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화. 단서철권(丹書鐵券) (2)
대화를 나누는 사이, 두 사람은 외청에 이르렀다. 외청 안의 주인석에는 망포를 입은 환관이 앉아 있었는데 얼굴이 희고 수염이 없는 중년이었다.
허평지와 허신년은 아랫자리에 앉아 망포 환관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칠안아 깼느냐?”
허평지는 귓바퀴를 움직이더니 가림벽 뒤쪽을 쳐다봤다.
허칠안과 조위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왔다.
“원장님!”
허신년은 얼른 일어서서 읍을 올렸다.
환관은 허신년과 허평지를 마주할 때는 꽤나 오만불손했지만, 허칠안이 나오는 걸 보자 얼굴에 즉시 웃음을 가득 띠었다.
“자작 대인 깨어나셨습니까. 몸 상태는 어떠신지요? 만약 몸조리가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저희에게 말씀하십시오. 저희가 궁으로 돌아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칠안, 이분은 사예감(司禮監)의 진 공공이란다.”
허평지는 어느새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말투도 당당해졌다.
“진 공공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본관은 무탈합니다.”
허칠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습니다, 그럼 됐어요.”
진 공공은 친절하게 웃으며 자신의 주인석을 양보하여 허칠안과 원장 조위에게 주었다.
“저희는 폐하를 대표해서 허 대인을 살피러 왔습니다. 허 대인은 조정을 위해 전쟁에서 큰 공로를 세웠으니까 폐하께서 반드시 거듭 포상하신다 하셨습니다.”
“사실 모두 폐하께서 알아주시고 소직에게 기회를 주신 덕분입니다. 소위 오랫동안 군사를 양성하는 건 일단 유사시를 대비하기 위함이니 마침 조정에서 배양하여 소직이 오늘날에서야 조정을 위해 공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허칠안은 간곡히 말했다.
“따라서 공공께서는 폐하께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소직 공로를 자처하지 않으니 폐하께 단서철권을 하사해 주길 청합니다.”
허평지와 허신년은 이 말을 듣고 난 뒤 마음의 움직임이 완전히 달랐다. 허신년은 마음속으로 말했다.
‘형님은 자신을 꽤나 정확히 아는군. 단서철권의 쓰임은 절대적으로 금은보화와 견직물보다 훨씬 낫지. 금은보화는 큰 형님이 교방사에서 더 소탈하게 돈을 쓰게 만들 뿐이고, 능라 주단은 어머니와 여동생이 몸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더 많이 걸치게 할 뿐이라고.’
전부 계륵이다.
허평지는 머릿속이 ‘명예’ 두 글자로 가득 찼다. 자고로 공신이 아니면 단서철권을 하사하지 않는 법이다.
진 공공은 어리둥절하더니 말했다.
“허 대인의 말씀을 전달하겠습니다. 음, 폐하께서 몇 가지 일을 아주 궁금해하시어 제게 대략 물어보라고 명하셨습니다.”
‘왔군…….’
허칠안은 아무런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진 공공 말씀하십시오.”
“허 대인이 두법에서 두 번 칼을 뽑아 경성에 이름을 떨쳤지요. 허나 그 두 번의 칼은 실로 대인의 한계를 능가하였습니다. 폐하께서 어떻게 해냈는지 아주 궁금해하십니다.”
진 공공은 얼굴에 여전히 웃음을 띠었지만,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그를 주시했다.
“말씀드리자면 부끄럽습니다만 감정께서 제게 힘을 주셨습니다.”
허칠안은 요점만 간결하게 설명했다.
그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은 이유는 이렇게 하는 편이 감정의 컨셉에 더 부합하기 때문이었다. 너무 뚜렷하게 말하면 오히려 이상하다. 또한, 그는 원경제가 감정을 찾아가서 증명을 요구할까 봐 두렵지 않았다.
감정 그 약삭빠른 인간에게도 이 정도 암묵적인 약속은 있을 것이다.
진 공공은 이 반응이 전혀 의외가 아니라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어 물었다.
“유가의 그 조각칼은…….”
허칠안은 잠시 헤아리다가 막 입을 열려는 참이었는데 조위가 듣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운록서원은 400년 전에 멸불을 할 수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가능하지요.”
허칠안은 즉시 말했다.
“원장님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진 공공은 원장 조위를 쳐다보더니 웃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서원이 도운 것이었군요.”
사실 이번 두법은 부정행위를 한 셈이지만, 불문 자신도 떳떳하지는 않았다. 금강진을 부술 때 말로써 정사를 각성시키지 않았는가. 세 번째 관문 때는 도액 나한이 직접 시험장에 들어가 허칠안과 불법을 논했다.
따라서 불문은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고, 조각칼 일을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지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허 대인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진 공공은 일어서서 떠났다.
* * *
원경제는 황궁에서 단약을 먹고 좌선하며 토납하던 중 미세한 발소리를 들었다. 그가 눈을 감은 채 담담하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늙은 태감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한림원에 말을 전하러 갔던 노비가 돌아와 보고하였습니다. 그 공부벌레들이 문장을 바꾸려 하지 않을뿐더러 그를 한 차례 때렸다고 합니다.”
“이 개자식들이.”
원경제는 눈을 뜨고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권모술수를 논하자면 원경제는 그 수준이 최고봉이지만, 고집이 아주 센 그 청귀들을 상대할 때는 ‘폭력’만이 최고이자 유일한 수단이었다.
당신이 권모술수를 부려 설법하려 들면, 그들은 귀를 막고 말할 뿐이다.
<안 들어, 안 들어. 후레자식이 경을 읽네.>
“됐네, 천천히 괴롭히게.”
원경제가 말했다.
그는 어쨌거나 좀 꾸물거리고 싶을 뿐이지, 야단법석을 떨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그의 명성에 너무 큰 영향을 미친다.
그는 말을 마친 다음, 아직 가지 않은 늙은 태감을 쳐다보더니 물었다.
“다른 일이 있는가?”
늙은 태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 은라가 깨어났습니다. 사예감의 진 공공이 말을 전해 왔는데요…….”
즉시 허칠안의 대답을 한 차례 구술했다.
“단서철권?”
원경제는 뜻밖의 일로 깜짝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이어 비웃으며 말했다.
“벼슬이 높아지고 작위를 올려준다 해도 됐다 하고, 금은보화와 비단도 됐다 하고 단서철권 한 장을 달라?”
황제는 비록 말은 이렇게 했지만, 마음속으로 한참을 저울질하면서 대답하지도 거절하지도 않았다.
늙은 태감이 소리를 낮추고 웃으며 말했다.
“허 대인의 속마음은 명확합니다. 폐하께서 사람을 잘 보고 잘 활용하는 것이며, 조정이 인재를 등용한 데에 공이 있음을 알기에 공로를 자처하여 오만하게 굴지 않더군요. 그가 만약 작위를 위로 올려 달라고 제시한다면…… 폐하께서는 무척 성가실 겁니다.”
‘이 자식의 의식이 한림원의 그 공부벌레들보다 훨씬 낫군…….’
원경제는 순간 더는 망설이지 않고 나지막이 말했다.
“허가한다.”
늙은 태감의 말은 옳았다. 확실히 그러했다. 짧은 기간 내에 연달아 작위에 봉작되는 일은 전란 시대에나 가능했다. 벼슬을 높이는 건 쉬우나 작위를 올리는 건 어렵다.
‘조각칼의 등장은 원장 조위가 도와줬기 때문인가?’
원경제는 잠시 침음하더니 순간 직감적으로 떠오르는 게 있어, 좌선을 끝내고 분부했다.
“영보관으로 마차를 대령하거라.”
* * *
영보관.
“국사, 이번 두법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우리 대봉이 국위 선양하였습니다. 머지않아 남강 오랑캐와 북방 오랑캐 그리고 무신교 모두 이 일을 알아내리라 믿습니다. 일개 은라가 나서서 두법하였으니 각계에서 우리 대봉의 국력을 시기하고 의심하며 두려워할 것입니다. 양천환이 나선 것보다 효과가 훨씬 크죠. 국사, 국사?”
낙옥형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흐트러졌던 아름다운 눈동자가 생동감을 되찾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폐하, 뭐라고 하셨습니까?”
원경제는 농염하고 매혹적인 국사를 뚫어지게 주시하더니 의심하며 말했다.
“국사, 마음이 다른 곳에 있는데 무슨 근심거리라도 있습니까? 말씀하셔도 무방합니다. 짐이 반드시 국사를 도와 해결하겠습니다.”
원경제는 인종 도수이자 도문 2품인 낙옥형이 이렇게 걱정거리로 마음이 무거운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일은 지금껏 없었다.
‘천인 간의 전쟁 때문에 부담스러워하는 건가? 이 여인은 왜 짐과 쌍수를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짐의 불로장생 계획이 여기에 끼어 있다…….’
그는 이런 생각이 스치는 사이 고개를 젓는 낙옥형을 보았다.
“관심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별일 없습니다.”
원경제는 고개를 끄덕일 뿐 더는 캐묻지 않았고, 이번에 영보관에 온 목적을 말했다.
“국사는 아십니까? 두법할 때 운록서원의 조각칼이 나타났습니다. 짐은 그것이 성인의 유물이자 서원의 지보임을 압니다. 조각칼이 이번에 세상에 나온 이유는 다른 내막이 있기 때문이지요?”
“폐하께서는 왜 그렇게 의심하시는지요?”
낙옥형이 반문했다.
“성인의 조각칼은 보통 사람이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3품 입명인 조위도 쓸 거란 장담은 할 수 없지요.”
원경제는 그래도 지식이 있었다. 더욱이 운록서원은 일찍이 조당을 장악했었기에 유가의 자료가 조정에 부족하지 않았고 관련된 비밀도 있었다.
낙옥형은 다소 침음하더니 그다지 개의치 않고 웃었다.
“조위가 비록 3품이지만, 서원에는 4품 군자경(君子境)이 셋이나 더 있으니 손을 맞잡고 조각칼 사용을 촉진시키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게다가 유가와 불문은 원래 원한이 있지요. 그해 멸불은 마침 서원이 주도했습니다. 운록서원이 나설 거라는 건 예상 밖이었지만, 이치에 맞습니다.”
“짐은 국사를 아주 신뢰합니다.”
원경제는 의심을 거두었다.
낙옥형은 원경제를 떠나 보낸 뒤 정실로 걸어가 정자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 * *
허칠안은 위연에게 자신의 상황을 보고하러 야경꾼 관아로 갔다. 그는 호기루에 들어갔을 때 목을 내밀어도 죽고 목을 움츠려도 죽을 것 같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제대로 구상하여 거짓말을 더욱 매끄럽게 다듬었다.
누가 알았겠는가! 위연은 뜻밖에도 캐묻지 않았다. 위연은 그의 몸 상태가 양호하다는 얘기를 듣더니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고, 그에게 남아서 차 한 잔 마시라고 하며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했다.
허칠안은 호기루를 나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위 공은 어쨌거나 도를 닦지 않는 보통 사람이야. 이론 지식은 견고하나 그 속의 비결을 알아차리지는 못하는군……. 게다가 그는 총명한 사람이니 진작에 모든 걸 간파하여 나의 폭발은 감정이 암암리에 도운 것이라 여겼겠지……. 조각칼의 일은 운록서원 때문이고.’
허칠안은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입꼬리가 올라갔다.
감정을 제외한 다른 사람은 모두 2층에 있었고, 자신은 5층에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 * *
황혼, 허칠안은 아주 홀가분한 마음으로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는 바깥뜰을 지나자 곧 짙은 향기를 맡았다.
숙모가 부엌에 맛있는 요리를 한 상 가득 차리라고 시켰다. 심지어는 바깥 주루에서 사 온 요리도 있었다. 당연히 허칠안을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식사하며 숙모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렇게 대가족을 나 혼자서 보살펴야 한다니. 안팎으로 정신없이 바빠서 힘들어 죽겠네.”
숙모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불평했을 뿐이었기에 허영월이 기회를 잡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여동생이 말했다.
“그럼 어머니, 장부를 제게 맡기세요.”
이 장부는 집안의 ‘은전’, 능라 주단 및 바깥의 경작지와 점포를 포함한다. 현재는 모두 숙모가 ‘관리’하고 있었지만 문맹이라 허영월이 조수 노릇을 했다.
일은 적게 하지 않으나 권력은 여전히 숙모가 손에 쥔 채였다. 허영월은 오늘 가족들에게 옷을 사주자고 제안했다. 숙모가 동의하지 않아 모두가 입을 옷이 없었다.
“네가 뭘 관리한다는 거야. 설령 관리한다 해도 앞으로 칠안이나 신년의 며느리에게 맡길 텐데 네 지분이 어디 있니?”
숙모는 ‘반역을 꾀하려는’ 딸의 생각을 억눌렀다.
‘설령 칠안이나 신년의 며느리일지라도 내 권리를 빼앗을 생각은 단념하라고…….’
숙모는 마음속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
* * *
저녁 식사를 마치고 허신년이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갑자기 말했다.
“형님, 저를 따라 서재에 가시죠. 저 형님에게 할 말이 있어요.”
허칠안은 아우를 쳐다봤다. 그는 진지한 얼굴을 한 채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또 무슨 일이 생긴 거지?”
허칠안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허신년을 따라 서재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