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2화. 관문을 나온 양천환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뽀얀 손에 붓을 쥐고 밀서를 썼다.
“존경하는 주인님! 최근 대봉에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경찰이 끝남에 따라 당쟁이 잠잠해졌고, 위연과 왕 재상은 손을 잡고 하급 벼슬아치의 폐단을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소식을 접했는데, 그들의 다음 목표는 군전(軍田) 착복과 세금 감면을 철저하게 조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허, 두 사람이 손을 잡으니 확실히 조당을 소탕할 수 있겠더군요.
하지만 원경제가 하루라도 수련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는 마치 밑 빠진 독처럼 대봉의 국력을 잠식할 겁니다. 세금 감면 정책은 반드시 저지당할 겁니다. 안심하십시오. 앞으로 10년, 대봉 국력이 바닥으로 치닫는다면 불국은 강력한 동맹국을 잃게 됩니다. 아무리 강대하다고 해도 혼자 힘만으로는 이루기 어렵지요. 만약 다시 산해관전역이 일어난다면 승리를 거두는 쪽은 우리일 겁니다.
참, 주인님께 한 가지 좋은 소식 말씀드릴게요. 사천감이 불문과 두법하는 과정 중에 은라 허칠안이 대승불법 이념을 제시하여 도액 나한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노비가 예상하건대 올해 서방에서 어쩌면 대란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이는 저희가 발붙일 수 있는 틈이에요. 정말이지 재능이 출중한 사내로 장차 앞날이 무궁무진하더군요. 노비가 감히 한마디 여쭙겠습니다. 주인님은 그를 어떻게 안배하실 생각입니까?”
뽀얀 손은 붓을 내려놓고 밀서를 바라보며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 * *
사천감에서 지하로 통하는 돌문이 끽끽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9품 백의 술사가 깊숙한 지하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양 사형, 5일이 이미 지났으니 나오셔도 됩니다.”
몇 초 후, 백의 그림자가 뒷걸음치며 올라오더니 고집스럽게도 뒤통수로 세상 사람을 향해 말했다.
“나 양천환, 드디어 세상에 다시 나오는구나. 누구도 나를 억압할 수 없지.”
“다음에 다시는 어리석은 일을 하시면 안 됩니다. 감정 스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형께서 만약 허칠안을 따라 하고 있다면, 사형을 지하에 가둘 테니 평생 나올 생각하지 말라더군요.”
양천환이 ‘허’하고 소리 냈다.
“내가 그를 따라 할 필요가 있나? 그저 그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했을 뿐일세.”
‘미친놈…….’
9품 술사는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음, 내가 지하에 갇혀 지내는 동안 바깥 세계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
양천환은 뒷짐 지고 서서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여러 일이 있었지요. 천인 간의 전쟁이 이미 끝났습니다.”
백의 술사가 말했다.
그는 바로 깊숙하고 고요한 지하를 쳐다보더니 오사저가 오지 않을 걸 보고 황급히 기관(機關)을 끌어당겨 서서히 돌문을 닫았다.
관성루의 지하에는 감정이 직접 설치한 진법이 있다. 종 사저가 여기에 있으면 액운을 차단할 수 있다. 하지만 평생 지하에서 지내고 싶지 않다면 결국 액운은 넘어야 했다.
‘천인 간의 전쟁이 끝났다고?’
양천환은 좀 애석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원진의 전투력이 아주 사납지. 이묘진은 내가 본 적이 없지만, 생각건대 약자는 아니야. 두 사람이 맞붙은 걸 보지 못해서 정말로 유감스럽구먼.”
그는 뒤통수를 움직이더니 물었다.
“누가 이겼는가?”
그는 명색이 오만한 4품 술사로서 천인 간 전쟁의 승패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
“두 사람 모두 이기지 않았습니다.”
9품 술사가 말했다.
“무승부인가?”
양천환은 이 결과가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긴 사람은 허 공자님입니다. 그가 혼자서 도문 천인 양종의 걸출한 제자와 싸웠고,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두 사람을 물리쳤습니다. 세상에 겨룰 자가 없더군요.”
백의 의사가 말했다.
‘혼자서 도문의 걸출한 제자와 싸워서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두 사람을 물리쳤다니…….’
양천환은 숨이 턱 막혔다. 그는 다년간 사람들 앞에서 과시하던 경험에 빌어 그 속의 현묘한 이치를 체득할 수 있었다.
양천환은 깊이 숨을 마신 뒤 나지막하면서도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 자네 사건의 경위를 내게 자세히 말해 주게.”
“저 역시 주워들은 얘기입니다. 그때 현장에서 관전하지 않았거든요.”
젊은 의사가 말했다.
“천인 간 전쟁을 치른 장소는 경성 교외의 위수였습니다. 말하는 바에 의하면 그때 허 공자님은 낭랑하여 듣기 좋은 칠현금 소리와 함께 작은 배를 밟고 왔다고 합니다…….”
‘머릿속에 장면이 그려지는군…….’
양천환은 눈을 감은 채 상상했다. 인파가 넘치는 양안, 천인 간 전쟁의 두 주인공이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갑자기 하늘을 뚫는 칠현금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깜짝 놀란 사람들은 잇따라 뱃머리에 우뚝 선 형체를 가리키며 말한다.
<야, 사천감의 양 공자님이다!>
“듣자 하니 허 공자님이 시 한 수를 읊었다고 합니다.”
젊은 의사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양천환의 눈빛이 반짝였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양천환은 뒤통수로 그를 이글이글 주시하면서 다소 가쁜 어조로 캐물었다.
“무슨 시? 빨리 말하게, 빨리!”
젊은 의사는 회상하는 태도를 취하고 말했다.
“칼을 옆으로 들고 배를 밟아 위하에 우뚝 서니, 원수를 위함도 은인을 위함도 아니네. 수많은 전투에서 날을 세우지 않는다 스스로 칭하고, 날 때부터 두 눈은 군웅을 멸시하니. 조그만 놈들이 새로운 권력자가 되는 걸 참고 보다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연무대에 올라 주먹을 휘두르네. 단칼에 생사의 길을 가르고, 두 손으로 하늘과 사람을 굴복시키리.”
‘예전 허 공자의 시에 비하면 이 시의 수준은 보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그가 막 이렇게 생각하던 참에 갑자기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젊은 의사는 양천환의 뒤통수를 응시하면서 말했다.
“양 사형?”
“좋은 시야, 좋은 시. 이 시는 그가 그날 오문을 막아서고 읊었던 반궐시 못지않게 훌륭하군. 허칠안이 지은 시 중에 3위에 드는 걸작이라고 할 수 있겠어.”
양천환은 중얼거렸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9품 의사가 손을 내저었다.
“밖에서는 이 시가 아주 평범하다고 말합니다.”
양천환은 비웃으며 말했다.
“그 오합지졸들이 뭘 안다고. 시는 겉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되네. 당시의 상황과 결부하여 음미해야지. 생각해 보게. 온 경성이 천인 간의 전쟁에 관심을 기울이고, 초원진과 이묘진에게 관심을 기울였네. 그런데 일찍이 두법에서 큰일을 이룬 허칠안을 신경 쓰는 사람이 있는가? 없지? 그렇기에 바로 이때 ‘조그만 놈들이 새로운 권력자가 되는 걸 참고 보다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연무대에 올라 주먹을 휘두르네’를 읊은 것이네.”
9품 의사는 잠깐 고민하니 아주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도 뜨거운 피가 끓어올랐다.
“비록 허칠안은 그저 6품 무사고, 초원진과 이묘진의 품계에 훨씬 못 미치지만, 바로 이러한 이유로 ‘단칼에 생사의 길을 가르고, 두 손으로 하늘과 사람을 굴복시키리’라는 구절이 유달리 기세가 드높아 보이는 걸세. 강적을 두려워하지 않는 시인의 담력과 기백 그리고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전진하는 정신이 충분히 드러나지.”
양천환은 청아한 음률로 말했다.
“훌륭하구나!”
백의 술사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양 사형, 박학다식하십니다. 사제가 감탄했습니다.”
양천환은 탄식하며 말했다.
“진정으로 대단한 사람은 허칠안이네. 그는 늘 자신을 방관자의 시점으로 만들어 명성과 인망을 얻지 않는가. 이 점만큼은 내가 그보다 못하네.”
허칠안이 있는데 어찌 양천환을 원하겠는가?
양천환은 허칠안을 안 후로 마음속에 때때로 이런 감회가 들었다.
“허칠안은 늘 이런 기회가 있네. 하지만 나는 기회가 부족해.”
양 사형이 개탄하며 말했다.
“양 사형, 사실 이번 천인 간의 전쟁에서 폐하께서 사람을 보내 사형을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사형을 내보내 두 사람을 저지하고 싶어 하셨죠. 하지만 감정 스승께서 사형이 지하에 갇혔다는 이유로 청을 거절하셨습니다.”
백의 의사가 말했다.
“?”
양천환은 돌처럼 굳어버렸다. 한참 뒤, 그는 큰 충격을 받은 듯 똑바로 서 있지 못했고, 벽에 기대어 천천히 미끄러지더니 두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사, 사제, 이, 이 말이 사실인가?”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당연히 사실이죠. 어찌 사형을 속이겠습니까.”
9품 의사가 대답한 뒤, 쉴 새 없이 머리를 쥐어뜯는 양천환을 보았다.
“양 사형, 왜 그러십니까?”
“머, 머리가 떨리는 듯하네…….”
양천환은 슬프게 울부짖더니 또박또박 말했다.
“감, 감정 스……승님께서 또 나를 망쳤잖나!!”
* * *
이튿날, 허칠안은 교방사에서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에 겸사겸사 종리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곧장 침실로 돌아가 관상하면서 원신의 마지막 피로를 회복했다.
이때 종리가 산발한 채 침상 옆으로 걸어오더니, 작은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흔들며 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양 사형이 왔네.”
‘양 사형이 나를 뭐 하러 찾아왔지?’
허칠안은 눈을 뜨고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는 바로 문을 나섰고, 뒤뜰 돌탁자 옆에 뒷짐 지고 선 양천환을 보았다.
콩알이는 호기심을 갖고 양천환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그러고는 그가 눈치채지 못한 틈을 타 갑자기 그의 앞으로 달려갔고, 빛이 번쩍이는 사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기가 죽지 않은 콩알이는 호시탐탐 양천환의 뒷모습을 쳐다보면서 때로는 왼쪽으로 돌고 때로는 오른쪽으로 돌다가 때로는 비스듬히 미끄러져 그의 다리 아래를 돌파하기도 했다.
하지만 콩알이는 매번 제자리로 돌려보내졌다. 콩알이가 어떻게 노력하든지 양천환의 정면을 볼 수 없었다.
“칠안, 이 자는 네 친구지?”
숙모가 종종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와 구시렁댔다.
“언제 저택에 들어왔는지 모르겠는데 계속 저기에 서서 꼼짝하지도 않더구나.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사천감의 양 사형이에요.”
허칠안이 설명했고, 말을 마친 뒤 양천환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
“양 사형, 무슨 용건이 있어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자네를 보려고!”
양천환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를 보려고요?”
“자네가 여러 번 내 기세를 빼앗고, 내 기회를 빼앗았잖나. 앞으로 나는 시시때때로 자네를 주시할 걸세. 유사한 기회가 오기만 하면 바로 자네 손에서 뺏어 올 거야.”
양천환이 나지막이 말했다.
“언젠가는 감정 스승께서도 틀림없이 아실 것이네. 세상의 변화는 덧없으니 지금 별 볼일 없다고 업신여기면 안 된다는 것을.”
숙모는 즉시 허칠안을 쳐다보고 입을 삐죽거렸다.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허허.”
“마음대로 하시죠.”
허칠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뒤 그는 안뜰로 들어와 목소리를 높여 말하는 문지기 장씨를 보았다.
“첫째 공자님, 몇몇 친한 벗이 찾아왔습니다.”
그가 장씨를 따라 외청에 이르니 앉아서 차를 마시는 금련 도사, 육호 항원, 사호 초원진이 보였다.
“금련 도사, 초 형, 항원 대사.”
‘잉? 금련 도사가 왜 고양이 모습이 아니지…….’
허칠안은 반갑게 인사하고, 장씨에게 과일과 떡을 내오라고 분부했다.
“허 대인, 번거롭겠지만 이묘진과 리나도 나오라고 해 주게. 빈도가 여러분에게 할 말이 있네.”
금련 도사가 미소를 지었다.
허칠안은 그 즉시 안뜰로 돌아가 이묘진과 리나를 불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