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화. 선기(禪機) (4)
“자고로 영웅은 젊은 사람 중에서 나오는 법…….”
왕 소저는 부친이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걸 들었다.
‘확실히 대단한 영웅이긴 해…….’
왕 소저는 속으로 말했다. 그녀가 한 바퀴 쭉 훑어보니 낯익은 대갓집 규수들이 불산 계단에 꿋꿋하게 선 소년을 바라보며 얼빠진 눈빛을 했다.
그중에는 변함없이 우아한 자태를 유지하는 귀부인들도 몇몇 있었다. 그녀들의 눈빛은 매우 침략적이면서도 밝게 빛났다. 그녀들은 눈을 깜박이며 그 청년을 주시했다.
‘장원이라고 해도 그처럼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지.’
왕 소저는 속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
* * *
쿵쿵, 쿵쿵…….
임안은 북을 치는 것 같은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었다. 20년 동안 겪어 보지 못한 격렬함이었다.
* * *
허영월은 대단하기 그지없는 큰오라버니를 보다 다소 판단력을 잃었다.
숙모는 ‘쯧쯧’대더니 말했다.
“나리, 이번 두법 이후에 우리 집의 문턱이 중매 할멈들에게 밟혀 못쓰게 되겠어요……. 나리?”
허평지는 흐뭇한 얼굴을 한 채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형님이 점점 강해져 가. 그는 무도에서 용맹하게 정진하는데 나 역시 너무 많이 낙오되면 안 되지…….’
허신년은 슬그머니 주먹을 꽉 쥐었다.
* * *
‘회왕이 젊었을 때도 그처럼 이렇게 빛나진 않았지…….’
아주머니는 속으로 생각했다.
* * *
“대사, 잘 수양하십시오.”
허칠안은 칼을 거두고 칼집에 넣은 뒤 계속해서 산을 올랐다.
그가 운무가 감도는 숲을 누비며 일각을 걸으니 전방이 확 트였다. 바위가 겹겹이 우뚝 솟았으며, 성긴 초목 사이로 거대한 보리수가 한 그루 있었고 나무 아래는 노승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허칠안은 이것이 세 번째 관문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이미 이때 산꼭대기에 도달하기 직전이었다.
‘이 관문을 통과하면 산꼭대기에 관문이 하나 더 있을 거야. 마지막 관문일 테지…….’
허칠안은 양손을 합장하고 말했다.
“대사, 이 관문에서는 저희 무얼 겨루는지요?”
노승은 불호를 외더니 느긋하게 말했다.
“시주께서는 마음이 차분하지 않으시군요.”
‘입을 여니 딱 선사(禪師)네…….’
허칠안은 속으로 비아냥거리더니 반문했다.
“왜 차분해야 하지요?”
“마음이 평온해지면 방법이 생기고, 방법이 생기면 불(佛)이 생기고, 불(佛)이 생기면 고해(苦海)를 벗어날 수 있지요.”
노승이 대답했다.
“왜 고해를 벗어나야 하지요?”
허칠안은 또 물었다.
“왜 벗어나지 않습니까?”
노승도 반문했다.
“왜 벗어나야 합니까?”
허칠안은 고집을 부렸다.
“왜 벗어나지 않습니까?”
노승은 여유롭게 말했다.
* * *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선기(禪機)를 논하고 있잖나. 이것도 알아듣지 못하다니.”
“자네는 알아들었는가? 그럼 내게 알려주지.”
“헛소리. 내가 만약 알아들을 수 있다면 내가 고승이 됐겠지. 하지만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현묘한 이치를 품었다 할 수 있는 걸세.”
“그렇군.”
백성들은 바깥에서 귓속말로 속삭였다. 반응은 저마다 달랐다. 어떤 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한 글자 한 마디 그들의 대화를 음미하여 그 속에서 선기의 진리를 깨달으려 시도했다.
어떤 이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거나 고개를 가로저으며 머리를 흔들기도 했다. 무언가를 깨달은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위로는 황칠 종신부터 아래로는 평민 백성까지 모든 사람이 허칠안이 하는 말을 들었다.
“대사, 저희 사람다운 말을 하시죠. 제가 방금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습니다.”
“세상 만물 모두 마음이 있지요. 만약 자비를 베풀고 만물을 감지할 수 있다면 구태여 사람의 말에 구애받을 필요가 있을까요?”
노승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양손으로 합장했다. 허칠안의 말에 전혀 노하지 않았다.
‘그럼 나한테 대봉 벼슬아치들의 관료적인 말투로 얘기하지 말지……. 서역 언어로 얘기하면 되지 않나……?’
허칠안은 속으로 빈정대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바로 말씀하시죠. 어떻게 두법합니까! 저한테 이런 쓸데없는 얘기하지 마시고요.”
“시주께서는 본질에서 벗어나셨는데 왜 두법을 하려 하십니까?”
노승은 미소를 지었다.
“분명 불문에서 제안하신 두법입니다만. 대사께서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건 불문의 체면을 잃을까 봐 두려워서입니까?”
허칠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시주께서 산허리에서 말씀하시길 출가인은 세상의 모든 현상에 공허하다고 하셨죠.”
노승은 인자하고 차분한 얼굴로 느릿느릿 말했다.
“세상의 모든 현상에 공허한데 체면이 뭐란 말입니까?”
“됐습니다. 대사께서는 저를 어떻게 시험하실 계획이신지요?”
허칠안은 성질을 참았다.
그는 까다롭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말을 하지 않는다는 상대는 프로불편러보다 무서웠다. 프로불편러는 적어도 필사적으로 당신 말속에 있는 허점을 쥐고 당신의 말에 반박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 말을 하지 않는 상대라면, 당신이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은 채 자신의 말만 할 것이다. 당신이 깨닫지 못하면 그건 당신이 가망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당신이 갖은 애를 써서 깨닫는다 해도 소용없다. 왜냐하면 그는 당신을 무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수행입니다. 시주께서 이 불문의 비경에 들어온 것 역시 일종의 수행이지요.”
노승은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수행합니까? 대사께서 가르쳐 주시죠.”
“수행은 개인에게 달렸는데 어찌 빈승에게 물으시는지요.”
‘수행 이 X새끼야! 사람 말 안할 거라 이거지? 이 몸은 상대하지 않겠어.’
허칠안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갑자기 이름 모를 불길이 솟구쳐 올랐고, 노승을 내팽개치고 옆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는 보호벽에 가로막혔다.
“제게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허칠안은 냉소를 지으며 돌아서서 칼자루를 쥐었다.
“세상의 모든 현상에 공허한 대사께서 제 칼을 받으실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군요.”
“아미타불, 그럼 해보시지요.”
노승은 시선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빈승은 문인(文印) 보살이 득도하기 전에 베어낸 집념입니다.”
‘문인 보살, 일품 보살?!’
허칠안은 무표정으로 손동작을 늦추며 말했다.
“대사님, 저희 방금 어디까지 얘기했지요?”
노승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시주께서 빈승에게 칼을 받으라 했지요.”
“대사님!”
허칠안은 매섭게 호통을 치더니 노승의 맞은편으로 걸어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양손을 합장한 채 비판했다.
“불문은 싸우고 죽이는 것만 할 줄 압니까? 설마 불문은 전부 싸우고 죽여 백성을 구제하였습니까? 대사, 저희 은자 한 전 이야기를 해 보지요.”
* * *
“개자식, 그, 그가 방금 쫀 거야……?”
임안은 작은 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돌려 회경을 쳐다봤다.
회경은 그녀를 곁눈질하더니 도도한 표정을 짓고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책략을 바꾼 것뿐이야. 병법에서 말하길 상병벌모(*上兵伐謀: 적의 계획을 깨부수는 것이 가장 좋은 공격이다)라고 하지 않니. 대적 역시 마찬가지야.”
임안은 문득 모든 걸 깨달았고, 자신이 편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자식은 쫀 게 아니라 똑똑하게 책략을 바꾸었을 뿐이었다.
‘에휴, 됐다. 허칠안은 그냥 두려운 거야……. 골이 빈 임안은 지나치게 속이기 쉽단 말이야!’
회경은 고개를 저으며 동정의 눈빛으로 여동생을 쳐다봤다.
허칠안은 상대방이 ‘보살’의 집념이라는 얘기를 듣자, 갈등을 슬기롭게 풀었다고 여겼다. 또한, 이로 인해 장외에 사람이 많이 모인 점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는 때를 정확히 아는 똑똑한 자였다.
하지만 이 행동은 그의 이미지를 더욱 뚜렷하고 재미있게 바꾸었다. 적어도 귀족 안식구들은 이 은라가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하는데 이 관문을 만약 폭력으로 통과하려 한다면 아마 두말할 것 없이 패할 걸세.”
남궁천유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이 자식…….’
금라들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약간 웃고 싶었지만 장소가 적합하지 않았다.
때때로 그는 전혀 무사 같지 않아 보였다. 찌질해지면 중압감도 전혀 없고 심리적인 부담도 전혀 없다. 하지만 그는 공교롭게도 자질이 일품인 무도 천재다.
“의부님, 이 관문의 현묘한 이치는 어디에 있나요?”
양연이 물었다.
금라들은 잇따라 위연을 쳐다봤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위연이 불문의 내부 첩자도 아닌데 세 번째 관문에서 무얼 겨루는지 그가 어떻게 알겠는가.
위연은 그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이때 황실 차양막 안에서 타는 듯이 붉은 궁장을 입은 소녀가 두 손으로 나팔 소리를 내더니 애교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저기, 중놈들. 이 관문에서는 뭘 겨루는가? 늙은 승려 진인가?”
그 소녀는 동글반반한 얼굴에 초롱초롱한 도화안을 지녔다. 언뜻 보면 아리땁고 다정다감하지만 아주 매혹적인 여인이었다.
도액 나한은 본래 상대하길 원치 않았지만, 말을 묻는 사람이 어느 공주임을 알고 예의상 설명했다.
“세 번째 관문은 내용이 없습니다.”
그가 이 말을 내뱉자 자리에 있는 고관대작들이 모두 경악했다.
“내용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인가?”
임안은 두 손으로 ‘탁탁탁’ 탁자를 치면서 자신의 불만을 표출했다.
도액 나한은 고개만 저을 뿐,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금라들은 문득 모든 걸 깨달았다. 어쩐지 위 공이 말을 하지 않더라니. 알고 보니 이 관문은 내용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내용 없이 어떻게 두법한단 말인가?
다들 의혹이 분분한 가운데 회경공주가 입을 열었다. 옥석이 부딪치는 듯한 맑고 싸늘한 목소리는 듣기 좋으면서도 질감이 있었다.
“주제가 없다!? 그럼 허 은라가 어떻게 대응하든지 간에 불문은 응하지 않거나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건가? 그가 패배를 인정할 때까지 그를 비경에 얽매이게 하겠다는 걸 의미하는 것 아닌가?”
그녀는 한 마디로 꿈속에 있는 사람들을 깨웠다!
각각의 차양막 안에 있는 문관과 무장들의 표정이 다소 변했다.
그들은 자세히 음미한 뒤 확실히 그러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무리 어려운 관문이라도 주제만 있으면 결국 돌파할 수 있다.
가장 성가시고, 가장 답이 없는 게 이런 내용 없는 두법이다. 조작의 여지가 크다. 문두든 무두든 불문이 한 마디로 부결할 수 있다.
불문은 영원히 불패의 땅에 서 있다.
“이건 뭐 생트집 잡는 거 아닌가? 두법을 하고자 하면 진을 치고 문두든 무두든 당신네 불문이 얼마든지 얘기하면 될 일인데 이게 뭔가?”
“억지 부려서 이긴 두법은 아마 이겨도 떳떳하지 못하겠지.”
“왕 재상, 폐하께서 자리에 계시지 않으니 나서서 말씀 좀 하십시오.”
성미가 급한 무장은 화를 내며 잔을 내던졌고, 도액 나한 등에게 삿대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문두든 무두든 두렵지 않다. 경성에는 고수가 넘쳐 나고 쌍방은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상대에 따라 대응하면 된다. 하지만 세 번째 관문은 정말이지 답이 없다. 허칠안이 안 되는데 다른 사람으로 바꾼들 되겠는가?
금군에게 가로막힌 외곽에 있는 백성들은 귀족들의 질문을 듣고 즉시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한데 요원한 거리에 있어 제대로 들리지 않는 걸 어찌하겠는가.
“어찌 된 일이지? 차양막 안에 계신 대인들께서 아주 분노한 듯한데.”
“불문이 생트집을 잡는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불문이 어째 생트집을 잡는단 말인가. 아이고, 급해 죽겠네. 세 번째 관문에 무슨 현묘한 이치가 있나?”