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타경-369화 (369/712)

369화. 자신을 엄격하게 다스리다 (2)

어느새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허칠안의 새로운 바둑이 완성되었다. 장기!

자신과 개자식이 친히 만든 장기 두 벌을 보자 임안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었다. 순식간에 웃음이 만연했다. 눈에는 미인의 어여쁜 웃는 얼굴만이 남았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제가 마마께 규칙을 말씀드리면 궁을 나설 때가 될 듯합니다.”

허칠안은 말을 마치고 궁녀들을 내보냈다.

임안은 해를 보더니 미소를 점점 거두고 ‘그래’하고 대답했다.

허칠안은 장기 규칙을 진지하게 설명했지만, 임안의 마음은 딴 곳에 가 있었다. 그녀는 오늘 본래 화가 많이 났다. 임안은 애초에 허칠안을 억지로 끌어들인 게 순전히 회경의 사람을 빼앗기 위함이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 개자식이 점점 좋아졌다. 방법을 바꿔 그에게 은자를 보내고, 허심탄회하게 잘해주었다. 그가 자신을 위해 과분하게 무언가 해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가 그저 짬을 내 그녀와 함께 놀아주기만 하면 임안은 즐거웠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줄곧 가시가 있었다. 그건 바로 허칠안과 회경이 시종일관 ‘정당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는 분명히 그녀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회경에게서 벗어나겠다고 약속했지만, 사적으로 여전히 회경과 왕래하고 있으니 이야말로 정당하지 않은 관계가 아닌가!

그녀는 한 번, 두 번, 세 번 못 본 척했지만…… 오늘 드디어 폭발했다. 그녀는 단약을 구하기 위해 애쓰느라 부황에게 갖은 욕을 다 들으면서도 뻔뻔한 얼굴로 무리하게 맞섰다. 그녀는 이튿날 허칠안을 데리고 오라고 사람을 보낸 뒤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더랬다.

그런데 기다림 끝에 온 건 시위의 한 마디였다.

<그가 덕형원에 갔습니다.>

그 순간 임안은 존엄을 상실하였다. 또, 허칠안은 몰염치하고 자신은 처량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허칠안은 그녀를 전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니, 그녀를 무슨 바보처럼 대했다.

임안은 괴로운 마음에 울고 싶었다.

“아이구!”

갑자기 허칠안이 길게 탄식하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마마, 제가 방금 먼저 덕형원에 갔습니다.”

순식간에 임안의 표정이 무너졌다. 그녀는 얼굴을 홱 돌렸다.

“나는 덕형원이 뭔지 몰라. 궁에 들어온 후에 나한테 온 거잖아.”

“아닙니다. 저는 먼저 회경공주마마를 만나러 갔습니다.”

“허칠안!”

임안은 크게 소리치고선 고개를 돌렸다. 눈시울이 약간 붉어졌다.

‘그는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나조차도 까발리려는 건가? 내 감정을 고려할 수는 없는 건가?’

허칠안은 다시 길게 탄식하더니 서쪽에 걸린 태양을 멀리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심오하고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마치 수많은 이야기와 인생 경험을 감춘 듯했다.

그는 또박또박 천천히 말했다.

“마마, 이런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임안은 잠자코 있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많은 풍경을 보고 많은 사람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마마께서 마지막에 한 그 선택이야말로 마음속으로 가장 원하는 일이지요.”

임안은 어리둥절하다가 얼이 빠져 그를 쳐다보았다.

“오늘 마마와 회경공주마마께서 동시에 저를 초대하셨습니다. 저는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회경공주마마를 뵈러 갔지요. 왜일까요? 회경공주마마가 제 마음속에서 마마보다 월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서가 아닙니다.”

허칠안은 일어서서 다소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만약 먼저 소음원에 왔다면 저는 분명 오래 머무르지 못했을 겁니다. 몇 마디 나누지도 못한 채 작별을 고한 뒤 덕형원에 그녀를 만나러 갔겠지요. 허, 회경공주마마가 초대하셨는데 제가 보고도 못 본 척할 수 있나요? 하지만 만약 덕형원에 먼저 가면, 저는 여기서 궁 문이 닫힐 때까지 마마와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제 마음속에서 마마와 회경공주마마 중에 누가 더 가볍고 누가 더 무거운지 아직도 잘 모르시겠습니까?”

임안은 눈빛이 점점 누그러지더니, 표정이 싸늘한 표정에서 부드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허칠안은 다시 앉아 방금 지는 해를 바라보던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임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마마께 필요하신 건 함께하는 거지요.”

이 말은 임안 마음속의 가장 나약한 곳을 파고들었다. 그렇다. 그녀는 고독하고 적막하다.

태자 오라버니가 감금된 후, 어머니는 매일 그녀를 찾아와 울며불며 하소연하며 그녀에게 황후의 음흉한 속셈을 주입시켰다. 형제자매들의 태도 역시 갈수록 냉랭해졌다.

아바마마는 여전히 아바마마였으나 임안은 더 이상 예전의 임안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는 부황이 자신을 총애하는 이유가 전적으로 자신이 해롭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겉모습은 아리땁고 교만한 공주가, 사실은 쓸쓸하고 고독한 여자아이였다.

허칠안은 주위를 훑어보더니 물러간 궁녀가 근처에 없다는 점을 확인하고는, 대담하게 임안의 부드러운 손을 쥐고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마마, 저는 항상 마마와 함께하겠습니다.”

손등에서 전해지는 온도가 좀 뜨거웠다. 임안은 볼은 수줍게 달아올랐고, 가슴속에는 따뜻한 기류가 퍼지는 듯했다.

조용히 시간은 흘렀다. 허칠안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놓지 않았다. 썸 타는 분위기가 두 사람 사이에 조성됐다.

“마마, 시간이 늦었으니 소직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만약 매일 저를 보고 싶으시다면, 임안부로 옮겨가셔도 됩니다. 궁 안에 계실 필요 없으니까요.”

허칠안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 * *

허칠안은 석양빛 사이로 암말을 끌고 다그닥다그닥 황성을 걸었다.

“내가 여자를 꼬신 수년간의 경험으로 볼 때 이번에 임안의 손을 잡을 수 있었으니 다음에는 그녀를 껴안을 수도……. 여자아이잖아. 들이대야지. 들이대지 않으면 네 것이 아니라고. 내가 예전에 들은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어느 쓰레기 같은 남자가 여자 친구한테 말했대. 네 부모님이 네게 잘하는 건 네가 그들의 딸이라서야. 내가 네게 잘해야만 진정으로 너를 사랑하고 너를 아끼는 법이라고. 궤변이지만 나는 궤변 역시 도리라고 생각해.

임안이 내게 잘하는데 진심으로 잘해주거든. 어떠한 이용 가치나 이익이 딱히 섞이지 않았지. 물론, 후자는 아마도 어른들의 세계일 테고. 비록 그녀는 좀 어리석은 예쁜 화병이지만, 이 화병은 자신을 비우면서라도 네게 잘하잖아.

누가 아내감으로 가장 적당하냐고 말한다면 그래도 저채미야. 그녀를 등쳐먹는 게 가장 맛있고 가장 후유증도 없거든. 임안과 회경은 리스크가 너무 커. 사실 지금의 지위까지 올라오니 별달리 여인들에게 요구할 게 없어. 다만 그녀들이 자신을 엄격하게 다스릴 수 있길 바랄 뿐이야.”

그가 여기까지 말을 마치자 암말이 머리를 들이밀더니 코를 두 번 킁킁거렸다.

“너도 내가 너한테 요구하길 바라?”

허칠안은 생각하더니 말했다.

“너는, 음, 작은 고추라도 무시하면 안 돼!”

* * *

왕정문은 퇴근하고 왕부 저택으로 돌아온 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늘 하던 대로 서재에 들어가 접본을 보았다. 그 나이가 되자 이미 여인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아마도 조당 제공들 모두 원경제의 백발이 흑발로 다시 자라는 데에 자극을 받아서인지, 여색을 그다지 가까이하지 않고 양생(養生)에 아주 신경 썼다.

하지만 원경제에게는 수련을 지도하는 인종이 있으며 그를 위해 단약을 제련해주는 인종이 있다. 이는 조당 제공들이 누릴 수 없는 대우다.

왕사모는 보양하고 피부 노화를 늦춰 주는 탕을 받쳐 들고, 책상 정리를 구실로 삼아 아버지의 접본과 주석을 몰래 보았다. 어떤 때는 대역무도하게 이것저것 묻기도 했다.

“저택의 하인이 하는 말을 들으니 오늘 문회에 운록서원의 회원이 왔다지?”

왕정문이 물었다.

“네, 손 상서의 조카와 갈등도 생겼지 뭐예요.”

왕사모는 사건의 경위를 있는 그대로 부친에게 이야기하더니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아버지, 제가 봤을 때 허 회원이 인재라서 초대한 건데 감정으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인지 누가 생각했겠어요. 참을 줄도 모르고. 그저 평범한 자더라고요. 아버지, 그를 제대로 꾸짖어서 염아 동생의 분을 풀어 주셔야 해요.”

왕 재상은 상황을 얕게 보는 편이 아닌 터라 침음하더니 말했다.

“운록서원 출신의 서생은 유가 수련 체계를 밟기 때문에 천성이 그리 나쁘지 않단다. 운록서원 서생의 신분으로 회원에 급제할 수 있다면 아주 드문 인재가 확실하지. 적어도 너희들끼리의 갈등은 공개적으로 까발릴 만한 게 못 돼.”

왕 소저는 입꼬리를 치켜올리더니 즉시 말했다.

“보아하니 소녀의 생각이 아버지와 일치하는 듯하네요. 그럼 아버지가 생각하시기에 그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일 가능성이 있는지는요?”

“그를 끌어들인다고? 왜 그를 끌어들여야 하지? 아무리 인재라고 해도 꼭 그가 아니면 안 될 필요는 없단다. 이번에 국자감 출신 문관들의 미움을 샀으니 현명치 못했어. 게다가 네 아버지는 한 나라의 재상이자 문관의 모범이란다.”

왕 재상은 고개를 저었다.

“바로 아버지가 문관의 모범이기 때문에 나서서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셔야 오히려 저항이 가장 적지요. 소녀가 생각하기에는 만약 그를 휘하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운록서원의 위세에 타격을 줄 수도 있고, 훌륭한 장수를 얻을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예요.”

왕 소저는 ‘제가 형세를 분석해 아버지를 대신해 고려하는 거예요’라는 듯한 모습을 취했다.

“특별한 이유 없이 이 자를 끌어들이는 일에는 이득보다 해가 더 많다.”

왕정문은 고개를 저었다.

왕 소저는 몇 마디 더 하고 싶었지만, 부친이 흘겨보는 바람에 바로 생각을 접었다.

여기서 멈춰야지.

‘특별한 이유 없이라……. 딱 좋아. 나도 한동안은 그를 더 관찰해야겠어…….’

왕사모는 유쾌한 생각을 했다.

* * *

남성, 양생당의 나뭇간 안, 금빛이 천천히 소멸되자 정진 승려가 ‘검은 개’를 위로하고 그가 달콤한 꿈에 빠지게 했다.

“아미타불!”

귓불이 두터운 중년의 승려가 자비로운 표정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이 아이가 지금까지 살 수 있다니, 정말이지 기적이네.”

“사천감의 술사가 그를 치료 해준 적이 있습니다. 네, 허 대인과의 관계 덕이지요.”

항원이 옆에서 말했다.

“몇 년간 번잡한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며 온갖 세상살이와 중생의 고통을 보았네. 빈승은 자주 생각했지. 불등(*佛燈: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만 개나 있는데 왜 한결같이 세상 각 층의 어둠을 비추지 못할까. 어제 대승불법을 깨닫고 나서야 품계를 추구하고, 나한과 보살 과위를 추구하는 것이 자신만을 헤아리는 소승이라는 걸 알았네.

백성을 헤아리는 것이야말로 대승불법이지. 만약 모두가 마음속에 자비를 품고 있다면, 세상에 불등이 더 필요할까? 필요 없어지겠지.”

정진 승려가 개탄하며 말했다.

항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양손을 합장했다.

“허 대인은 정말 비범한 사람입니다.”

정진 승려가 양손을 합장했다.

“타고난 불자이고, 하늘이 불문에게 하사한 훌륭한 선물일세. 빈승은 그가 언젠가 틀림없이 크게 깨닫고 불문에 들어오리라 믿네.”

“빈승, 그날을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습니다.”

항원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정진 승려가 고개를 끄덕이고선 이어 말했다.

“이 아이는 체질이 허약하고 지능에 손상을 입어 당분간은 정상적으로 회복할 수 없네. 긴 여정을 견디지 못할 테니 빈승은 그를 청룡사에 보내라고 제안하겠네. 자네는 서역행을 할 때가 됐어.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8품 이후는 3품이고, 3품은 금강이라고 하지. 만약 금강 신공을 수련하지 않으시면 영원히 금강이 될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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