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화. 어두컴컴한 선실
중춘, 따스한 바람이 불고 강물 위에 숱한 배가 다 지나갔다.
허칠안은 갑판 위에 서서 멀리 내다보았다. 돈선, 관선, 루선(樓船)이 천천히 항해하고, 돛단배가 팽팽하게 부풀어 최대치까지 버티는 사이 어렴풋이 작년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때는 마침 엄동설한이라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살을 에었다. 지금처럼 봄빛이 찬란하지 않았다. 물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무리를 이룬 토실토실한 물오리는 군침 돌게 했다.
‘거리가 너무 멀잖아. 내 기기가 포착해서 빨아들이지 못한다고……. 무사 체계는 역시 잘난 척이 저급해. 나는 버젓한 6품이고 싶은데 나는 이조차 못하다니…….’
허칠안은 실망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설령 경공이라고 해도 물을 밟으며 갈 정도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다. 부유물이 있어야 했다.
아마 5품 화경이 되면 그제야 발로 물을 지탱하여 뜰 수 있을 것이다.
“송정풍과 주광효가 없구나. 만담 보조인 송씨가 없으니 가는 길이 얼마나 재미없을까.”
허칠안이 개탄했다.
그가 속으로 막 이렇게 생각하는데 곁눈질로 짙은 남색의 치마를 입고 여종 차림새를 한 익숙한 사람이 갑판에 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나이는 30~35살 정도로, 외모는 보통이나 미간 사이로 오만한 기질이 엿보였다. 눈꼬리에 웃음기를 띠고 있는 것이 마치 사람을 따스하게 하는 강풍을 누리러 나온 듯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발견하였고, 여인의 표정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아주머니, 어째서 여기에 계시나요?”
허칠안은 믿기 어렵다는 듯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아주머니…….’
여인은 얼굴에 약간 경련을 일으켰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원수가 아니면 만나지 않을 텐데.”
‘진작에 생각했어야 한다. 그의 사건 해결 능력은 당대 일류인데 혈도 삼천리 같은 사건에 어찌 그를 파견하지 않을 수 있겠어.’
저상룡이 그녀에게 말한 적 있었다. 이번 북행은 세상 사람의 이목을 가리고, 호위 역량을 충분히 하기 위해 ‘혈도 삼천리’를 조사하는 사절단과 동시에 출발하기로 했다고.
그녀는 이 사건을 잘 알았지만 그때는 기분이 아주 별로였기에 누가 수석 수사관인지에 관해서는 묻기 귀찮았더랬다.
“아주머니, 아주머니가 어째서 여기에 있나요?”
허칠안은 그녀를 살폈다.
“자네와 무슨 상관이지?”
여인은 차가운 표정을 짓고 위협하며 말했다.
“앞으로 나를 아주머니라고 부르지 말게. 자네의 상급자가 누군가? 사절단의 수석 수사관이 누구지? 또 감히 나를 아주머니라고 부른다면 자네에게 벌을 주라 이르겠네.”
“아주머니, 아주머니, 아주머니, 아주머니…….”
허칠안은 반복적으로 외쳤다.
‘이 개망나니가…….’
여인은 크게 화를 냈고, 그 바람에 가슴이 벌렁거렸다. 그녀는 표독스럽게 그를 노려보더니 모진 말을 내뱉었다.
“기다리거라.”
그녀는 씩씩거리며 갔다.
* * *
부향은 교방사 영매소각에서 해가 높이 비칠 때가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얇은 면 옷을 걸치고 여종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하고 화장했다.
수행 여종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허 대인께서는 또 일을 처리하러 경성을 떠나시죠?”
부향은 어리둥절하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아하게 여종을 쳐다보았다.
“네가 어떻게 아니?”
여종이 입을 오므리고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어제 침상이 한밤중까지 흔들렸어요. 평소에 허 대인께서는 아가씨를 아끼시잖아요. 절대로 이렇게 늦게까지 엎치락뒤치락하지 않으시죠.”
부향이 성내며 말했다.
“못된 계집애. 담이 점점 커져서는 감히 나조차 놀리다니.”
그들이 시시덕거리는 사이 여종이 갑자기 깜짝 놀라서는 더할 나위 없이 이상한 표정을 짓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가씨……. 흰머리가 생겼어요.”
부향은 서서히 웃음을 거두고 담담하게 말했다.
“뽑아 버리면 그만이지 뭘 그리 놀라고 그래.”
그녀는 화장한 후 여종을 내보내고 혼자 거울 앞에 앉아 요염한 얼굴을 응시하면서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 * *
쾅!
여인은 저상룡의 방문을 밀었다. 그녀는 여종 복장을 한 채 양손을 허리춤에 얹고 화를 내며 말했다.
“야경꾼 관아에 한 놈이 나를 화나게 했어.”
저상룡은 가부좌를 틀고 좌선하며 경맥 내상을 치료하던 중 눈을 뜨고 미간을 치켜올렸다.
“누구입니까?”
여인은 이 순간 오히려 희노(喜怒)를 드러내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
“은라 허칠안.”
그녀는 이미 허칠안에게 여러 차례 무시당했다. 비록 금을 던진 원한은 이미 갚았지만, 지난번에 정사 승려가 무예를 겨루는 걸 구경할 때 그녀의 귀한 몸을 그 자식이 농락하지 않았는가.
왕비는 자신이 아녀자임을 고려해 아주 억울해도 참았는데 이 자식이 그녀를 괴롭히는 데 중독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방금도 그는 그녀를 아주머니라고 모욕하였다.
저상룡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마마를 어쨌습니까?”
“그가 내게 무례하게 굴었네.”
왕비는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여종의 옷차림과 평범한 이목구비도 그녀의 진귀한 기질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너무 과격하게 할 필요는 없네. 무슨 큰일은 아니니 작은 잘못을 경계 삼아 큰 잘못을 막으면 돼.”
그녀는 말을 마친 뒤, 저상룡이 대답하지 않고 미간을 잔뜩 찡그리는 걸 보자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북경에 간다 해도 나는 여전히 왕비네.”
저상룡이 고개를 저었다.
“왕비마마, 오해십니다. 그 자식이…… 이번 북행의 수석 수사관입니다.”
왕비는 작은 입을 벌렸고, 눈빛이 다소 멍했다.
저상룡은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그는 얼마 우쭐대지 못합니다. 제가 그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줄 겁니다. 설령 폐하께서 칙명으로 지정한 수석 수사관이라도 한순간일 뿐입니다. 은라는 은라고, 자작 신분을 더한다 해도 어쨌거나 별 볼 일 없는 인물이지요.”
그는 손에 실권을 쥔 장수이자 진북왕의 부장군으로서 평범한 훈귀, 관원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 * *
어느덧 사흘이 지났다. 일행은 수로를 꽤 안정적으로 항해했다. 이런 대형 관선이 해적을 마주칠 리가 없었다. 규모가 크고, 등급이 높아서 배에 신분이 평범하지 않은 거물이 머물고 있다는 걸 누구나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거물은 종종 고수와 정예 호위병을 동반한다. 일반 해적은 소형 상선만을 상대로 손을 댈 뿐이다. 이따금 규모가 크지 않은 관아 돈선을 습격하기도 한다.
하지만 허칠안을 아주 괴롭히는 일이 있었다. 봄철에 강우량이 넘치고, 강의 물살이 세다 보니 겨울철처럼 잔잔하지 않았다. 그러니 시시때때로 큰 파도를 휘감은 강바람이 불어왔다.
선실에서 묵는 사람들에게는 힘들지만 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선실 바닥에 묵는 금군은 괴로웠다. 이미 여러 명이나 아파서 쓰러졌다.
허칠안이 이날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방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토납하는데 ‘똑똑’하고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허칠안은 미리 발소리를 듣더니 눈을 뜨고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들어오게.”
방문을 잠그지 않아 문이 가볍게 밀렸다. 몸이 굵고 키가 작은 사나이가 문턱을 넘어오더니 머리를 숙이고 읍을 올리며 말했다.
“대인.”
키가 작지만, 체구가 큰 이 사나이는 이번 금군의 우두머리로 백부장 진효(陳驍)였다.
허칠안이 언짢아하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그는 이 저속한 군인이 예의를 모르고 그의 수련을 방해하여 좀 화가 났다.
“대인, 많은 병사가 병났습니다. 대인께서 가서 좀 보시지요.”
진효는 말을 하치고 허칠안의 거절을 두려워하는 듯 성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소직은 전염병이 퍼져 배 위에 계신 대인들에게 위험이 미칠까 봐 두렵습니다.”
이 이유는 허칠안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는 바로 장화를 신고 백부장 진효와 함께 선실 바닥으로 갔다.
쿵쿵…….
허칠안은 진효의 안내를 따라 나무 계단을 밟으며 선실로 들어갔다. 무겁고 맡기 힘든 냄새가 코를 찔렀다. 땀 냄새, 곰팡이 냄새, 암모니아 냄새…….
공기가 통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이 붐비는데 잠을 자고 배설하는 일이 모두 선실 바닥에서 이뤄지니 세균이 번식하고 뱃멀미 때문에…… 체력이 약한 자들은 병으로 쓰러진 것이다.
병에 걸리지 않은 자들 역시 활기가 없어 보였다.
그들은 발소리를 듣자 하나둘씩 쳐다봤다. 병사들은 상급자와 사절단 수석 수사관을 발견한 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침묵을 유지했다.
허칠안은 끊임없이 기침하며 미열이 나는 병사의 침상 곁으로 걸어갔다. 소위 침상은 사실 비좁고 남루한 널빤지로, 이런 선실이어야만 병사 백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별일 아니네. 본관한테 사천감의 해독환이 있고 물속에 한 알만 녹이면 되네. 병에 걸린 모든 자들이 한 모금씩 마시면 고칠 수 있어.”
허칠안은 판단을 내리고 즉시 손을 뻗어 주머니에 넣었다. 옥석경 표면을 가볍게 두드리자 도자기 병 하나가 튕겨져 나왔다.
지서와 주인은 피를 떨어뜨려 주인임을 확인한 후 일종의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물건을 마음대로 뺄 수 있다. 안에 있는 물건이 멋대로 ‘와르르’ 쏟아져 나올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진효에게 해독환 한 알을 주었고, 진효는 빻아서 물주머니 안에 넣은 뒤 병에 걸린 병사들에게 마시라고 나누어 주었다.
사천감의 고급 알약은 즉각적으로 효과가 나타났다. 병에 걸린 병사들은 놀라우면서도 기뻤다. 그들은 폐가 더 이상 아프지 않고, 기침이 수그러들었으며 몽롱한 상태에서 정신이 맑아졌다. 아직 좀 허약한 걸 빼면 몸 상태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할 수 있었다.
“아프지 않아…….”
“나는 좋아졌네.”
“감사합니다, 대인. 감사합니다, 대인.”
나머지 병사들도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허칠안을 바라보는 눈빛에 감동과 열의가 가득했다.
허칠안은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침상 아래의 요강을 힐끗 보았다가 참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꾸짖었다.
“선실 바닥에 움츠리고 뭐 하는가. 왜 갑판 위로 올라가 바람을 쐬지 않는 겐가? 이렇게 엉망진창이니 자네들이 아프지 않은 게 이상하군.”
백 명, 백 개의 변기. 보아하니 부지런히 닦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건 변소 안에 묵는 것과 다름없었다. 본래 공기가 통하지 않고, 봄은 마침 세균이 번식하는 계절인데 어떻게 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좀 더 빨리 부지런하게 매일 요강을 닦고, 매일 밖에서 바람을 쐴 수 있다면 병사들의 체력상 쉽게 앓아눕지 않을 것이다.
“그건…….”
허칠안이 나무라자 진효는 떫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 장군께서 명령하시길 저희는 선실 바닥을 벗어나면 안 되고, 갑판에 올라가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형제들은 평소에 전부 선실 바닥에서 식량을 먹습니다.”
허칠안은 이 말을 듣더니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진효를 응시하며 물었다.
“왜지?”
“저 장군께서 분부하시길 배 위에 부녀자가 계셔 자주 갑판에 가서 산책하고 경치를 감상해야 하는데, 저희가 부녀자에게 실례를 범할까 봐 겁난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거역하면 군장(軍杖) 20대입니다.”
병에 걸린 그 병사는 기침하면서 말했다.
허칠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어두컴컴한 선실 바닥을 훑고 등허리를 꼿꼿이 핀 병사들을 하나씩 훑고 그들의 발 옆에 있는 요강을 훑었다.
공기 중의 습한 악취가 이 순간 백 배는 짙어진 듯 이곳에서 빠져나가고 싶게 했다.
하지만 이 병사들은 이곳에서 잠을 자고 쉬어야 하며 식사조차 이런 환경에서 해야 했다.
진효는 소리 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백 쌍의 눈이 그를 묵묵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