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화. 낚다
손님을 대접하는 대청 안. 허칠안은 의자에 앉은 채 여종이 우려 준 차를 손에 받쳐 들었다. 발 옆에는 무릎 높이만 한 포대 자루가 세워져 있었다.
몇 분간 조용히 앉아 있다가 귓바퀴를 살짝 움직이자 비늘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저상룡이 문턱을 넘어 곧장 안으로 들어왔다.
“저 장군님과 조국공께서 도와주시어 감사드립니다.”
허칠안의 이 말에는 성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일어서지도 않고, 말하면서 차를 마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상룡은 전혀 개의치 않고, 그를 쳐다보더니 허칠안 발 옆에 있는 포대 자루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물건은?”
허칠안이 찻잔을 내려놓고 포대를 열자 석조 불상이 드러났다. 조각 솜씨가 아주 형편없었는데 초보자만도 못했다.
저상룡의 눈빛이 순간 뜨거워졌고, 반짝이는 눈으로 불상을 주시했다. 비록 보잘것없이 조각하여 생김새가 윤곽 하나뿐이었지만, 있는 듯 없는 듯한 불운(佛韻)은 비범함을 깨닫게 했다.
“금강신공의 심오한 뜻을 제가 불상 안에 복제했습니다. 수련해 낼 수 있는지 없는지는 장군의 몫입니다.”
허칠안이 말했다.
“물론이네.”
저상룡은 눈빛을 거두고 허칠안을 쳐다보면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신용을 지키는 사람이군.”
‘허, 내가 신용을 지키지 않았다면, ‘일개 은라가 감히 이랬다저랬다 번복하다니. 위연이라고 해도 자네를 지킬 수 없을 거야!’라고 말하지 않았겠어?’
허칠안은 속으로 냉소를 지었으나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사실 이 공법 그 자체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저 장군께서 뜻이 있었다면 저는 은자 오백 냥에 팔았을 겁니다. 그렇게 번거로울 필요 없었지요.”
저상룡은 걸어오더니 포대 자루로 불상을 잘 싸고 손에 든 뒤 야유와 조롱이 뒤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잔꾀를 부려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나는 오백 냥을 쓸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네. 물론, 불문 금신은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지만. 허 은라 잘 가게. 배웅하지 않겠네.”
‘불문 금신은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다니. 나는 네가 돈을 쓸 자격이 부족하다는 말이잖아…….’
허칠안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푸른 산은 변치 않고, 푸른 물은 오래도록 흐르리.”
그는 돌아서서 갔다.
* * *
그가 막 뜰에 도착하자마자 여종 하나가 황급히 걸어와 말했다.
“허칠안, 허 은라십니까?”
“소생입니다.”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께서 대인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여종이 말했다.
‘진북왕비가 나를 만나려 한다고? 대봉의 제일 미인이 나를 만나려 한다고? 이거…….’
허칠안은 오랫동안 명성을 누리고 있는 그 여인이 몹시 궁금했다.
‘어쨌든 한 번 만나는 것뿐이니 별 탈 없겠지…….’
허칠안은 웃으며 말했다.
“누님께서 길을 안내하시죠.”
* * *
여종은 허칠안을 데리고 구불구불한 회랑을 지나고, 뜰과 화원을 지나쳤다. 그들은 일각을 걸은 뒤에야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그곳은 사방에 휘장이 드리워진 정자였다.
아름다운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녀는 손에 책을 한 권 쥔 채 침상식 의자에 앉아 있었다.
허칠안은 그녀의 용모를 제대로 보고 싶어서 최선을 다했지만, 곧 휘장 뒤에 면사포가 한층 더 있는 걸 알아차렸다.
“자네가 바로 허칠안인가?”
휘장 안에서 성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가움 속에 자성을 띠고 있었다.
‘얼굴은 잘 안 보이지만, 목소리는 아주 듣기 좋군…….’
허칠안이 읍하며 말했다.
“왕비께서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는지요?”
정자 안의 여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듣자 하니 자네가 오문 밖에서 혼자 백관을 막아서고 시를 지어 풍자했다던데, 이런 일이 있었는가?”
허칠안이 말했다.
“젊은 놈이 방정맞게 순간 충동적이었습니다. 송구스럽습니다.”
‘너도 송구한 마음이 든다고? 퉤!’
정자 안의 여인이 잠시 침묵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손님을 배웅하거라.”
‘고작?’
허칠안은 좀 망연자실하여 정자 안의 여인을 바라보았고, 돌아서서 여종 뒤를 따랐다.
바로 이때, 정자 안에서 갑자기 누르스름한 물건 한 덩이가 나오더니 ‘쿵’하고 허칠안의 등을 내리쳤다.
“왕비께서는 왜 저를 내리치십니까?”
허칠안은 몸을 돌려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있는 황금을 쳐다봤다. 그는 위험에 대한 신각의 경고를 받지 않았다. 이는 방금 위기가 없었다는 걸 의미하지만 그는 좀 화가 났다.
정자 안의 여인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허칠안의 눈에 의문이 스쳤으나, 왕비가 설명하지 않자 그는 몸을 굽혀 황금을 줍고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자신의 주머니 속에 넣었다.
“다음에 왕비께서 저를 내리치시려면 금 벽돌을 쓰셔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허칠안은 한마디 비꼬더니 여종을 따라나섰다.
* * *
저상룡은 조용한 침실 안에서 문과 창문을 꼭 닫고, 석조 불상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채 정신을 집중하여 한참을 관찰하였다. 불운이 흘러 절묘하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느끼고 깨달았든 간에 이 속에서 공법을 흡수할 수는 없었다.
“불문의 금강신공은 역시 일정한 기연과 불법의 기초가 필요하구나. 허칠안이 금강불패를 수련해 낼 수 있었던 건 확실히 천부적인 자질이 덕분이다. 허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근본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이니 잔꾀를 부려 얌전히 통제에 순응하도록 했군.”
저상룡은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우쭐하면서도 경멸하는 냉소를 지었다.
무슨 천재 무사고 천부적인 자질이 진북왕보다 뛰어나다느니. 그래도 만약 암중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가 무슨 근거로 불문 나한과 두법했겠는가.
그를 추켜세우는 그런 유언비어 중에서 저상룡이 가장 반감이 들고 싫어하는 게 그를 대왕과 비교하는 말이다.
일개 쾌수 출신의 은라, 군호(軍戶) 출신의 비천한 자인 그도 어울린다고?
“금강신공을 제외하고는 이자한테서 쥐어 짜낼 수 있는 이익이 적어 딱하구먼. 안 그랬으면 과거 부정행위 사건에서 그의 모든 가치를 한 번에 짜냈을 텐데 말이야.”
저상룡과 조국공이 금강신공을 꾀한 데는 이유가 있다. 그들의 신분, 지위 및 식견으로 어찌 금강신공의 심오한 이치를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저상룡은 젊은 나이에 입대하였는데, 여러 해 전에 군대를 따라 도적 떼를 토벌할 때 서역에서 온 행인을 마주쳤다.
그 행인은 불법으로 굶주린 도적 떼를 감화하려 했으나 도리어 도적 떼에게 납치당했고, 그들은 행인을 잡아먹으려 했다.
저상룡이 행인을 구했다.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행인은 그에게 청동 부적을 선물하였다. 이 부적에는 불문이 가득 새겨져 있었으며 불운이 흘렀다. 그는 몸에 부적을 찰 때마다 마음이 평온해지고 악기가 전부 사라지면서 불문의 참뜻을 깨달은 듯한 상태에 들어서는 듯했다.
매번 전쟁에서 서로 싸우고 죽이고 난 뒤, 저상룡은 그 부적을 몸에 차고 악기를 없애고 현묘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불법을 깨닫곤 했다.
끽…….
그는 침상 서랍을 열고 작고 정교한 단향목 상자 하나를 꺼냈다. 상자 뚜껑을 여니 붉은 비단에 싸인 손바닥 크기만 한 청동 부적이 있었다.
“내가 불문 사람은 아니지만, 이 부적은 심오하고 신비로우니 내가 어떠한 깨달음 상태에 들어가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이걸 빌려 금강신공의 현묘함을 깨달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일단 금강불패를 수련해내면 전투력이 한 단계 이상 향상될 것이다. 관건은 평범한 무사를 능가하는 육신은 내가 전쟁터에서 더 잘 살아남을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청동 부적의 힘을 빌려 금강신공을 수련해낼 수 있다면, 왕야의 인정도 가능하다. 그때 가면 반드시 나를 거듭 칭찬하실 거야.”
저상룡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눈빛이 불타올랐다. 그는 바로 불상을 깨닫지 못하는 점이 한스러웠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십여 분의 시간을 쏟아 감정을 가라앉힌 뒤 파동이 일지 않도록 마음을 평온하게 했다.
그런 다음 그는 청동 부적을 움켜쥐고 명상하였다.
서서히 그는 광대하면서 온화한 기운을 감지했다. 이 덕에 그는 머리가 맑아지고, 모든 욕망과 감정을 냉정하게 살피면서 더는 잡념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다.
저상룡은 이런 상태에 들어선 후 눈을 뜨고 석상의 불운을 관찰하는 데 집중했다.
이번에 그는 불상이 움직이면서 각양각색의 자세로 변화하는 모습을 똑똑히 봤다. 자세마다 다른 행기(行氣) 방식을 동반했다.
‘정말 되네…….’
저상룡은 미친 듯이 기뻐하다가 하마터면 ‘속세에 태연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할 뻔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석상의 자세와 그 독특한 행기 방식을 모방하려 시도했다.
미간이 금칠로 반짝이며 빠르게 그의 몸을 뒤덮었다.
갑자기…… 체내의 기기가 영향을 받았다. 마치 화산이 용암을 분출하는 것처럼 그의 경락과 단전에 충격을 가했다.
푹!
저상룡은 선혈을 토해 냈다. 그는 몸 표면의 혈관들이 파열되고, 단전도 난폭한 기기에 의해 터지면서 중상을 입었다.
그의 얼굴이 갑자기 붉게 상기되면서 콩알만 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가 고개를 숙여 자신을 돌아보니 팔뚝의 금칠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청동 부적도 안 된다는 말인가…….”
저상룡은 이런 생각이 스치자 두 눈을 뒤집어 까면서 기절했다.
* * *
반 시진이 흐른 뒤, 저상룡의 심복이 그를 찾으러 왔다가 마침내 기절하여 숨이 간들간들한 그를 발견했다.
“자객이 있다, 자객이 있어…….”
* * *
진북왕비는 시위의 보고를 다 듣자, 마음속의 기쁨을 억누르며 물었다.
“무술을 연마하다가 사도에 빠졌느냐? 멀쩡히 있다가 어째 사도에 빠졌는고.”
시위가 고개를 저었다.
“소직은 모르옵니다.”
진북왕비는 기쁨에 겨워 말했다.
“죽었는가?”
시위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생명에는 문제없으나 중상을 입었습니다. 사천감 술사가 말하길 한 달은 침상에 누워 지내야 회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너무 늦게 발견하여 기기가 역행하고 경맥이 모두 끊겨 고질병으로 남을 가능성이 큽니다.”
진북왕비는 순간 실망했다.
“허나 소직이 듣자 하니 허 은라가 선물한 불상과 관련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시위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그와 관련 있다고? 이 거지 같은 놈이 내 마음을 통쾌하게 하는 좋은 일을 했네…….’
진북왕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를 지었다.
* * *
울퉁불퉁한 산길에서 이묘진이 도포를 입고 옥관으로 머리를 묶은 채 사문(師門)이 선물한 법기 장검을 등에 메고 천천히 걸었다.
그녀는 길가에 만발한 들꽃, 찬란한 햇빛, 수려한 산수 경치를 감상하며 만족해했다.
눈부시도록 붉은 유지산(*油紙傘: 중국 전통 우산) 하나가 그녀의 곁을 따르고 있었는데 우산 아래에는 경국지색 소소가 있었다. 소소는 새까만 눈동자, 붉은 입술, 새하얀 피부를 뽐내며 번잡하고 화려한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이묘진은 아름답기는 하나 기세가 지나치게 맹렬했다.
반면 소소는 완전히 당대 제일 호족의 소저 차림새였다. 그녀가 애교 있게 눈동자를 굴리니 자연스러운 교태가 묻어 나왔다. 소소에게서는 알 수 없는 매력이 넘쳐 났다.
“80리만 더 가면 경성에 도착하겠어요. 주인님, 저희 경성에서 오래 머무르는 거 어때요?”
소소는 기대에 가득 차서 남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사천감을 잘 모르고 허칠안은 이미 죽었잖니. 그가 사라졌는데 송경이 너를 상대할 거라는 말이 더 이상하게 들리는구나.”
이묘진은 입을 삐죽이며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고 공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