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타경-413화 (413/712)

413화. 소소 집안의 지난 일

소소는 허부에서 양기(陽氣)를 차단하는 붉은 우산을 받쳐 든 채, 처마에 앉아 마당 안에서 기마 자세를 하는 콩알이를 바라보았다.

건넛방에서는 이묘진이 허씨 집안 마님 그리고 소저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숙모와 허영월은 집에 묵는 손님이 또 있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아주 좋지 않았다.

숙모는 계속 이렇게 가다간 집이 자선 단체로 변하겠다고 생각했다. 혀영월은 이 여인이 지나치게 예뻐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다.

장포를 입은 여인 외에, 눈처럼 하얀 옷을 입은 바깥의 그 여인도 정말이지 허영월을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그녀는 외모로만 보자면 자신이 아무런 승산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약간 부족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묘진이 허칠안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을 들은 후에 숙모와 허영월은 바로 태도를 바꾸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환영의 말을 더했다.

“허씨 집안은 역시 무사 명문다워요. 보아하니 둘째 여동생이 나이가 아직 어린데 무술 연마의 기초를 닦기 시작했더군요.”

이묘진은 의외로 세상 물정을 아주 잘 알았다. 그녀는 잡담을 나누는 일 외에 상대를 치켜세우는 일도 잊지 않았다.

숙모는 듣기만 해도 속상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저는 그녀가 몇 년간은 공부할 수 있길 바랐지요. 거문고, 바둑, 글, 그림에 통달하는 건 둘째 치더라도, 적어도 교양이 있고 사리에 밝았으면 했는데 안타깝게도 바보예요.”

‘그 아이가 아주 천진난만하기는 하지만 어째서 바보라고 하지? 허칠안의 사촌 동생이 운록서원 제자인데 여동생에게 공부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니?’

이묘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제가 허부에 묵으면서 짬이 있다면 아이의 계몽을 도울 수 있습니다.”

허신년은 학업이 과중해 어린 여동생의 공부를 지도할 마음이 없다. 그녀는 허칠안과 허평지는 무사이니 허씨 집안의 둘째 딸이 무술을 연마했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클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한동안 아이를 가르친다고 해도 일을 지체하지는 않는다.

숙모는 어리둥절해하며 거절하려던 참이었는데 누가 알았을까. 허영월이 미소를 머금고 한발 빠르게 응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정말 감사하죠, 이 도사님.”

이묘진은 웃는 모습이 부드럽고 청초한 소녀에게 호감이 생겨 미소로 답했다.

“별거 아니야.”

그녀는 말을 마친 뒤 허씨 집안의 마님이 자신을 보는 눈빛 속에 연민과 동정이 더해졌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 * *

“언니, 언니, 언니는 정말 귀신이에요?”

허영음은 기마 자세를 취한 채, 짧고 굵은 두 다리를 조금씩 떨면서 고개를 치켜올리고 처마 위의 소소를 바라봤다.

“그래. 나는 사람을 잡아먹는단다. 안 무섭니?”

소소가 겁을 주었다.

“무서워요!”

허영음은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소소는 헤헤 웃더니 약간 의기양양했고, 입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쪽빛 하늘을 보며 멍하니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당 안에 있던 크고 작은 두 여자아이가 사라졌다.

“언니, 언니…….”

외치는 소리가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소소가 고개를 숙여서 보니, 꼬마 여자아이가 처마 밑에 서서 고개를 쳐들고 흑백이 분명한 눈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내려올 수 있어요?”

꼬마 여자아이가 말했다.

소소는 하늘하늘 마당에 내려와 허영음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면서 불쾌한 기색으로 말했다.

“왜.”

허영음은 말을 하지 않고 따라오라는 의미로 그녀에게 수상쩍은 손짓을 했다.

소소는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따라갔더니 부엌에 이르렀다. 곧 밥 짓는 연기가 확 풍겼다. 콩알이는 열심히 문턱을 넘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언니 오세요.”

부엌 안에서는 리나가 불을 지폈고, 솥 안에는 뜨거운 기름이 끓었다. 허영음은 소소를 솥 옆으로 끌고 가 얼굴을 들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언니 혼자서 기어들어 갈 수 있어요?”

소소는 갑자기 표정이 굳었다.

* * *

허칠안은 퇴근하고 저택으로 돌아와 이묘진을 숙부에게 추천했다. 숙부는 본래 조카의 친구인 줄 알고, 손윗사람 티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침착하게 입을 뗐다.

“이 도사께서는 어디에서 도를 닦으십니까.”

“그녀가 바로 천종 성녀, 천인 간 전쟁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이에요.”

허칠안이 덧붙였다.

“…….”

숙부는 하마터면 일어나서 인사할 뻔했다가 큰 소리로 외쳤다.

“성녀 각하를 뵙습니다!”

“그녀는 저와 운주에 있을 때 만났는데…….”

허칠안이 간단하게 설명했다.

숙부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음속이 아주 편치 않고, 생각이 들끓었다.

‘뜻밖에도 칠안이 천종 성녀와도 아는 사이라니. 그의 인맥이 갈수록 넓어지고, 실력 역시 점점 높아지는구나. 하지만 나는 이제야 막 연신경을 돌파했다고……. 참 전도유망하다.’

숙부는 흐뭇하면서도 자신과 조카의 차이가 점점 더 벌어진다고 생각하니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솟구쳤다.

그는 다시 아들을 보았다. 이 자식이 전시에 참가하면 명실상부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가 된다. 아들은 칠안처럼 그렇게 급진적으로 발전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벼락출세한 뛰어난 인재였다.

‘그래도 조상님들께 면목이 서는군……. 형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그의 아들과 조카가 이렇게 용 된 걸 보지 못하셨다는 점이 애석하구나…….’

이때 허신년이 나지막이 말했다.

“형님, 왕씨 집안 소저가 저한테 또 호수를 유람하자고 했어요.”

‘왕씨 집안 소저가 우리 집 신년을 좋아하나?’

허칠안은 마음이 움직였고, 자신의 추측을 점점 더 확신했다.

과거 부정행위 사건 때, 왕씨 집안 소저가 그에게 ‘몰래 소식을 알려’ 주었고, 내용도 사실이었다. 이는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이 순간, 그 일이 호수 유람에 두 차례 초대됐다는 사실과 결부되면서. 왕씨 집안 소저가 신년에게 마음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집중 공세까지 한다는 점을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허칠안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웃으며 말했다.

“너는 동의했고?”

허신년은 ‘허’하고 소리 내며 말했다.

“전시가 곧이라는 이유로 거절했어요.”

“잘했어, 신년…….”

허칠안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칭찬하며 말했다.

“우리들의 본보기구나.”

허칠안은 괴상야릇하게 허신년을 비웃었다.

‘우리들의 본보기? 어휘 사용이 적절치 않은데. 허, 교양 없는 형님 같으니라고…….’

허신년 역시 속으로 허칠안을 비웃었다.

* * *

허칠안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이묘진의 방 밖에 가 문을 두드리려는 참이었는데 안에서 소소가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이 집 꼬마 아이 너무 무서워요. 그, 그 아이가 저를 먹고 싶은지 솥 한가득 기름을 달궜더라고요.”

“아이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고, 행동도 그러하니 신경 쓸 필요 없어.”

이묘진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충 대꾸했다.

“아니에요. 그 아이가 농담하는 게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사람을 압박하는 그 빛나는 눈빛은…….”

소소는 몇 마디 내뱉은 뒤, 이묘진이 흥미 없어 보이자 화를 내며 ‘흥’하더니 소리쳤다.

“못난 남자, 대인 여동생이 저를 잡아먹으려고 해요.”

말이 끝나자마자 방문이 저절로 활짝 열렸고, 소소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잔뜩 성이 나서 그를 노려보았다.

‘아, 그건……. 나 생각났다. 숙모가 콩알이에게 귀신은 튀기면 맛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 이 미련한 꼬맹이가 곧이곧대로 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오래 기억했다고? 이 기억력이면 분명 영어 단어를 외워도 여유가 남을 텐데 어째서 삼자경은 외우지 못할까?’

허칠안은 속으로 빈정대면서 화제를 돌렸다.

“소소, 만약 내가 네 요구를 두 개 들어 준다면 3년 동안 내 첩 노릇을 하겠다고 말했던 일을 기억하는데.”

이묘진은 이 말을 듣더니 소소를 매섭게 노려봤다.

여인의 기품을 논하자면, 주인보다 더 아름답고 더 매력적인 농염한 귀신이 허리춤에 양손을 얹고 말했다.

“맞아요! 대인이 저한테 육신을 다시 빚어 주고, 저 대신 그해 아버지가 무슨 이유로 참수당했는지 조사해서 밝혀 준다고 했잖아요. 저는 3년 동안 첩 노릇을 하는 건 물론 대인께 아들을 낳아 드릴 거예요.”

사실 그녀가 첩을 하고 안 하고는 상관없었다. 허칠안이 애당초 그녀의 말에 응한 건 여자 귀신을 얕보자니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지금 기왕 이묘진이 경성에 왔으니 그도 그때의 약속을 잊지 않을 것이다.

물론 소소가 굳이 보답하겠다고 하면 첩 노릇도 가능하지 않겠나?

그는 입으로만 허풍떨더니 이묘진을 쳐다봤다.

“먼저 여러분이 아는 모든 정보를 말씀하시지요.”

주인과 종 두 사람의 표정이 진지해졌고, 이묘진이 말했다.

“소소는 강주에서 태어났네. 부친은 강주 지부였는데 원경 15년에 단죄되어 참수당했고, 집안의 안식구들은 교방사로 편입됐지. 성격이 강직한 어머니는 교방사에 들어가 기녀가 되길 원치 않았어. 그래서 독주 한잔으로 모든 안식구를 독살했고, 그중에 소소도 포함되네.

허나 그해 그녀한테 외지에서 공부하고 있는 어린 남동생이 있었기에 다행히 화를 면했어. 이번에 경성 길에 그 해 일을 좀 조사하고 싶어서 내가 소소를 데리고 우회하여 강주에 갔네. 이상한 일을 발견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지만.”

“이상한 일?”

허칠안은 의자를 끌어와 앉았고, 소소에게 물을 따르라고 분부했다.

‘아직 네 첩이 아닌데 이렇게 사람을 부리다니…….’

농염한 귀신 소소는 짜증 섞인 눈으로 그를 보더니 얌전히 물을 따랐다. 어쨌거나 지금 얘기하는 건 그녀 집안의 일가 전멸 사건이지 않은가.

그녀는 이 남자의 도움에 의지해야 한다. 그녀와 주인 이묘진만으로는 10년 동안 조사해도 사건의 연유를 조사해낼 수 없었다.

허칠안이 차를 한 모금 마시자 이묘진이 얘기했다.

“소소의 부친은 소항(蘇航)이라고 하는데 정덕(貞德) 29년의 진사로, 원경 14년에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강주 지부로 좌천됐다가 이듬해 참수당했네. 죄목은 뇌물 수수였지.”

허칠안이 찻잔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었소?”

“있었네.”

이묘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소소를 쳐다봤다.

“그녀는 자신이 경성에서 지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해. 소소의 영혼은 온전하네. 내 스승님이 그녀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공동묘지의 음기를 흡입하며 도를 닦고 있었네. 이미 상당한 성취가 있었기에 공동묘지를 떠나지 않는 이상 영원히 살 수 있었지. 이런 수련 경지의 원혼은 기억을 빠트리지 않아. 그녀 생전에 기억이 지워지지 않은 이상은.”

소소가 말했다.

“어쩌면, 어쩌면 저는 정말 경성에 온 적이 없는지도 몰라요.”

허칠안이 고개를 저었다.

“무릇 입성하여 관리가 되려면 가족 모두 경성으로 거처를 옮겨야 하오. 나는 소소 낭자의 생전의 기억에 문제가 생겼다는 데 추측이 더 기우는구려. 음, 재미있구먼.”

두 사람과 귀신 하나가 잠시 침묵했고, 허칠안이 말했다.

“경관이니 이부에 그의 자료가 있을 것이오……. 이부는 왕 재상의 근거지고, 그와 위연은 정적이니 충분한 이유가 없는 한, 나는 이부의 안독을 열람할 권리가 없소. 그러므로 여러분은 조급해하지 말고, 기회를 기다리시오.”

이묘진과 소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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