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화. 정보를 단약으로 바꾸다
“더 이른 건 없나요?”
허칠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회경은 고개를 저었다.
‘정부 측 사서에는 벽화가 그려진 연대의 기록은 없는 게 확실한가 보군…….’
이 답은 그가 예상한 대로라 허칠안은 여전히 좀 실망스러웠다.
인족도 유가가 나타나기 전에는 역사를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지만, 주로 벽화로 그렸다. 그런데 벽화는 보존하기가 어려워 전쟁을 한 번 치르고 나면 하루아침에 훼손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들이 진정으로 서적 편찬을 전통으로 삼기 시작한 시기는 유가가 나타난 이후였다. 지식인은 심혈을 기울여 서적을 편찬하기 시작했고, 사서 편찬을 평생의 일이자 영광스러운 사업이라 여겼다.
“허 대인, 또 다른 일이 있는가?”
회경이 일깨우며 말했다.
“없습니다…….”
허칠안은 생각에 잠긴 채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없다고?”
회경의 어조가 다소 높아졌다.
“제 이 기억력 좀 보세요. 마마께 화본을 드리기로 약속하였는데.”
허칠안이 머리를 치더니 품속에서 책자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 두고 말했다.
“어제 집에 일이 있어서 지체됐습니다. 마마, 많이 기다리셨지요?”
회경은 화본을 쳐다보지도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여종 몇몇이 보고 싶어할 뿐이지, 본 공주가 언제 ‘많이 기다렸다’라고 말했는가?”
“네. 별다른 일 없으시다면 소직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허칠안은 임안부에 만나러 가기로 약속한 일을 마음에 둔 상태였다.
‘정말 성가셔. 제대로 수련할 시간조차 없는데 이렇게 많은 물고기를 키워서 뭐 한단 말인가…….’
허칠안은 임안의 매력적이면서 다정한 얼굴을 떠올리자 좀 마음이 급해졌다.
“배웅하지 않겠네.”
허칠안이 대청을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회경은 치맛자락을 들고 일어나 곧장 탁자 옆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다소 다급하게 책자를 들고 스르륵 한 번 훑어보며 양이 많아 실컷 볼 수 있음을 확인했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 기쁨과 안도가 스쳤다.
* * *
영보관에서 황갈색 고양이 한 마리가 가뿐하게 담 위로 뛰어올라 한적한 정원을 힐끗 보고는 담에서 뛰어내렸다.
고양이는 꼬리를 치켜들고 자갈이 깔린 오솔길을 지나 정실 입구에 이르렀고, 발톱을 들고 문을 두드렸다.
격자문이 저절로 활짝 열리더니 낙옥형의 도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영보관에는 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어이!”
황갈색 고양이는 탄식하더니 공기를 뒤흔들며 찌든 목소리를 내뱉었다.
“사매님, 강호에서 급한 상황을 도와준 탓에 내 육신이 곧 망가질 듯하네.”
“도사께서는 지금의 육신을 아주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요.”
낙옥형이 조롱하며 말했다.
“사매님,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함부로 말하지 말게.”
황갈색 고양이는 조금 화를 내며 힘차고 신랄하게 말했다.
“우리 세대 인사는 일을 함에 있어 사소한 일에 구애받지 않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시고, 무슨 일입니까?”
낙옥형이 신경질을 냈다.
황갈색 고양이가 얼굴에 인간적인 미소를 지으며 뻔뻔하게 말했다.
“사매님에게 혈태환(血胎丸)을 두 알 구걸하고 싶네만.”
낙옥형이 탄식하더니 말했다.
“저는 그저 군왕을 미혹시켜서 도를 닦고, 조정의 기강을 흔드는 화의 근원일 뿐입니다. 제 단약은 전부 백성의 고혈이지요. 사형께서는 드신 후에 업화에 몸이 타고 전부 사라질까 봐 두렵지 않으십니까?”
‘이 소심하고 뒤끝 많은 사람 같으니라고…….’
금련 도사가 나지막이 말했다.
“사매님, 방금 그 말은 좋지 않네. 원경제가 도를 닦으려는 게 자네와 무슨 관계인가? 심사가 사나운 사람으로 국사를 바꾸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조정의 기강을 흔드는 게지. 사매, 천하의 백성들을 마음에 두어야만 국사의 임무를 맡고, 원경제를 직접 주시하는 것이네. 그러지 않으면 조정은 진작에 혼란스러워졌을 테지.”
낙옥형이 담담하게 탄식했다.
“만약 세상 사람들이 모두 사형처럼 제대로, 명확하게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실 사형 말씀이 맞습니다. 기왕 조정의 기운을 빌려 수행하는 이상 구설수에 올라도 이상할 일 없지요.”
“그, 그럼 혈태환은…….”
“혈태환 한 알에 황금 38냥입니다. 동문 간의 정을 생각하여 제가 사형에게는 자투리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황금 60냥만 주십시오.”
‘빈도가 그렇게 많은 은자가 있으면 너를 뭐 하러 찾아왔겠니!!’
금련 도사의 고양이 얼굴이 굳었다.
금련 도사는 잠시 침음하였다. 그는 문턱을 뛰어넘고 정실로 들어와 부들방석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절세 미인을 쳐다보면서 협의했다.
“나는 정보를 탈태환과 맞바꾸겠네.”
낙옥형은 눈을 뜨지 않고 도를 닦는 자세를 취했다. 정교한 얼굴은 옥 조각 같았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가볍게 벌리고 말했다.
“사형께서 정보가 아무리 많아도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황갈색 고양이는 푸른 눈으로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허칠안과 연관된 정보라면?”
낙옥형은 즉시 눈을 떴다.
“그의 일이라도 저는 관심 없습니다.”
낙옥형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그녀 모습을 보니 마치 집안 어른들이 강제로 혼사를 주선하는 일이 불만인 것 같구먼…….’
황갈색 고양이는 속으로 가볍게 웃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발톱을 들어 올렸다가…… 한 번 보더니 내려놓았다.
“보아하니 사매가 허칠안을 정말로 무시하는 것도 아니군. 아니면 적어도 그가 혐오스럽다고 생각되지는 않는 건가? 어쨌든 나는 자네가 원경제를 아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정도는 안다네.”
“종일 상대한테 쌍수하자고 조르는 남자를 좋아하는 여인은 없습니다.”
낙옥형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럼 망했네. 허칠안 역시 그런 자인데…….’
황갈색 고양이는 마음속으로 탄식했으나 겉으로는 믿음직한 고양이처럼 웃으며 말했다.
“사매가 누구와 쌍수하고 싶은지 자네를 대신해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 허나 쌍수 도려를 정하는 일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니 쉽사리 결정해서는 안 되네. 응당 많이 관찰해야 하지. 나한테 허칠안에 관한 중요한 정보가 있는데 아마 자네에게 쓸모 있을 걸세.”
아니나 다를까 낙옥형의 태도가 호전되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형 말씀하시지요.”
“사실 이 정보는 허칠안과 관련됐을 뿐만 아니라 상고 시대 인종의 은밀한 비밀에도 연관되었네.”
금련 도사가 말을 마치고 잠시 어휘를 선택하더니 말했다.
“오호가 고족의 아가씨라는 점은 자네도 알 테지. 얼마 전에 그녀가 남강을 떠나 대봉으로 경험을 쌓으러 왔네…….”
황갈색 오양이는 발톱을 움직여 큰 결심으로 본능을 억누른 채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상성 근처에서 연락이 끊겼지.”
“그저께 밤에 나는 삼호, 사호, 육호를 불러 모아 함께 그녀를 찾으러 갔네. 여러 차례의 탐색 끝에 상성 밖 남산 아래의 거대한 무덤에서 그녀를 발견했네. 그 무덤의 주인은 인종의 선배였지. 벽화에 기재된 정보로 판단했을 때 그는 신마의 후손이 활약하던 시대에 태어났는데 기운을 빌려 도를 닦기 위해 국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여 제왕이라 일컬어졌지.”
‘왕위를 찬탈하여 제왕이라 일컬어졌다라…….’
낙옥형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물었다.
“그도 2품입니까?”
황갈색 고양이를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도 원래는 그런 줄 알았네만 나중에 그는 도겁에 실패하여 죽고 말았네. 지하에 거대한 무덤을 만들었지.”
“후대 사람이 그를 위해 지었겠죠.”
낙옥형은 말하면서 물을 한 잔 따르더니 황갈색 고양이 앞으로 밀었다.
황갈색 고양이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혀를 내밀어 ‘할짝할짝’ 몇 모금 핥더니 개탄하며 말했다.
“고양이의 혀와 사람의 혀는 그 차이가 정말 크네. 차를 마셔도 담백하고 맛이 느껴지지 않아. 낭비야, 낭비.”
그는 이어 본론으로 되돌아와 나지막이 말했다.
“문제가 바로 여기에서 나타났네. 그 도인이 도겁에 실패했음에도 육신은 사라지지 않고 줄곧 지하 궁전에 잠들어 있었네. 우리가 주묘에 들어갔을 때 그가 놀라서 잠에서 깨어났지.”
허칠안의 눈에 보이는 디테일을 금련 도사 같이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이 어떻게 놓칠 수 있겠는가? 그 미라 몸의 불에 탄 흔적과 육신의 강도…….
금련 도사는 현장에서 그 미라가 바로 도인임을 알아차렸으나 약삭빠른 인간이라 그저 모른 체했을 뿐이었다.
“불가능해요!”
낙옥형의 표정은 심각했다.
천겁은 모든 것을 파멸한다. 도문 2품이 만약 도겁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어떠한 것도 남기지 않고 원신은 육신과 함께 한 번에 파괴될 것이다.
전 세대 인종 도수가 바로 그러했다.
“나도 맨 처음에는 놀라고 의아했지만 사실이 그러하네.”
황갈색 고양이가 말했다.
그는 사실 천지회 구성원에게 한 가지 일을 숨겼다. 지종 도수는 결코 도겁에 실패하여 사도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도겁에 맞서기 위해 비뚤어진 길을 걷다가 순간 조심하지 않아 마도에 빠졌다.
만약 지종 도수가 도겁에 실패했다면 진작에 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 미라가 나타난 후 허칠안을 주군으로 오해하여 여러 해 동안 수호하던 전국옥새를 받쳤네…….”
“잠시만요!”
낙옥형은 손을 들고 정교한 눈꼬리를 찌푸리며 물었다.
“그가 허칠안을 주군으로 불렀다는 말씀이십니까?”
금련 도사는 긍정의 고개를 끄덕였다.
낙옥형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 말에 내포된 방대한 정보를 소화하기까지 십여 초 정도 쓴 후 천천히 말했다.
“사형 말씀으로는 미라가 그 도인인데 허칠안을 주군이라고 불렀다는 뜻이죠? 그의 주군이 누구일까요? 그리고 왜 허칠안을 주군으로 잘못 인지했을까요?”
여자 국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름다운 눈으로 금련 도사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전의 가뿐한 자태를 거두고 유달리 몰입하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했다. 그녀는 이 일들을 아주 신경 쓰거나 이 일들로부터 어떠한 단서를 발견했다.
금련 도사가 분석하며 말했다.
“내 짐작으로 그 미라는 시체일 뿐, 진정한 도인은 육체에서 벗어나 새로운 육신을 다시 만들었을 걸세.”
여기서 바로 도문의 수련 체계와 연관성이 생긴다.
도문 3품, 양신(陽神)!
도문의 호칭으로는 양신을 ‘법신(法身)’이라고도 부른다. 법상의 전신이다.
천지인 삼종은 가는 길이 다르지만, 핵심은 같다. 귀납해 보면 도를 닦는 절차는 다음과 같다.
먼저 음신을 닦고 나서 금단을 정제한다. 음신과 금단이 융합하면 원영(元嬰)이 탄생한다. 원영이 성장하면 바로 양신이다. 양신이 대성하면 바로 법상이다.
따라서 양신은 법상의 전신이자 법신으로 불린다고 말한다.
도문 수사(修士)가 3품 양신경(陽神境)에 이르면, 이미 1차로 육신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양신은 아무런 구속 없이 세상을 노닌다.
설령 육신이 없어진다 해도 일정한 대가를 들이기만 하면 육신을 다시 만들 수 있다.
물론 이는 육신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정반대로 육신은 1품 육지신선에 발을 들여놓는 핵심이다.
양신이 한 걸음 더 나아가 탈변하면 바로 법상이다. 이때 법상은 육신과 융합하여 다시 하나로 합쳐져야 한다. 그런 뒤 천겁을 넘겨 질적 변화를 완성한다.
육지 신선은 이렇게 탄생한다.
“유체를 남길 수 있는 이상, 도인은 1품 육지 신선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렇다고 하면 그는 천겁에 실패한 후 어떻게 빠져나왔을까요?”
낙옥형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래서 짐작만 했을 뿐이지. 보아하니 사매도 이유를 모르는군.”
황갈색 고양이가 아쉬워하며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