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화. 야담(夜談)
왕비는 계집애들에게 가로막혀 갑판 위 사람들의 표정을 보지 못했지만, 소리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그는 행동이 언뜻 사납고 포악하여 혈기 왕성해 보이지만, 사실 거칠면서도 세심한 데가 있다. 그는 금군들이 그를 둘러싸리라는 점을 진작에 예측했다……. 아, 아니다. 내가 외재적인 부분에 미혹되었을 뿐이야. 그가 저상룡을 제압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일이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정정당당할 수 있었다. 소위 도리에 맞는 행동을 하는 자는 많은 도움을 받고,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자는 도움을 받지 못하는 법이지…….’
왕비는 그가 패기 넘치고 매력적인 인격의 남자라는 점을 인정해야 했다. 다만 그는 너무 여색을 밝힐 뿐이었다.
저상룡이 순순히 인정하고 떠나자 이 풍파도 이로써 끝이 났다.
허 은라는 금군을 달래고 선실로 걸어갔다. 입구 쪽을 막았던 여종들이 잇따라 흩어졌다. 그녀들은 다소 겁먹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허칠안은 그녀를 스쳐 지나갈 때 그녀를 향해 윙크했다. 그녀는 바로 싫다는 표정을 지었고, 아주 경멸하며 외면했다.
‘역시 호색가야…….’
왕비는 속으로 중얼댔다.
현재 그녀는 확실히 미인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고, 자태도 평범하였다. 하지만 설령 이렇다고 해도 허칠안은 옹졸하고 여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여전히 그녀를 꼬시려고 시도했다.
* * *
허칠안은 선실로 들어가 2층에 올라간 뒤 양연의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게!”
양 금라가 처음부터 끝까지 분쟁에 낄 가치가 없다는 생각에 담담하게 말했다.
허칠안이 문을 밀고 들어가자 침상 가장자리에 가부좌를 튼 양연이 보였다. 침상 옆에는 장화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양연은 빈틈없이 일하지만, 옥춘 형의 강박증과는 또 달랐다.
허칠안은 문을 닫고, 발길 가는 대로 탁자 옆으로 갔다. 그는 물을 한 잔 따르고 단숨에 들이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그 부녀자들은 어찌 된 일입니까?”
“저상룡이 왕비마마를 호송하여 북경으로 가는데 사람들의 이목을 가리기 위해 사절단에 섞여 들었네. 이 일은 폐하와 위 공께서 통지하였으나 구두 명령일 뿐 증거가 되는 문서는 없네.”
양연이 말했다.
‘정말 왕비였군…….’
허칠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짐작이 맞았다. 저상룡이 호송하는 부녀자가 정말 진북왕의 왕비였다. 그는 바로 이러한 이유로 저상룡을 위협했을 뿐 정말 그를 쫓아내지는 않았다.
“왜 왕비를 북경까지 호송하는데 이렇게 몰래 가야 합니까?”
허칠안이 의문을 제기했다.
양연은 고개를 저었다.
‘이 일에는 분명히 음모가 있어…….’
허칠안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대장, 저한테 왕비에 대해 좀 얘기해주시지요. 그녀는 신비로운 것 같아요.”
양연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이 질문은 그를 좀 난처하게 했다. 무도에 미친 사람에게 가십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내가 아는 정보는 많지 않네. 그해 산해관전역 이후, 폐하께서 왕비마마를 회왕에게 하사하였다는 것만 알 뿐이야. 그리고 20년 동안 그녀는 경성을 떠난 적이 없네.”
‘그런 일들은 나도 알아. 나는 심지어 왕비를 형용하는 시도 기억한다고…….’
허칠안은 가십거리를 알아내지 못하자 갑자기 더없이 실망하였다.
“자네가 이번에 저상룡에게 미움을 샀으니 북경에 도착한 후 적잖이 괴롭힘당할 걸세. 하지만 위엄을 세우는 데에는 성공했어. 이 여정에서 감히 자네와 겨룰 자는 없네.”
양연이 계속해서 말했다.
“삼사 사람은 믿을 수 없어. 그들은 사건에 전혀 적극적이지 않네.”
‘속이 보여. 위험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은 사건을 조사할 거야. 일단 위험에 처하면 분명히 겁을 먹고 뒷걸음질을 치겠지. 어쨌거나 파견 임무를 잘하지 못해도 기껏해야 벌을 받으니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낫지…….’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인지상정이지요.”
양연은 딱히 설득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허칠안을 쳐다보며 말했다.
“또 다른 일이 있는가? 없으면 나가게. 내 수련을 방해하지 말고.”
‘대장, 너란 사람은 정말 하나도 재미없구나. 너는 딱 내 전생 세계에서의 개발자야. 여자가 그들 앞에서 애교를 부려도 그들은 404라고 외칠 뿐이지.’
허칠안은 반은 드립치고, 반은 비아냥대면서 방을 나섰다.
* * *
이날, 허칠안과 진효 그리고 금군 한 무리가 저녁밥을 먹고 높은 밤하늘 아래 갑판 위에 앉아 허풍을 떨며 얘기를 나누었다.
허칠안은 그들에게 자신이 해결한 세은 사건, 상백 사건, 평양군주 사건 등등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금군들은 듣더니 진심으로 탄복하였고, 허칠안이 그야말로 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명색이 경성 금군으로서 이 사건들을 처음 들은 게 아니었지만, 자세한 사항은 전혀 몰랐다. 그리고 지금 드디어 허 은라가 어떻게 사건을 해결했는지 깨달았다.
예컨대 세은 사건 당시, 장락현 쾌수였던 허칠안은 감옥에 갇힌 뒤 마음을 차분히 하고 부윤에게 말했다.
“사건을 해결하고 싶습니까?”
진 부윤이 대답했다.
“그렇다.”
허칠안은 담담하게 말했다.
“권종을 가져오십시오.”
그래서 진 부윤은 권종을 보내왔고, 그는 힐끗 보더니 야경꾼과 부아의 골머리를 썩히는 세은 사건을 꿰뚫어 보았다.
또 예를 들면, 복잡하게 뒤섞여 역사책에 기록될 수밖에 없는 상백 사건에서는 형부와 부아의 포졸들이 서로 시비를 가리지 못하고 속수무책이었다. 허 은라, 아, 아니, 당시의 허 동라가 황제의 하사품인 금패를 손에 쥐고 형부와 부아의 식충이들에게 맞서며 말했더랬다.
“형부가 사건을 처리하지 못하니 저 허칠안이 처리하겠습니다. 저 허칠안이 형부가 감히 하지 못하는 일을 하겠습니다.”
형부의 쓸모없는 인간들이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허 은라는 정말 대단하다…….’
금군들은 점점 더 그를 탄복하고 숭배했다.
“사실 이건 모두 별거 아니야. 내 평생 가장 만족하는 업적은 운주 사건이네.”
허칠안은 손에 술주전자를 들고 몹시 여윈 얼굴을 훑어보더니 도도하게 말했다.
“그날 운주 반란군이 포정사사를 공격하여 순무와 모든 동료의 목숨이 위태로웠지. 이때 나 혼자 칼 하나 쥐고 팔천 반란군 앞을 막아서니 그들은 한 명도 들어올 수 없었네. 내가 꼬박 한 시진을 베느라 칼 수십 개를 부러뜨렸고, 온몸에 화살이 가득 꽂혔지만, 그들은 한 명도 들어올 수 없었네.”
“팔천이요?”
백부장 진효는 어리둥절했다. 그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저는 어째 일만 반란군이라고 들었지요?”
“저는 일만 오천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니, 아니. 저는 금군 내부의 형제가 하는 말을 들었는데 무려 2만 반란군이라고 했습니다.”
병사들은 논쟁하기 시작했다.
‘……그, 그건 너무 허풍이잖아. 내가 다 민망하네.’
허칠안은 기침 소리를 내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그건 전부 헛소문이네. 내가 센 숫자를 기준으로 하면 팔천 반란군뿐일세.”
팔천은 허칠안이 비교적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숫자였다. 만을 넘어가면 지나친 과장이 된다. 어떤 때는 그 자신조차 당시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반란군을 죽였는지 망연해지곤 했다.
“알고 보니 팔천 반란군이었군요.”
금군들은 문득 모든 걸 깨달았고, 이게 바로 진짜 수치라고 굳게 믿었다. 어쨌거나 허 은라 자신이 한 말 아닌가.
그들이 한담을 나누다 보니 나가서 바람 쐴 시간이 다 되었다. 허칠안은 손뼉을 치며 말했다.
“내일 강주에 도착하네. 더 북쪽으로 가면 초주 국경이지. 우리는 강주 역참에서 하루 쉬면서 물자를 보충할 테니, 내일 여러분에게 반나절 휴가를 주겠네.”
‘허 대인 정말 끝내준다…….’
병사들은 즐겁게 선실 바닥으로 돌아갔다.
요 며칠은 선실 바닥에 틀어박혀 지낼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요강도 부지런히 닦아서 환경이 크게 개선되었고, 혈색도 많이 좋아졌다.
얼마 전까지 시끌벅적하던 갑판이 어느 순간 썰렁해졌고, 서릿발 같은 달빛이 배 위, 사람 얼굴, 강물 위를 비추었다. 맑고 깨끗한 달빛이 반짝였다.
“사기꾼!”
술주전자를 든 허칠안은 누군가 뒤에서 자신을 욕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아주 뻔뻔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주머니는 그냥 제 뛰어남을 질투하는 거예요. 제가 사기꾼인지 어떻게 알아요? 운주에 있지도 않았으면서.”
아주머니는 가시 돋친 말을 내뱉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자네는 내가 말한 일이 운주 사건이라는 걸 어떻게 알지?”
허칠안은 순간 말문이 막혀 불쾌해하며 말했다.
“또 볼일이 있습니까? 없으면 꺼지시지요.”
아주머니가 화를 내며 말했다.
“안 꺼질 건데. 자네 배도 아니면서.”
그녀는 몸이 연약하며 배의 흔들림을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요 며칠 잠을 설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해서 눈두덩이가 튀어나왔다. 심지어 그녀는 근래 초췌해져 잠자기 전에 갑판에서 바람을 쐬는 습관이 생겼다.
이때 그녀는 그와 병사 한 무리가 갑판 위에서 수다를 떨며 방귀 뀌는 모습을 보자 어쩔 수 없이 한쪽에 숨어 엿듣다가 병사들이 가고 나서야 나올 엄두를 냈다.
허칠안은 아주머니를 상대하지 않았고, 그녀 역시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한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잔광이 반짝이는 강물을 굽어보았으며, 한 사람을 고개를 들어 하늘가의 밝은 달을 우러러보았다.
아주머니가 말을 하지 않을 때는 차분한 아름다움이 엿보였다. 마치 달빛 아래 홀로 활짝 핀 해당화처럼 말이다.
달빛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지만, 그녀의 눈은 속눈썹이 드리운 그림자 속에 감춰진 채였다. 그녀의 눈은 마치 바다처럼 깊고 그윽하면서도 가장 순수한 흑보석 같았다.
허칠안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그녀를 바라보던 시선을 옮겨 고개를 든 채 개탄하며 말했다.
“본관이 시적 정서가 폭발하여 시 한 수 선사하겠습니다. 아주머니, 운이 좋으십니다. 앞으로 제 시를 가지고 뽐내셔도 되겠어요.”
그녀는 비웃더니 하찮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귀는 아주 성실하게 쫑긋 세웠다.
그녀는 늘 자신을 화나게 하는 이 남자를 때리거나 비웃고 싶었지만, 시사 방면에서 그는 대봉 유림이 공인한 시괴였다. 그녀가 그에게 폭언을 늘어놓으면 자신만 미련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잠시 기다렸으나 그는 시를 읊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조용히 걸작을 기다리던 중 참다못해 고개를 돌렸고, 농담기 가득한 눈빛과 마주쳤다.
그녀는 또 화가 나 고개를 돌렸다.
이어 귓가에 반은 탄식하고 반은 읊조리는 그 자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사람은 옛날의 저 달을 보지 못하지만, 지금 저 달은 옛사람들을 비추었으리.”
‘지금 사람은 옛날의 저 달을 보지 못하지만, 지금 저 달은 옛사람들을 비추었으리라…….’
그녀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눈동자가 점점 커졌고, 입으로 중얼거렸다.
“왜 경성의 그 지식인들이 그렇게 자네의 시에 열광하는지 드디어 이해되는군.”
그녀는 가볍게 탄식하며 말했다.
‘그들은 나를 치켜세우는 게 아니야. 나는 시를 짓지 않아. 그저 시사의 짐꾼이지…….’
허칠안은 웃으며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시재는 타고나는 겁니다. 저는 날 때부터 머릿속에 걸작이 가득 차, 손 가는 대로 가져왔을 뿐입니다.”
이번에는 성격이 괴팍한 아주머니가 공격하면서 반박하지 않고 캐물었다.
“뒤 구절은?”
‘뒤 구절은 기억 안 나는데…….’
허칠안은 손을 떼며 말했다.
“저는 그저 이 한 구절만 지었을 뿐입니다. 다음은 없어요.”
그녀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자네를 미워하는지 드디어 알겠군.”
그리고 또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