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3화. 왕비의 비밀 (1)
왕비는 북방 고수들의 대화를 듣던 중 가슴이 철렁해졌고,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허칠안, 이 세상 물정 모르는 놈, 이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 썩 꺼져……!”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비명 소리에 끊겼다.
그 백의 술사가 양손을 들고 눈을 가렸고, 그의 손가락 사이로 선혈이 스며 나왔다.
왕비는 망연히 백의 술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몰랐다.
“도망쳐, 얼른 도망쳐. 나, 나를 데리고 같이 도망가…….”
백의 술사는 온 힘을 다해 잇새로 이 말을 밀어냈다.
홍릉, 탕산군, 천랑, 찰이목하 고수 네 명은 표정이 돌변했다.
‘도망가라니? 우리 4품 넷이 손을 잡고 이 자식을 상대해도 승산이 없다는 말이야?’
성격이 거칠고 살인을 일삼고 호전적인 거인 찰이목하가 첫 번째로 불복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칠안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 그가 뭘 봤길래……. 왜 우리에게 도망가라고 하지……. 이 자식이 만약 이렇게 무섭다면 방금 구태여 왜 이렇게 싸움을 오래 끌었을까?’
탕산군은 천성이 거칠었기에 경계하는 눈빛으로 허칠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망기술로 보면 안 되는 걸 봤나?’
천랑은 강한 적을 맞닥뜨린 듯 더는 그를 얕잡아 보지 않았다.
‘이 자식 문제가 있다…….’
백의 술사의 참담한 모습이 홍릉의 눈에 비쳤다. 전광석화처럼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정보가 스쳤다. 그녀가 일찍이 술사와 교류하다가 얻은 정보였다.
그녀는 매복하러 대봉에 가는 도중에 진북왕비의 모습이 유달리 아름다워 술사는 수십 리 밖에서도 볼 수 있다고 들었더랬다.
그녀는 순간 호기심이 생겨 물었다.
“그럼 만약 3품, 2품 그리고 1품은? 엿보면 어떻게 돼?”
술사가 그녀에게 대답했다.
“만약 3품이라면 원신이 중상을 입었을 것이네. 2품이라면 그 자리에서 눈이 멀고 정신착란을 일으킬 것이야. 만약 1품이라면…….”
술사는 계속해서 말하지 않았지만 홍릉은 상대방의 표정을 통해 추측할 수 있었다. 끝은 죽음이었다.
‘2품, 이 자식이 2품? 아닌데. 그자가 2품과 관련 있거나 같은 급의 다른 물건을 지닌 것이다…….’
홍릉은 자신의 심장 박동을 전혀 통제하지 못했고, 아드레날린이 미친 듯이 솟구쳤다.
그녀의 근육과 피부에 소름이 돋았고, 모든 신경이 위험하니 도망치라는 신호를 전송했다.
이때, 허칠안이 손을 들고 가볍게 눌렀다.
청풍 같은 기기의 파동과 함께 여종들이 일제히 실신했다.
‘도망쳐, 어서 도망쳐. 그렇지 않으면 죽을 거야…….’
가슴속에서 거대한 공포가 터져 나왔고, 홍릉은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른 채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이 자식 정말 시건방지네. 찰이목하, 빨리 안 해? 유가 서적 안 갖고 싶어?”
살인을 일삼고 호전적인 찰이목하는 그 자체로 오기가 생겼다. 그는 허칠안 몸속에 존재하는 4품을 뛰어넘는 드높은 역량을 감지하지 않았기에 홍릉에게 자극받아 별안간 섬뜩한 웃음을 지으며 달려들었다.
한 장(丈) 높이의 거인이 미친 듯이 내달리자 지면이 뒤흔들렸다.
천랑, 탕산군 두 사람은 마침 나서려다 문득 이상함을 깨달았다. 그들은 문득 고개를 돌렸다가 홍릉이 사람들을 내팽개치고 홀로 도망쳤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건…….’
4품 고수 두 명의 눈동자가 수축되었고, 속에서 불길한 예감이 솟구쳤다.
뒤이어 그들은 비명 소리를 들었다. 찰이목하가 낸 비명 소리였다.
그들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한 장(丈) 높이의 거인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였다. 칠흑같이 까맣고, 검푸른 혈관이 온통 뒤덮인 팔뚝이 그의 오른손 손목을 쥐고 있었다.
팔뚝 근육은 울퉁불퉁 짜여 있었는데 그의 주인과 전혀 비교되지 않았다. 약간 기형적으로 보였다.
그 근육이 입처럼 내뱉는 숨결은 괴이하면서도 끔찍했다. 마치 심연이나 지옥에서 온 듯했다. 그 광경을 보기만 해도 천랑과 탕산군은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듯했다.
그들은 드디어 홍릉이 왜 도망치려 했는지 알았고, 백의 술사가 왜 도망치라고 소리쳤는지 알았다.
뚜둑뚜둑…….
뼈가 부러지는 소리 사이로 ‘거인’ 찰이목하의 몸이 재빠르게 쪼그라들었고, 비명 소리가 그쳤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다. 한 사람은 우주 위로 뛰어올랐으며, 한 사람은 홍릉을 따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마음에 깨달음이 있으면 근심도 두려움도 없나니.”
허칠안이 우렁차게 말했다.
불문 계율!
그는 이번에 마법서를 쓰지 않았다. 그의 몸을 장악한 건 신수였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먼 곳에 있던 홍릉, 가까운 곳에 있던 천랑과 탕산군의 마음속 공포가 가라앉았다. 그들은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사라졌고,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돌아서서 허칠안과 생사를 걸고 승부를 겨루려고 했다.
계율의 영향이 2초 만에 사라지고, 두려움과 살고자 하는 욕구가 다시 그들의 정신을 지배했지만 모든 게 늦었다.
2초라는 시간은 신수가 몸속에 들어온 허칠안이 Triple kill을 완성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등허리에 있는 흑금장도를 뽑아 내던지더니 보지도 않고 귀신처럼 천랑 앞에 나타났다. 그러고는 그의 목덜미를 쥔 채 기기를 내뿜었다.
투둑 소리와 함께 머리가 꺾였다.
뒤이어 허칠안은 훌쩍 뛰어올라 높은 곳에서 낙하했다. 그는 한 발로 탕산군을 땅바닥에 짓밟고, 손바닥으로 머리 위를 툭툭 쳤다.
쿵!
탕산군의 두 눈이 순식간에 하얗게 뒤집혔고, 세로 눈은 서서히 어두워졌다.
그리고 이 순간, 먼 곳에서 ‘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흑금장도가 홍릉의 가슴을 관통한 뒤 그녀를 바닥에 꽂았다.
4품의 육신은 신수 승려가 힘차게 투척한 무기 앞에서 마치 종잇장 같았다.
“안 돼. 나를 죽이면 안 돼. 나를 죽이면 안 돼…….”
홍릉은 애절한 목소리로 용서를 구했다. 그녀는 입에서 피거품을 토해 내는 모습이 애처롭고 가련해 보였다.
그녀의 마음속에 강렬한 후회가 밀려왔다. 만약 이번 몰살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만약 대봉에 오지 않았다면 이 괴물을 만날 일이 전혀 없었다.
사절단에서 가장 무서운 자는 양연이 아니라 이 은라였다. 사람들 속에 숨었던 이 악마였다.
그녀는 지금 알았으나 이미 너무 늦었다.
“빈승은 너를 죽이지 않았다. 빈승은 너를 윤회로 보낼 것이다.”
신수 승려는 양손을 합장하고, 정혈이 빨린 가짜 왕비를 보더니 온화하게 말했다.
“그녀처럼.”
홍릉은 절망적인 얼굴로 날카롭게 소리쳤다.
“넌 누구냐. 너는 도대체 누구야!”
“대봉 은라, 허칠안이다.”
신수가 말했다.
“허칠안이라…….”
홍릉은 중얼거리며 말했다.
이건 그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그녀의 머리 역시 꺾였다.
사람을 다 죽인 후, 신수 승려는 4품 강자 셋의 정혈을 하나씩 흡수하였고, 그들은 미라가 되었다.
“앞으로 이런 상대가 또 나타나면 나를 부르게…….”
신수 승려는 말을 마친 뒤 신체 통제권을 허칠안에게 돌려주었다.
‘지금 신수 대사의 입심이 세졌다……. 정말 재미없는 전투군. 나는 4품 무사의 괴이함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어. 힘도 쓰기 전에 그들이 쓰러졌으니…….’
허칠안이 속으로 말했다.
이런 전과에 그는 전혀 놀라지 않았고, 응당 이래야 한다는 생각마저 했다.
애당초 신수의 단수는 오백 년간 봉인되어 있었다. 오백 년간 탄약도 다 떨어지고 양식도 고갈되었는데 막 세상에 나오자마자 금라 넷과 양천환을 물리칠 수 있었다.
지금은 그의 몸속에서 반 년 동안 온양하였고, 또 고분의 기운을 얻어 자양하였다. 만약 4품 몇 명에게 맞서는데 야단법석을 떨며 열을 올리면, 그건 신수의 지위를 너무 모독하는 셈이다.
‘그가 진북왕에게 대항할 능력이 있는지 모르겠네……. 아, 진북왕은 3품이지. 그리고 2품과 4품 간의 격차가 크니 신수가 4품을 죽일 수 있다고 해서 3품을 죽일 수 있는 건 아니야…….’
허칠안은 칼을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현장에는 여종을 제외하면 두 명이 운 좋게 살아남았다.
저상룡과 백의 술사였다.
“장군께서는 곧 죽을 텐데 남기고 싶은 유언이 있습니까?”
허칠안이 저상룡의 앞으로 걸어가 물었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간신히 숨이 붙은 저상룡은 혼탁한 눈빛으로 허칠안을 쳐다보았다.
화살이 그의 심장을 관통하였기에 죽음은 이미 피할 수 없었다. 그가 아직 살아 있는 이유는 무사의 강한 신체와 정신력으로 버텼기 때문이었다.
“말했잖습니까. 대봉의 은라 허칠안이라고요.”
“그건 자네의 목소리가 아니었네.”
허칠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상룡은 그를 주시하면서 몇 초 쳐다보더니 쉰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줄곧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자, 자네가 내게 준 석불…….”
“가짜입니다. 여기저기서 긁어모아서 수량이 부족하지요.”
허칠안이 비웃으며 말했다.
“…….”
저상룡은 악담을 퍼부으며 말했다.
“자네는 제 명에 죽지 못할 게야!”
푹!
허칠안이 흑금장도를 휘둘러 그의 머리를 베었다.
뒤이어 그는 정신착란을 일으킨 술사를 다시 쳐다봤다. 그자와는 이미 소통을 할 수가 없었다. 두 눈에서 선혈이 흘렀고, 입으로는 같은 말을 반복하여 중얼거렸다.
“빨리 도망가, 빨리 도망가…….”
그는 손을 들고 칼을 내리쳐 술사 역시 베어 버렸다.
허칠안은 산 사람을 전부 죽여 버린 뒤, 유가 서적을 꺼내 도문의 ‘취음진(聚陰陳)’을 기록한 법술을 찢어 기기로 태웠다.
밀림 사이로 이따금 찬바람이 불어왔다. 태양이 온도를 잃은 듯했다.
진실하지 못한 일곱 개의 허영이 화신이 되어 허공에 맺혔다. 그들의 표정은 멍하고 다소 어눌했다.
북행 전, 이묘진이 허칠안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사람이 죽고 난 후에는 천혼(天魂)과 지혼(地魂)이 육체를 떠나고, 인혼(人魂)은 육체 안에 잔류하다가 7일 후에야 넘친다고 말이다. 세 개의 영혼이 다 모이지 않았을 때 영혼은 어눌하고 멍하다.
그에게 무엇을 묻든지 거짓말하지 않고 전부 사실대로 대답할 것이다.
“너희는 왕비가 북상한다는 소식을 어떻게 알았고, 사전에 매복한 것이냐?”
허칠안은 북방 고수 넷의 영혼을 훑어본 뒤 차분하게 물었다.
“서성조(徐盛祖)가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거인’ 찰이목하가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서성조가 누구인가.”
허칠안이 나지막이 말했다.
“술사인데…….”
찰이목하는 아주 성실하게 꼬박꼬박 대답했다.
‘술사?’
이내 허칠안의 시선이 백의 술사의 영혼으로 옮겨갔다. 어떠한 생각에 잠긴 듯 그는 계속해서 물었다.
“왜 왕비를 매복해 죽이려고 했는가.”
사람이 죽은 후에는 영혼이 멍하고 어눌하여 질문을 하나씩 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은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진북왕이 2품으로 들어서는 일을 막기 위해서다.”
찰이목하가 대답했다.
‘진북왕이 2품으로 들어서는 일을 막기 위해 왕비를 죽이려 했다고?! 이, 이 중에 무슨 필연적인 연결고리가 있길래? 왕비가 없으면 진북왕이 2품으로 승직할 수 없다고?’
이 대답은 허칠안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그래서 그는 멈추고 한참을 생각했다.
원래 허칠안은 이번 왕비의 북행에 다른 비밀이 있다고 추측했더랬다. 그는 이 일이 원경제와 관련되거나 진북왕의 어떤 계략에 연관되었다고 짐작했다.
그렇다. 사실은 이러했다. 다만 그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일개 여인이 진북왕의 2품 승직과 관련되었을 줄이야.
허칠안은 한참을 침음한 후, 홍릉과 탕산군 그리고 천랑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대답했다.
‘그들이 왕비를 살해하려는 목적이 정말 진북왕이 2품으로 승직하는 일을 막기 위함이었다니…….’
그는 다시 물었다.
“왕비에게는 무슨 특별함이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