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화. 충격 받은 낙옥형
쪽빛 적삼의 중년이 경악하며 주인장을 쳐다봤다.
“자네 진작에 알았으면서 왜 이런 규칙을 정한 건가?”
“사람마다 보는 게 다르지요. 부족한 점을 찾아 보충하는 게지요.”
주인장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오늘 제가 주루를 지키느라 두법을 보러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인생의 큰 아쉬움입니다. 어쩔 수 없이 사후에 반복해서 음미하고 술을 좀 마셔서 유감을 통쾌한 일로 만들었죠.”
쪽빛 적삼의 중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말했다.
“……그 허 은라가 나온 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시 한 구절을…….”
“잠깐.”
주인장이 갑자기 소리치더니 말했다.
“바다가 하늘 끝에 닿고, 무도는 절정에 달하니 내가 최고봉이네? 이 시가 있는 게 확실합니까? 앞서 왔던 여러 사람들이 제게 이 단락을 얘기했지만 말하지는 않더군요.”
쪽빛 적삼의 중년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있네, 있고말고. 내가 수십 년 전에 학문을 공부했다고 시 몇 마디를 기억하지 못하겠나?”
“씁……. 이거 이상하군요.”
주인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때, 한 강호 인사가 ‘콜록콜록’ 기침 소리를 내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주인장, 자네에게 이런 얘기한 건 전부 강호 협객들이겠지.”
주인장이 반문했다.
“문제라도 있습니까?”
“하하!”
강호 인사가 손을 내저었다.
“자네 같은 보통 사람들은 상관없지. 말하면 말하는 거지. 하지만 무술을 연마하는 사람으로서 누가 감히 조정과 관중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죽을 자리를 찾는 거 아니면 맞으려고 작정한 것 아닌가.”
주인장은 문득 모든 걸 깨쳤다. 싸움에 능한 무사는 누군가 날뛰는 걸 가장 두고 보지 못한다. 상대방이 타당하지 않은 말을 몇 마디 자주 내뱉기 때문에 칼을 뽑아 마주한다. 이런 일은 설령 규칙이 삼엄한 경성일지라도 흔히 발생하곤 한다.
“또 좋은 시를 한 구절 수집했군. 이건 허 시괴의 시야. 어서, 어서 내게 종이와 붓을 준비해 주게.”
흥분에 겨운 주인장이 심부름꾼에게 분부했다.
* * *
내각에 귀속되는 한림원은 역사 서적 편찬, 조서의 초안을 잡아 황실 구성원에게 가르침 전수하고, 과거 감독관을 담당하는 등의 역할을 맡는다.
조정에서 가장 고결한 세 직위는 도찰원의 어사, 육과(六科) 급사중, 한림원이다.
지위를 논하자면 한림원이 가장 우위에 있다. 한림원은 또 다른 호칭이 있기 때문이다. 저상배육기지(儲相培育基地).
대봉에서 재상을 역임한 사람은 모두 한림원 출신이다. 바꿔서 얘기하자면 한림원의 청귀(淸貴)만이 내각에 들어가고 대학사가 되고 나아가 재상 관직을 맡을 수 있다.
유일한 예외가 바로 한림원을 바로 뛰어넘어 내각에 들어가 상권(相權)을 장악할 수 있는 훈귀 혹은 친왕이다.
하지만 문관은 이렇게 할 수 없다. 문관이 내각에 들어가고 싶으면 반드시 한림원에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한림원에는 일갑(一甲)과 이갑(二甲) 진사만이 들어갈 수 있다.
바로 이때, 원경제 침전에서 당직을 서던 환관이 마침 한림원의 대청 안에 서서 청귀들을 큰 소리로 꾸짖던 참이었다.
“이 두법의 승리가 폐하께서 사람을 현명하게 쓴 덕이 아니란 말인가? 조정에서 허 은라를 양성한 공이 아니란 말인가? 자네들이 무엇을 썼는지 보게. 하나같이 일갑 출신이면서 역사를 편찬하라는 것도 못 하는가?”
환관은 책을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
“다시 쓰게.”
자리에 있는 청귀들의 얼굴빛이 변했다. 그들은 한림원에 돌아간 후에 밥조차 먹지 않고 강한 의지를 가지고 붓을 휘둘러 썼다.
오늘 이 두법은 반드시 사서에 기재되어 후세에 널리 알려야 한다. 이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중시할 점이 아주 많았다.
무릇 이런 국위를 선양하는 큰일은 역사상에 반드시 긍정적으로 기재하여 영예와 광휘를 상징해야 한다.
권력자, 그러니까 원경제는 좀 빈대 붙고 싶었다.
물론 다른 황제가 이런 기회를 마주해도 원경제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한 젊은 편수(*編修: 국사 편찬에 종사하던 사관)가 나지막이 말했다.
“사람은 감정이 선택했고, 두법은 허 은라가 힘을 썼는데 이게 폐하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저희는 명색이 한림원 편수로서 조정을 위해 사서를 편찬하는 것뿐만 아니라 후대 자손들을 위해 역사를 씁니다.”
환관은 냉소를 짓더니 괴상야릇하게 말했다.
“한림원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은 폐하께서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이지. 장차 내각에 들어가는 건 조만간의 일이네. 매일같이 눈부시게 빛나며 탄탄한 앞날을 걷겠지. 만약 폐하의 심기를 건드리면 그들은 밖으로 배치될 것이네.
쯧쯧, 이렇게 좋은 앞날인데, 행복한 나날은 둘째 치고 빛조차 사라질 걸세. 폐하의 뜻은 편폭은 변화시키지 않고, 두법과 폐하께서 현명한 자를 등용한 과정을 상세하게 기술하는 걸세. 허 은라의 공적과 은덕 찬양에 관해서라면, 그는 필경 젊으니 앞으로 얼마든지 기회가 있네. 대인 여러분, 이해했나?”
젊은 편수가 벼루를 쥐더니 환관의 가슴에 내리쳤고, 먹물이 망포를 까맣게 물들였다. 환관은 끙끙 소리를 내며 연신 뒷걸음질 쳤다.
“자네가 감히 나를 때려?”
환관은 크게 노했다.
“네, 때렸습니다.”
그 편수는 환관에게 삿대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번에 서역 사절단이 경성에 들어와서 한 일이 뭔지 아십니까? 금강은 남성 연무대를 지키고, 북성의 법사는 경전을 설법했습니다. 나중에는 법상이 세상에 강림하여 감정에게 질문을 던졌지요. 그 후, 사천감과 불문이 두법하여 허 시괴가 기울어져 가는 정세를 바로잡고, 불문의 기세를 꺾었습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조정은 이번에 체면을 전부 구겼을 겁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공적과 은덕을 찬양할 수 없고, 무슨 근거로 문장을 축소시켜야 합니까? 본관은 마음속 깊이 소년 호걸을 탄복합니다. 그가 만약 지식인이라면 저는 그를 스승님으로 모실 것입니다.”
“썩 꺼지십시오. 한림원은 당신 같은 환관 나부랭이가 행패를 부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꺼지십시오!”
다른 청귀들은 옆에 잡을 수 있는 물건을 집어 몽땅 내던졌다. 붓, 먹, 종이, 벼루, 서책, 붓걸이…….
환관은 허둥지둥 도망쳐 한림원을 나왔다.
* * *
화려하고 아리따운 궁장 차림에 치맛자락을 바닥에 질질 끌고 머리에는 진귀한 장신구를 단 여인이 영보관의 내원에 이르러 단정한 몸가짐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분부했다.
“너희 둘은 잠시 먼저 내려가 있거라. 국사께 드릴 말씀이 있다.”
수행하던 두 여종은 마당에서 물러났다.
여인은 단숨에 활기차지더니 치맛자락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정실로 들어가서 외쳤다.
“국사, 오늘 두법할 때 왜 보지 못했지? 오늘 두법 봤어?”
검은색 도포를 입고 가지런히 빗은 머리에 연화관을 써서 반질반질한 이마와 경국지색의 외모를 드러낸 낙옥형이 정실 안에서 부들방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거드름을 피우며 쳐들어오는 여인을 바라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흥미 없어.”
“볼거리를 놓쳐서 아쉽게 됐네.”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탁자 옆으로 와 앉더니 말했다.
“오늘 두법은 정말 훌륭했어. 극단이 하는 공연보다 더 재미있었다고. 내가 너한테 얘기해 줄게…….”
그녀는 재잘재잘 두법의 과정을 아주 생생하게 낙옥형에게 들려주었다.
“네 말은 그가 단칼에 팔고진을 부쉈다고?”
낙옥형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니까, 정말 대단해. 왜?”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물었다.
‘감정이 그를 돕고 있었어, 심지어 그를 위해 중생의 힘까지 동원했다니…….’
낙옥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계속 얘기해 봐.”
면사포를 쓴 여인은 허칠안이 단칼에 금강진을 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낙옥형은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다. 노승과 불법을 논하고 도액 나한이 깨달음을 얻게 했다는 얘기를 할 때 여인은 감개무량하게 말했다.
“비록 대승불법이 뭐 그리 대단한 건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듣기에는 아주 대단한 것 같았어.”
‘대승불법이라……. 그가 이렇게 오성(悟性)이 있다고?’
낙옥형의 아름다운 눈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이것들은 별거 아니야. 가장 대단했던 건 네 번째 관문이라고……. 그때 금신 법상이 나타나서 그 색마가 무릎을 꿇게끔 압박했는데 이때 가장 재미있는 광경이 나타났지…….”
면사포를 쓴 여인은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하고 자신에게 차 한 모금을 꼴꼴꼴 주입시켰다.
낙옥형이 웃으며 말했다.
“천천히 마셔. 남치, 혹시 뭐 하나 발견하지 못했니?”
“뭐를?”
“너 예전에 우리 영보관에 오면 항상 지루하다고 나가서 놀고 싶다고 징징댔잖아. 하지만 지금은 이제 지루하다고 말하지 않아.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한테 하는 얘기 중에 대부분은 허칠안과 관련되었더라고.”
면사포를 쓴 여인이 멍해졌다. 그녀는 낙옥형을 잠시 주시하더니 활발한 기색을 거두고, 다시 진중하고 단정한 귀부인이 되었다. 그녀는 태연하면서도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뜻이야?”
낙옥형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너는 부군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싶었어. 네 부군은 3품 무사 회왕이야. 그는 경성이 아닌 변방에 주둔하며 지키고 있지. 하지만 경성에는 그의 심복과 밀정이 많이 있어. 허칠안과 너무 많이 엮이면 안 돼. 자칫하면 그를 해칠 거야.”
면사포를 쓴 여인이 비웃더니 거만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어떻게 매일 교방사를 드나드는 색마와 연관될 수 있단 말이야? 너 지금 나를 욕보이는 거야?”
“아니면 됐고.”
낙옥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너가 말하지 않아도 뒷단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알아. 법상이 아무런 이유 없이 산산조각 난 거 아니야? 아마도 감정이 나섰겠지?”
방금 그녀는 중생의 힘이 부풀어 올랐다가 이내 풍랑이 잠잠해졌음을 알아차렸다.
감정이 남몰래 도왔거나 광명정대하게 나섰으리라.
경성에서 원경제는 기운이 부족하고 수련 경지도 약하다. 중생의 힘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은 유일하게 술사뿐이다. 술사 1품, 감정!
“아니야.”
면사포를 쓴 여인이 싸늘한 어조로 고개를 저었다.
‘속 좁은 사람 같으니라고. 걸핏하면 정색하고 말이야…….’
낙옥형은 웃더니 찻잔을 들고 물었다.
“아니라고?”
“청광 한 줄기가 하늘에서 내려와 금신 법상을 부수고 불경을 부쉈어.”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때 가까이 있어서 똑똑히 봤다고. 그건 조각칼이었어.”
‘조각칼?!’
귓가에 마치 벼락이 친 듯 낙옥형이 손을 부르르 떨자 따뜻한 차가 밖으로 튀었고, 그녀의 곱디고운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감정이 아니라니……. 감정은 유가의 조각칼을 안배할 수가 없는데…….’
낙옥형은 나지막이 말했다.
“조각칼, 조각칼은 어디 있지? 뒷단에 무슨 일이 발생한 건지 자세하게 얘기해봐.”
그녀의 말투에 급박함과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드러났다. 면사포를 쓴 여인은 지금껏 낙옥형의 이렇게 풍부한 감정 파동을 본 적이 없어서 이상해하며 물었다.
“왜 그래?”
“빨리 말해!”
낙옥형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선 소리쳤다.
“……조각칼이 법상을 부쉈지.”
“조각칼이 법상을 부순 뒤에 달아났어, 아니면 현장에 남았어? 허…… 허칠안 그자가 조각칼과 접촉했어?”
낙옥형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이 점이 아주 중요한 듯했다.
“남았지. 그는 단칼에 사찰 안의 법상을 찔러서 깨트렸는걸.”
여인은 오른팔을 들어 앞으로 ‘찌르는’ 손동작을 취했다.
낙옥형은 멍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