠어. 이미 반년이 지났는데.’
“제게 좀 보여주세요.”
허칠안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너, 너, 방자하구나…….”
아주머니는 아연실색하였다. 자신의 손이 남자가 함부로 만져도 되는 손이란 말인가?
그녀는 두 손을 뒤로 숨긴 뒤, 두 다리를 뻗은 채 뒤로 움직여 허칠안에게 팔가락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허칠안은 그녀의 손목을 잡은 채 그녀를 다시 끌고 왔다.
아주머니는 두 다리로 마구 발길질하면서 비명을 질렀다.
“팔가락지 좀 보여주세요. 뺏어갈 것도 아닌데요.”
허칠안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왜 이렇게까지 반응하는 거예요?”
“안 줘, 안 줘, 안 줘…… 이 자식아!”
그녀는 큰 소리로 외쳤다.
“아!”
비명 속에서 허칠안은 팔가락지를 걷어 냈다.
팔가락지가 새하얀 팔목을 벗어났다. 평범한 자태의 나이 많은 여인의 물속에 비친 그림자 같은 외모가 바뀌더니 그녀의 본 모습이 나타났다.
불빛에 비친 그녀의 둥글고 아름다운 눈은 마치 얕은 호수에 스며든 찬란한 보석 같았다. 몹시 영롱하여 감동적일 정도였다.
그녀는 수줍어하면서도 겁을 먹고 고개를 들었다. 살짝 떨리는 속눈썹은 몽롱한 아름다움을 풍겼다.
그녀의 입술은 불그스름하고, 입꼬리는 조각한 듯 정교했다. 마치 가장 탐스러운 앵두가 남자가 접근하도록 유도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름답고도 아름다웠으나 그 기질과 자태는 누구보다도 한 수 위였다. 마치 그림 속 신선의 여인 같았다.
“…….”
허칠안은 절세미인을 본 적이 있었다. 진북왕비가 대봉 제일의 미인이라 칭송받는다는 만큼 당연히 그녀에게 특별한 점이 있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허칠안은 전설 속의 대봉 제일 미인을 진짜로 보니 몹시 놀라웠고, 그녀를 흠모하는 마음이 솟구쳤다. 마음속에 자연스레 시 한 수가 떠올랐다.
<구름 닮은 옷차림, 꽃 같은 용모. 봄바람이 난간에 스치니 이슬이 더욱 짙어지네. 군옥산(群玉山) 정상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요대(瑤臺)의 달빛 아래서 만났으리라.>
“돌, 돌려줘…….”
그녀는 흐느끼며 애걸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허칠안은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다가 더는 놀리지 않고 팔가락지를 건넸다.
왕비는 재빠르게 빼앗아 다시 착용했고, 물결 같은 그림자가 흔들리더니 그녀는 다시 평범하기 그지없는 아주머니로 변했다.
그녀는 30대 초반의 나이로 이목구비도 기질도 평범해 보였다.
왕비는 얼굴을 쓰다듬더니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팔가락지를 한 오른손을 몸 뒤로 숨기고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 경계하는 눈빛으로 허칠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미모가 남자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알았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유혹을 참고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있는 남자를 오직 두 명 만나보았다. 한 명은 장생이 모든 걸 뛰어넘는, 수련에 깊이 빠진 원경제다.
다른 한 명은 무도에 사로잡혀 그녀에게 다른 계략을 품은 회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