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타경-366화 (366/712)

366화. 숨 막히는 암투 (1)

일반적인 형태의 마차가 왕부 밖에 멈췄다. 허신년은 발을 젖힌 다음 마부가 준비해 놓은 나무 의자를 밟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런 뒤 그는 돌아서서 청초한 여동생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허영월은 둘째 오라버니의 손바닥을 받치고 안정적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남매 둘은 초대장을 문지기 하인에게 건넸고, 상대방의 안내를 받으며 저택으로 들어갔다.

“둘째 오라버니, 오는 길 내내 걱정이 태산인데 긴장해서 그런가요?”

허영월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네 둘째 오라버니는 지금의 성왕을 만나도 긴장하지 않을 거란다.”

허신년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진지한 표정을 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목소리를 낮추고 여동생에게 말했다.

“석상에 들어가면 많이 듣고 많이 보고 적게 말하렴. 너는 단지 동행하는 안식구일 뿐이니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겠다만 나는…….”

‘나는 싫든 좋든 당대 재상과 만남을 가져야 할 테니까.’

사실 다른 건 차치하고 담력과 투지만 놓고 봐도, 허신년은 동년배 사이에서도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특출한 인재다.

* * *

왕부는 아주 거대했다. 남매 둘은 하인을 따라 한참 걸어서 복도와 마당을 지나쳐 드디어 화원에 이르렀다. 석가산과 깊고 맑은 물이 새로 자라난 푸른 잎, 그리고 꽃봉오리가 막 피려고 하는 꽃망울과 어우러져 경치가 아주 훌륭했다.

곧 드넓은 화원에서 청명한 낭독 소리와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허신년과 허영월은 긴 복도를 지나 탁자를 따라 앉은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다. 왼쪽에는 유삼을 입은 지식인이 십여 명 있었는데 하나같이 혈기왕성하고 위풍당당했다.

오른쪽에는 색색의 비단 치마를 입은 젊고 아름다운 소저들이 있었다.

허씨 집안의 남매가 등장하는 순간, 분위기가 눈에 띄게 싸해졌다. 소년 호걸과 꽃다운 소녀들의 눈빛이 잇따라 번뜩였다.

허신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는 그가 예상한 문회와는 좀 달랐다. 그의 상상 속에 이번 문회는 왕 재상이 사회를 맡고, 문회에 참가한 공사(貢士)들은 재상 앞에서 다소 어색하게 자신의 이념을 피력하고,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는 모습이었다.

만약 재상의 눈에 들 수 있다면, 앞으로 조당에 들어가 든든한 빽이 생기는 셈이다.

문회의 분위기가 이렇게 가벼울 줄 몰랐다. 좋은 술과 맛있는 안주 그리고 신선한 과일, 게다가…… 꽃다운 나이의 소녀들이 이렇게 많이 있을 줄이야!

“허 공자님, 허 소저, 얼른 자리에 앉으세요.”

이목구비가 예쁘고, 솔직 담백한 스타일의 여인이 일어서서 사뿐하게 예의를 갖췄다.

그녀는 늘씬했고, 약간은 동글반반해 보이는 얼굴은 우아하고 아름다웠으며 두 눈은 반짝였다. 그녀는 웃을 때 대갓집 규수의 솔직 담백함도 보이면서 교활한 모습도 살짝 보였다.

허신년과 허영월은 답례를 했다. 허신년은 잠시 훑어보더니 오른쪽 자리로 걸어가 빈자리를 택해 앉았다.

“허 회원, 존함은 익히 들었습니다.”

방보가 자리에 앉아 주변의 공사(貢士)들이 잇따라 술잔을 들었다.

‘역시 나를 제외하고는 운록서원의 다른 서생은 없군. 이 사람들 모두 국자감의 서생이야…….’

허신년은 가슴이 철렁했으나 겉으로는 차분한 웃음을 띠며 잔을 들어 답례했다.

그와 공사(貢士)들은 잠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이들이 예의 있게 굴고, 겉으로는 부드러우나 속이 악랄하다거나 공연히 트집을 잡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 그는 좀 뜻밖이었다.

‘왕 재상이 계략을 꾸미고 공공연히 트집을 잡아 도발하는 건 사실 저급하긴 하지…….’

허신년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역시 왕 재상다웠다. 사람은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이미 강한 적과 맞닥뜨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한편, 허영월은 왕 소저 옆에 배치되었다. 왕 소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허 소저, 올해 몇 살인지요?”

허영월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열일곱입니다.”

왕 소저는 바로 말했다.

“언니는 열아홉이니까 영월 동생이라고 불러도 되겠지?”

‘그녀는 누구지. 주인 영감 같은 저 태도는 뭐야…….’

허영월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언니 편할 대로요.”

왕 소저는 한층 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너는 나를 사모(思慕) 언니라고 부르렴.”

몇 마디 수다를 나눈 후, 허영월은 부드럽고 친절한 이 여인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뜻밖에도 그녀는 재상 왕정문의 적녀였다.

“영월 동생은 시집갔어?”

왕 소저가 갑자기 물었다.

허영월은 수줍어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직 시집가지 않았어요.”

남자가 그녀에게 이 질문을 한다면 허영월은 분명 화를 낼 것이다. 하지만 주변 모두 여자에 말소리도 낮고, 무엇보다 상대방은 왕씨 집안의 적녀였다.

왕 소저는 의아해하며 말했다.

“집안 오라버니들은 혼사를 정하지 않았어? 동생도 서둘러야겠네.”

허영월은 그녀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두 오라버니 다 아직 혼사를 치르지 않았어요.”

‘아직 혼사를 치르지 않았다라…….’

왕 소저는 아무런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허씨 집안 두 공자님의 재화(才華)로는 일찍 혼약을 맺었으리라 생각했는데.”

주변의 소녀들은 슬그머니 귀를 쫑긋 세웠다.

수려하기 그지없는 허신년이든 늠름한 자태의 허칠안이든 궁금했다. 더욱이 후자는 막 두법을 한 차례 치렀기 때문에 그에 대한 경성 아녀자들의 ‘호기심’은 더할 나위 없이 왕성했다.

왕 소저는 곱게 웃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다. 돌연 자색의 옷을 입은 소녀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허씨 집안의 지위가 높이 올랐다고는 하지만, 허칠안은 본래 장락현의 쾌수일 뿐이었어. 허평지 역시 어도위 백호에 지나지 않지. 이런 집안이니 허 소저가 장차 상인 집안으로 시집간다 해도 행운인 셈이야. 지금은 호족에 합류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허영월은 이 소녀의 배경을 종잡을 수 없었기에 억울한 태도를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다른 규수들은 이 모습을 보자 자색 옷의 소녀에게 불쾌한 감정이 좀 생겼다.

왕 소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염아(閻兒) 아가씨가 솔직해서 그래. 아주 틀린 말도 아니고. 개의치 마.”

허영월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자신의 억울함을 억누르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아요. 우리 큰 오라버니는 일개 무사고, 둘째 오라버니도 무관무직이에요.”

염아라는 소녀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만약 이 화제를 이어받으면 조정 관중들 앞에서 계속해서 허칠안과 허신년을 비아냥대야 했는데, 한 사람은 이 자리에 있었으며 다른 한 사람은 저쪽에서 한창 명성과 위엄을 떨치는 중이었다.

“됐어. 차 마시자, 차 마셔.”

왕 소저가 억지로 화제를 끊었다.

문회는 그대로 진행됐다. 공사들은 시사부터 국가 대사까지 논했고, 이따금 대갓집 규수들과 서로 몇 마디 나누곤 했다. 정경이 그런대로 괜찮았다.

허신년은 뜻밖에도 본인이 아주 유쾌하게 대화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화원의 경치가 좋다고 핑계를 대더니 술잔을 들고 옆으로 가서 왕 재상이 도대체 무슨 계략을 꾸몄는지 생각했다.

“꽃 피는 시기가 곧 다가오는데 생기가 없네?”

그는 메마른 연잎을 보면서 멍하니 있었다.

이때,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청주의 홍련입니다. 엄동설한에야 꽃을 피우고, 봄이 되면 시들어 떨어집니다. 하지만 경성과 청주의 기후 차가 크기 때문에 홍련이 잘 자라지 않아 관상 가치가 크지 않지요.”

그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이목구비가 예쁜 그 여인이 있었다.

허신년은 이미 그녀의 신분을 알았기에 읍을 올리며 말했다.

“왕 소저.”

“사모라고 불러 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허신년이 침묵 끝에 말했다.

“사모 소저.”

왕사모는 아름답게 웃었고, 떠나온 자리에서 각자 경치를 감상하며 정원에서 노니는 재자가인들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허 공자의 행로난 시를 사모가 방안 벽에 표구(表具)하고 매일 감상한답니다.”

“시사를 논하자면 저희 형님이 가장 뛰어나죠.”

허신년은 말을 마치고 어색하게 덧붙였다.

“허나 문장은 본래 하늘이 만들어 준 것으로 뜻하지 않게 묘수를 얻을 수 있지요. 저 역시 뜻하지 않게 묘수를 얻었고요.”

허신년은 큰형의 언어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 앞에서 과시하니 그럴 듯하다는 생각에 만족했다.

‘가족끼리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으니 형님의 언어가 곧 내 언어지 뭐.’

* * *

허영월은 연못가에 앉아 산들바람을 맞으며 무료하게 경치를 감상했다.

문회는 별다른 재미가 없었다. 그녀는 그 테두리 안의 사람이 아니고 게다가 어머니가 말하는 ‘청년 재주꾼’들은 다 괜찮긴 한데 다만 큰 오라버니, 둘째 오라버니와 비교하면 설령 공사라고 해도 좀 내놓기에는 체면이 서지 않았다.

“흥!”

뒤에서 콧방귀를 뀌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색 옷의 소녀가 걸어와 허영월을 매섭게 흘겨보더니 나무랐다.

“나쁜년, 너 방금 웬 불쌍한 척이니?”

허영월이 고개를 들고 나약하게 말했다.

“염아 언니, 뭐라고요? 제, 제가 언제 불쌍한 척했어요?”

자색 옷의 소녀는 냉소를 지었다.

“고작 네 수법으로 감히 내 앞에서 재주를 부리다니. 불쌍한 척했는지 아닌지는 네가 잘 알지 않니? 저속한 무사 집안 출신의 못된 계집애가 여기에 어울리니? 나와 동석할 자격이 있니? 얼른 왕부에서 꺼져. 앞으로 내 눈에 띄지 말고.”

허영월은 미간을 찌푸렸다.

“염아 언니가 저를 싫어하는 이유가 저희 큰 오라버니 때문이에요?”

자색 옷의 소녀가 비웃으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래도 네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구나?”

당연히 그녀의 숙부와 적대 관계인 허칠안이 이유였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이 어린애가 방금 일부러 불쌍한 척하면서 언니, 동생들의 동정심을 얻어 그녀로 하여금 에두른 지적을 받아 창피를 당하게끔 했기 때문이었다.

자색 옷의 소녀는 이렇게 억울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욱 분노에 차올랐다. 더욱이 그녀는 허영월의 미모에 질투가 나서 표독스럽게 말했다.

“너처럼 어디 내놓기 부끄럽고, 남자나 홀리게 생긴 천한 계집애는 이 몸이 기루에 팔아 친히 인간 세상의 고통을 맛보게 해 주겠다.”

허영월은 갑자기 억울해졌다.

“문회는 둘째 오라버니가 저를 데리고 온 것이고, 왕부의 초대를 받았을 뿐인데 제가 어떻게 중도에 자리를 뜰 수 있겠어요? 아니면 언니가 저를 좀 도와줄래요?”

자색 옷의 소녀가 이 말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이때 허영월이 남몰래 손을 뻗어 자색 옷의 소녀의 허리를 아프게 꼬집었다.

자색 옷의 소녀는 아픈 나머지 안색이 창백해졌고,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를 밀쳤다.

허영월은 ‘그 기세를 좇아’ 뒤로 넘어져 연못 속으로 빠졌다.

“살, 살려 주세요……. 저는 수영을 못해요. 둘째 오라버니, 둘째 오라버니, 저 좀 살려 주세요……!”

허영월이 울면서 소리치자 날카로운 비명이 모든 재자가인의 주의를 끌었다.

“물에 빠졌다, 누군가 물에 빠졌어!”

“얼른 사람을 구해라. 여봐라……!”

놀라서 외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고, 사람들은 재빠르게 주위를 둘러쌌다.

허신년은 구조 요청 소리를 듣더니 소리를 따라 두 시선을 옮겼고,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허영월을 보았다. 그는 동생이 물에 빠진 모습을 보더니 안색이 변했고, 왕 소저에게 미처 알리지도 못한 채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

풍덩…….

그는 몸을 날려 연못으로 뛰어들어 허영월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를 수면 밖으로 받쳐 들었다. 그렇게 왕 소저 등 일행의 도움을 받으며 허영월을 끌어올렸다.

“어서, 어서 방으로 가서 내 외투를 가지고 오거라.”

왕 소저가 여종에게 황급히 분부했다.

순식간에 여종이 외투를 가져 왔고, 왕 소저가 직접 허영월에게 덮어 주었다. 허영월은 둘째 오라버니 품 안에 기대어 훌쩍훌쩍 흐느꼈다.

사람들은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사태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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