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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타경-403화 (403/712)

403화. 혼자서 군신을 막다 (3)

일주향의 시간이 흐른 뒤, 갑옷을 입고 날카로움을 고수하는 궁중 시위가 금란전에 들어와 공손하게 말했다.

“폐하, 허신년을 데려왔습니다.”

굳었던 분위기가 단숨에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조당의 제공들은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

원경제가 고개를 끄덕이고 위엄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데리고 들어오거라.”

궁정 시위가 물러났고, 몇 분 뒤 수려한 이목구비에 죄수복을 입은 춘시 회원 허신년이 들어왔다.

그는 새빨간 융단이 깔린 통로를 지나 양쪽의 군신을 지나 원경제 앞에 이르렀다.

‘여, 여기가 바로 전설 속의 금란전?! 여기가 바로 조당 제공들이 조회하는 곳?! 왜 나를 금란전으로 데리고 왔지…….’

허신년은 머릿속에 일련의 물음표가 스쳤고, 가슴이 떨려 왔다. 손발이 뜻대로 되지 않고 떨렸다.

그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자신에게 buff를 주었다.

<눈앞에서 산이 무너져도 안색이 변하지 않는다!>

순간 허신년은 마음이 우물물처럼 차분해졌다. 그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고, 눈빛이 맑고 반짝였다. 그는 마치 양쪽의 제공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그는 읍을 올리며 말했다.

“서생 허신년, 폐하를 뵈옵나이다.”

궁중 시위가 즉시 말했다.

“폐하, 신분 확인을 마쳤습니다.”

원경제는 법도 하늘도 업신여길 정도로 훌륭한 외모의 젊은이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나지막이 말했다.

“짐이 네게 묻겠다. 동각대학사가 뇌물을 받고 네게 문제를 유출했는가?”

허신년은 소리 높여 외쳤다.

“폐하, 서생 억울하옵니다!”

아무도 그의 변명에 아랑곳하지 않자 원경제가 담담하게 말을 끊었다.

“짐이 네게 기회를 주겠다. 만약 스스로 결백을 증명하고 싶다면 이 금란전 안에서 시 한 수를 지어 보거라. 짐이 직접 문제를 낼 것이다. 허신년, 할 수 있겠느냐?”

‘저는 못 해요, 못 한다고요…….’

허신년은 얼굴이 약간 하얗게 질렸다.

그는 자신이 금란전 안으로 이끌려 와 이런 난제를 마주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행로난》은 형님이 대필한 작품이지 그가 지은 글이 아니다. 물론 그가 단어 두 개를 바꾸기는 했으니 가슴을 탁탁 치면서 말할 수 있다.

<이 시는 제가 지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다시 한 수를 지으라고 한다면, 게다가 임시로 시를 지으라고 한다면 그는 전혀 할 수 없었다.

‘이 일을 할 수 있으려면 성인이 빙의되어야만 한다고…….’

허신년은 속으로 절망하였다. 그는 심지어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고 가벼운 처벌을 내려 달라고 조정에 간청할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성이 그에게 말했다. 일단 《행로난》을 본인이 지은 게 아니라고 인정한다면, 그를 기다리는 건 심연으로 미끄러지는 결말일 뿐이라고.

큰형이 시험 문제를 예상해서 맞혔다는 걸 신경 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 어떡하지, 나 어떡하지! 나 허신년이 처음 온 금란전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관리 사회의 어려움과 위험을 뼈저리게 체감했다.

‘형님, 저 어떡해야 해요…….’

허신년의 표정, 안색 모두 신하들의 눈에 들어왔고 원경제의 눈에 들어왔다.

손 상서의 눈에 쾌감이 스쳤다. 허칠안이 당시 시를 지어 그를 치욕의 기둥에 못 박았는데 지금 물레바퀴 돌 듯 그가 되갚을 차례가 되었다.

병부시랑 진도원은 소리 없이 숨을 내쉬며 대세가 이미 굳어졌다고만 생각했다. 조정방을 타도한 뒤, 그의 다음 스텝은 바로 동각대학의 자리를 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각은 왕 재상의 근거지고, 손 상서는 왕당의 중역이니 거의 성사된 일이나 다름없었다.

좌도어사 원웅은 위연을 쳐다봤다. 위연이 시종일관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기분이 아주 별로였다. 이렇게 보니 그의 계획이 허사가 된 듯했다.

허나 위연이 유능한 부하를 잃게 할 수 있었으니 손해는 아니다.

‘역시나 이 지경까지 왔군…….’

위연은 소리 없이 탄식했다. 위연은 맨 처음에 허신년이 과거 부정행위 사건에 휘말렸다는 걸 알았을 때 이 일이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후, 허칠안이 대필하여 시를 써준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고, 위연은 그에게 가벼운 처벌을 목표로 노력하라고 제의했다.

이는 치명적인 허점이었다.

‘허칠안에게 또 다른 믿는 구석이 있는 듯하군. 그가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다고…….’

조국공이 무슨 까닭으로 출전하여 배반했는지 위연은 속으로 대강 짐작했지만, 시를 짓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는 위연도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원경제는 높은 곳에 앉아 허신년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위엄 있고 나지막했다.

“못하겠는가?”

‘꿀꺽…….’

허신년은 침을 삼켰다. 머리를 내밀어도 움츠려도 칼과 마주했기에 이를 악물고서 말했다.

“폐하, 문제를 내 주십시오.”

원경제는 웃더니 여유롭게 말했다.

“정의를 받들고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켜 군주의 은혜에 보답하리. 음, ‘충군보국(忠君保國)’을 주제로 하여 시를 한 수 지어보거라. 네게 일주향의 시간을 주겠다.”

손 상서와 그 일당은 원경제가 낸 문제를 듣자 참지 못하고 남몰래 웃었다.

폐하께서 허신년이 운록서원의 서생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시험 문제를 냈다는 건 의도적이었다.

게다가 자고로 후대에 전해지는 충군보국 시사는 대부분이 나라가 멸망할 무렵에 나왔다. 태평성대에는 이를 주제로 하는 뛰어난 작품이 극히 드물었다.

이 문제는 매우 어렵다!

‘충군보국을 주제로 한다라…….’

허신년은 온몸이 굳은 채로 그 자리에 멍하니 있었다.

그날, 큰형이 제비를 뽑아 시험 문제 두 개를 뽑았는데 첫째는 영지(咏志)고, 둘째는 애국이었다. 영지시(咏志詩)는 이미 춘시에서 효과를 발휘하여 그가 당조 회원이 되는데 일조하였다.

그렇다면 남은 애국시는 자연히 무용지물이었다.

그는 원경제가 낸 주제가 하필이면 충군애국을 주제로 하는 시일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다.

‘설, 설마……. 폐하께서 진작에 형님과 의기투합했나? 그렇지 않고선 이 우연의 일치를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원경제는 무표정으로 금란전 안의 춘시 회원을 쳐다보았다. 상대방의 의중을 헤아리는 건 황자 시절에 이미 최고봉에 이른 제왕의 기량이었다.

허 회원의 여러 가지 표정, 눈빛 모두 그의 마음속의 두려움과 절망을 설명했고 또 그렇기에 그는 넋을 잃고 우두커니 있었다.

마찬가지로 황자 시절을 걸어온 예왕이 기침 소리를 내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폐하…….”

“예왕!”

병부시랑이 목소리를 높여 예왕의 말을 끊더니 말했다.

“일주향의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니 허 회원이 시를 짓는 걸 방해하지 마십시오. 조당 제공들이 기다립니다.”

예왕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에 대신들은 각기 다른 표정을 보였다. 걱정하는 이도 있고, 즐거워하는 이도 냉소를 머금은 이도 있었으며 냉정한 태도로 방관하는 이도 있었다.

침묵을 깨고 허신년이 소리 높여 말했다.

“일주향까지 필요하지 않습니다. 서생을 가엾이 여기어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기회를 주신 폐하께 감사드립니다. 제 큰형 허칠안이 대봉의 시괴고 자유자재로 시를 짓지 않습니까. 당연히 제가 그를 창피하게 하면 안 되지요!”

‘잉? 갑자기 이렇게 자신만만하다고?’

조당의 제공, 예왕 그리고 원경제는 동시에 어리둥절했다.

뒤이어 다채롭고 리듬감 있는 목소리가 금란전 안에 울려 퍼졌다.

“흑운압성성욕최 갑광향일금린개(*黑雲壓城城欲摧 甲光向日錦鱗開: 검은 구름이 성을 뒤덮어 성이 무너질 듯하나 햇빛에 비친 갑옷이 금색 비늘처럼 반짝이는구나).”

간결한 한 구절이 중생의 마음속에 생동감 넘치는 공성도(攻城圖) 한 폭을 그려냈다. 마치 검은 구름이 뒤덮는 듯 적이 우르르 몰려온다. 성벽 위에 있는 수비군의 갑옷이 햇빛에 반짝이고, 그들은 진지를 확고히 정비하고 적을 기다린다.

허신년은 고개를 돌리고, 천천히 제공들을 훑어보며 읊조렸다.

“각성만천추색리 새상연지응야자(*角聲滿天秋色里 塞上燕脂凝夜紫: 나팔 소리가 가을 하늘에 가득하고, 수비군은 연지처럼 응결되어 밤하늘이 자줏빛으로 물드네).”

조당의 훈귀들이 경악하며 바라보았다.

‘이 서생은 전쟁터에 나간 적이 없는데 어떻게 전쟁터의 정경을 이렇게 절묘하게 표현하는 거지? 이렇게 사람 마음속으로 깊이 파고든다고?’

“반권홍기임역수 상중고한성불기(*半卷紅旗臨易水 霜重鼓寒聲不起: 반쯤 말린 붉은 깃발을 들고 지원군이 역수(易水)로 달려가니, 매서운 추위에 북소리마저 잠기는구나).”

“상중고한성불기라 좋구나. 본후(本侯)가 마치 그해로 되돌아간 듯하네.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매며 변방을 수비하던 세월 말이야.”

위해백은 도취하여 큰 소리로 감탄했다.

다른 훈귀들 역시 시사의 매력에 젖었다.

문관들은 미간을 찌푸린 채 불쾌하다는 듯 저속한 무사를 훑어보았다. 갑자기 소리를 내서 말을 끊는 그들에게 반감이 들었다.

손 상서는 좌도어사 원웅을 쳐다봤다. 원웅은 망연자실하게 병부시랑 진원도를 쳐다봤고, 진원도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대리사경을 쳐다봤다.

네 사람은 소리 없이 눈빛을 교환했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리사경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 시는…… 좋기는 하나 충군과 무슨 관련이란 말인가? 자네가 지은 글은 그저 전쟁터의 전투를 표현하는 내용이 아닌가? 버젓한 회원이 시의 주제조차 일치시키지 못하다니. 부정행위가 아니면 뭔가?”

“그러게 말일세!”

진원도가 큰 소리로 말했다.

허신년은 못 들은 척하더니 갑자기 돌아서서 원경제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읍을 올렸다. 점점 우렁차지는 목소리가 금란전 내부에 울려 퍼졌다.

“보군황금대상의 제휴옥룡위군사(*報君黃金臺上意 提携玉龍爲君死: 황금대(黃金臺)에서 받은 군왕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면 검을 쥐고 죽음으로 갚는 수밖에).”

대리사경은 숨을 죽이고 멍하니 허신년을 바라보았다. 그는 보이지 않는 싸대기를 한 대 후려 맞은 듯 마음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손 상서 일당 역시 얼굴이 새파래졌고, 이마에 핏줄이 섰다.

‘보군황금대상의, 제휴옥룡위군사라…….’

원경제는 여유롭게 되새김질하더니 미소를 짓고 크게 기뻐했다.

“좋은 시구나, 좋은 시야. 역시 회원답다. 역시 《행로난》을 쓸 수 있는 인재다워.”

폐하께서 기분이 아주 좋다는 걸 어느 누구라도 그 말투와 표정을 통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원경제가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

“허나 이 황금대가 무슨 뜻인가?”

‘황금대는 황금으로 주조한 고대겠지…….’

허신년은 몸을 굽히고 읍하더니 자신이 이해한 바대로 대답했다.

“폐하께 충성을 다하고, 폐하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는데 황금으로 주조한 고대는 말할 것도 없지요. 설령 옥대(玉臺)라고 해도 쉽사리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원경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얼굴의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좋구나. 본래부터 조정은 상벌(賞罰)에 있어 원칙과 태도가 분명하다. 절대로 공신을 푸대접하지 않아. 짐 역시 그렇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허 회원의 시재가 형에게 못지않으니 당연히《행로난》을 네가 지었겠구나. 경의와 책론에 관해선 전시 때 짐이 직접 읽을 것이니 짐을 실망시키지 말거라. 네가 2갑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너를 한림원에 들여보내 서길사가 되도록 짐이 약조하마.”

한림원은 저상지소(儲相之所)라고도 불렸다. 서길사는 1갑보다 못하지만, 내각에 들어갈 자격을 갖췄기에 당조 최고의 청귀(淸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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