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6화. 복명(復命)
* * *
허칠안은 강가에서 이묘진을 끌어안았다. 그는 그 상태에서 온갖 감정이 부풀어 오른 민중들과 눈을 부릅뜨고 말을 잇지 못하는 강호 인사들, 그리고 각기 표정이 다른 얼굴을 하나씩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투명 날개를 흔들며 이묘진을 안고 하늘로 날아갔다.
초원진은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머릿속에 역시 시 한 구절이 메아리쳤다.
<오늘 그대에게 보여 주니, 누구 불공평한 일 있는가?>
이는 허칠안이 그의 귓가에 대고 말했던 후반궐(后半闕) 시였다.
그 찰나, 초원진은 벼락을 맞은 듯 온몸이 알 수 없는 전율에 사로잡혔다. 그리하여 그는 검을 쥔 손을 풀고, 더는 천인 간 전쟁의 승패에 집착하지 않았다.
“오늘 그대에게 보여주니, 누구 불공평한 일 있는가…….”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는 수년 동안 검을 길러 왔다. 검이 세상에 나가는 날, 반드시 재주를 한껏 뽐내어 나를 막을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으리라 여겼다……. 나는 본래 천인 간의 전쟁에서 검을 뽑아 이묘진을 격파하고 검을 전수한 인종의 은혜를 갚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틀렸다. 아주 터무니없이 틀렸다. 이묘진은 의협심을 발휘하여 의로운 일을 하고, 품행이 단정하기에 내 검에 죽어서는 안 됐다. 나의 개인적인 사심으로 선량한 사람을 죽이면 장차 틀림없이 마음이 악한 자가 되어 일생을 마음에 담아 둘 것이다…….
허칠안이 나를 구제해 주었다. 그가 그날 고심 끝에 다음 반궐을 읊지 않았던 건 오늘을 예측했기 때문일 터……. <오늘 그대에게 보여주니 누구 불공평한 일 있는가>! 이야말로 내가 검의를 키우는 초심이거늘…….’
초원진은 속으로 개탄하며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멀리 가는 허칠안의 뒷모습을 향해 깊이 공수했다.
“자네들 보게. 초원진이 패배를 진심으로 인정하는지 허 은라에게 공수까지 했네.”
“허 은라는 정말 하늘이 내린 천재야.”
민중들은 상대를 굴복시킨 허 은라를 보고 아주 기뻐했다.
* * *
‘얼른 달아나자. 달아나지 않으면 모두가 유가 법술에 반격당하는 내 모습을 볼 거라고. 이미지가 완전히 실추된단 말이야…….’
허칠안은 필사적으로 투명한 날개를 흔들어 경성을 향해 돌아갔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번 천인 간 전쟁의 이해득실을 돌이켜 보았다.
“금강신공이 원하는 대로 소성경(小成境)에 도달했으니 4품 전까지는 더 이상 정진이 없겠지……. 장점은 나의 방어력이 4품 무사와 필적할 만하거나 더 강하다는 부분이다. 물론 실제 전투력은 그 격차가 아주 크지만. 대유들이 내게 선물한 ‘마법서’를 다섯 쪽 사용했다. 도문 금단이 기록된 페이지, 불문 계율이 기록된 페이지, 유가의 언출법수가 기록된 두 페이지. 음, 또 한쪽은 이묘진한테 찢겼지…….
손해가 좀 막심하군. 운록서원에 다녀올 방법을 생각해야겠다. 좀 더 무임승차 해야겠어. 이런 도구를 대유들이 얼마나 쌓아두고 있는지 모르겠으니……. 금련 도사가 또 내게 보물을 하나 빚졌으니 나중에 그에게 달라고 해야지. 이번에 천인 간 전쟁의 개입을 강행한 건 인종 쪽에서는 좋은 일이겠지. 어쨌거나 낙옥형 역시 수혜자니까. 천종은…….”
허칠안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묘진을 쳐다보면서 그녀의 얼굴을 툭툭 치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웃으며 말했다.
“정말 예쁘구먼. 하하…….”
그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어깨가 떨렸다. 그는 숨을 쉴 수 없어지면서, 투명한 날개가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내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이 동반되더니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곧장 아래로 떨어졌다.
의식의 끝자락에서 그는 이묘진을 품속에 꽉 끌어안고 천종 성녀가 떨어져 죽지 않도록 보호했다.
* * *
낙옥형은 오늘 영보관에서 도를 닦을 마음이 없었다. 때로는 다구를 만지작거리고 때로는 도경을 들추기도 하고 때로는 정원에 서서 담 너머 쪽빛 하늘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기도 했다.
원경제는 눈치껏 그녀를 찾아와 도를 닦고 토납하자고 하지 않았다.
영보관 내의 제자는 감히 말을 하지 못하고 작은 소리로 걷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영보관은 답답하고 긴장된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때 검을 멘 한 청삼 남자가 묵묵히 영보관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대전, 화원을 지나 도관 깊숙한 곳으로 걸어갔다.
“초원진 돌아왔는가?”
“천인 간의 전쟁이 끝났군……. 초 형, 졌습니까, 이겼습니까?”
“초 형, 이묘진을 격파했습니까?”
억눌린 분위기가 깨졌다. 인종 도사들은 소식을 알아보러 와서는 초원진을 둘러싸고 물었다.
초원진이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졌네.”
중구난방 떠들던 소리가 뚝 그쳤다. 인종의 도사들은 어리둥절하여 서로 쳐다보며 부모를 잃은 듯 슬퍼했다.
초원진은 비관적인 도사들을 상대하지 않고 곧장 낙옥형의 소원으로 걸어갔다. 방보가 뜰로 들어가자 선녀처럼 아름답고 청아한 여인이 연못가에 선 모습이 보였다.
“국사.”
초원진은 읍하고 인사했다.
낙옥형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는 이미 결말을 안다네. 자네가 검을 빼지 않은 데는 자네만의 이유가 있겠지. 자네를 탓하지 않겠네. 인종은 황조의 기운을 빌려 도를 닦으니 팔자가 이렇게 짧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네. 이는 하늘이 정하는 것으로 누구도 바꿀 수 없어…….”
‘나는 졌다고 말했을 뿐이지, 이묘진이 이겼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내가 지금 일의 경위를 확실히 말해야 하나? 이긴 자는 허칠안이라고 그녀에게 알려야 할까……? 국사한테 뺨 한 대 맞고 죽을 것 같은데…….’
초원진은 속으로 망설였다.
낙옥형이 그의 기괴한 표정을 보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자책할 필요 없네. 내가 말했잖나. 이 일로 자네를 탓하지 않을 거라고.”
……초원진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국사, 저는 이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묘진 역시 이기지 않았지요. 왜인지 모르겠으나 허칠안이 도중에 뛰어들어 천인 간의 전쟁에 개입을 강행하였고, 저와 이묘진을 격파했습니다. 천인 간의 전쟁은 사실…… 아직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낙옥형은 어리둥절하며 아름다운 눈동자에서 밝은 빛을 내뿜었다. 그녀는 초원진을 바라보면서 입술을 오므리더니 말했다.
“허칠안이 천인 간의 전쟁에 개입하여 자네와 이묘진을 이겼다고?”
초원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그가 왜 갑자기 나섰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는 속으로 좀 짐작이 갔다. 금련 도사가 암암리에 종용했으리라. 이유는 천지회 구성원끼리 생사를 마주하는 일을 피했으면 해서다. 하지만 그는 이 추측을 낙옥형에게 알릴 수 없었다.
“그가 어떻게 자네를 격파했는지 자세히 말해 보게.”
낙옥형은 그를 쳐다본 뒤 다양한 종의 꽃이 핀 화단으로 시선을 옮겼다.
초원진은 국사가 단숨에 마음이 환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치 정원에서 아름다움을 다투는 꽃과 같던 방금까지의 심각함이 더는 없었다.
“사실 그가 저와 이묘진을 격파할 때 외력을 빌렸더군요. 그에게는 수많은 법술이 기록된 유가의 책자가 한 권 있었습니다. 허나 도검과 법기 역시 외부 물건이니 진 건 진 거지요.”
초원진이 너그럽게 말했다.
낙옥형은 침음하며 말했다.
“유가 법술에만 의존해서는 자네와 이묘진을 이기기에 역부족이네.”
그녀의 어조는 아주 진중했다.
초원진은 이 문제를 듣더니 표정이 갑자기 이상해졌다. 그는 낙옥형의 경국지색 미모를 바라보면서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마침 이 일로 국사께 가르침을 청하려 합니다만…….”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해할 수 없고, 믿기 어렵다는 어조로 말했다.
“허칠안이 금강신공을 소성 경지까지 끌어올렸습니다. 제가 검을 뽑지 않은 건 근본적으로 그의 방어를 뚫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허나 국사, 그가 금강신공을 수련한 지 한 달 남짓인데 어떻게 이 정도까지 해낼 수 있단 말입니까?”
이런 상황은 결코 ‘하늘이 내린 천재’라는 한 마디로 형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초원진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액 나한이 허칠안을 불자라고 성명했거나 혹은 또 다른 의의가 있는 듯했다.
예컨대 불문 고승이 환생한 몸이라든가 말이다.
낙옥형은 웃더니 말했다.
“며칠 전에 고양이 한 마리가 본좌를 찾아와 청단 한 알을 부탁하면서 나 대신 천인 간의 전쟁을 늦춰 줄 수 있다고 말하더군.”
‘고양이 한 마리라…… 묘요(描妖)? 아니야. 묘족은 황성에 들어오지 못하니 더욱이 영보관에 들어올 수 없는데……. 고양이의 몸으로 영보관에 들어올 수 있고 국사와 천인 간의 전쟁을 논할 수 있는 상대는 국사의 전우거나 도문 사람이겠지…….’
초원진은 아주 똑똑하고 분석에 능했기에 바로 의심 갈 만한 인물을 특정 지었다. 금련 도사!
이에 그가 다시 연상을 펼쳐보니 허칠안이 천인 간 전쟁에 억지로 개입한 이유를 설명하기 쉬웠다. 금련 도사의 꼬드김때문이었다.
초원진은 청단의 약효를 알았다. 그는 전투할 때 허칠안이 득의양양하게 자신과 이묘진이 그를 대신해 몸을 단련해 주었다고 저도 모르게 말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는 모든 일을 문득 깨달았다. 금련 도사와 국사는 모종의 거래를 성사했다. 전자는 천인 간 전쟁을 지연시키는 일을 도와주고, 후자는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했다.
그리고 이 대가는 틀림없이 청단에 그치지 않을 터였다. 금련 도사가 청단을 허칠안에게 준 데는 또 다른 꿍꿍이속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허칠안의 금신이 갑자기 비약적으로 발전한 원인은 청단 복용이라 할 수 있었다.
‘허칠안이 나와 이묘진을 이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 국사의 놀라움은 시늉이 아니야……. 음, 그녀가 이 거래에 대해 자신이 부족했다는 의미군…….’
초원진이 읍하고 말했다.
“이묘진이 금신을 부수기 전에는 천인 간 전쟁을 다시 도발하지 않을 겁니다. 국사, 안심하셔도 돼요.”
낙옥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원진은 더는 오래 머무르지 않고 작별을 고하고 떠났다.
그가 가고 오래되지 않아 황갈색 고양이 한 마리가 담벼락 위로 뛰어 올라와 호박색 눈동자로 낙옥형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가 정말 이 정도까지 해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낙옥형이 가볍게 탄식하며 말했다.
“내 짐작이 정말 사실이었다는 의미지. 그는 몸속에 비밀을 감추었네.”
황갈색 고양이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날 무덤에서 도망쳐 나왔을 때 그가 내게 말하길 시체를 이길 수 있던 이유는 감정이 그의 몸속에 여지를 남겨 놓아서라고 하더군. 허허, 그는 내가 보통의 지종 도사라 그의 허튼소리를 믿는 척하는 줄 알지.
그날 우연히 그의 금신이 아주 빠르게 정진하는 모습을 보고 내 의혹이 점점 더 깊어졌네. 그래서 기회를 틈타 그가 나서게 종용하고 그의 육신이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강한지 좀 보고 싶었네. 그가 자발적으로 청단을 요구하여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약효를 흡수하고 금강신공을 소성으로 끌어올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
낙옥형은 눈알을 굴리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황갈색 고양이를 주시했다.
“사형은 무슨 짐작을 하셨습니까?”
황갈색 고양이는 침음하면서 말했다.
“그에 관한 관찰과 감정의 안배를 통해 나는 그자 몸속의 비밀이 불문과 관련 있다는 의심이 생겼네. 자네는 감정이 그를 지명해 두법에 참여하게 한 일이 이상하지 않은가? 마치 일부러 그를 불경에 들어서게 해 금강신공을 수련하게 한 것 같잖나.”
“이상하지는 않습니다만 사형께서 말씀하신 것들과 결부하고, 여러 정황이 한데 모이니 간단한 문제가 아닌 듯하군요.”
낙옥형이 잔잔한 연못 수면을 바라보면서 눈동자를 크게 뜨고 시선을 흐트러뜨렸다. 그녀는 생각에 잠기면서 말했다.
“불문 역시 한몫 끼려고 온 거지요?”
황갈색 고양이가 허허허 웃으며 말했다.
“감정의 바둑돌, 불문의 불자 그리고 기이한 기운 동반. 사매, 자네가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나중에 그자가 자네와 꼭 쌍수한다는 보장을 할 수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